“무슨 일입니까?”
“또 이렇게 궁상떨고 있을까봐 왔지.”
비가 오면 자해흔이 아프다고 했다.
묘하게 기분이 처져있길래 국밥집으로 억지로 데려가 술을 권하자, 그날따라 거부 없이 몇 잔이나 연거푸 들이켜던 최윤이 무슨 고해성사라도 하듯 조용하게 한 말이었다. 이런 말을 저에게 털어놓을거라 생각지 못했던 화평은 순간 지었던 놀란 낯을 빠르게 갈무리 한 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잔을 든 손이 휘청휘청 엉망으로 흔들리는 걸 보니 잔뜩 취한 듯 싶었다. 허나 무게 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긴 소매가 행여나 조금이라도 올라갈까 싶어 틈만 나면 아래로 소매 끝을 잡아당기는 최윤을 본게 여러 번이었다. 불쑥 치솟을 뻔한 오지랖을 잡아 누르고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었는데. 그것이 자해흔을 숨기고자 했던 행동이었음을 깨닫자 묘한 불편함이 목뒤를 벅벅 긁게끔 만들었다. 어떤 식으로 아픈데? 화평의 여상한 목소리에 꾸벅 꾸벅 테이블을 향해 주억거리던 고개가 움칫 튀었다. 어어-. 말끝을 질질 끌더니 어지러운 머리를 몇 번 터는 걸 인내심 있게 기다리길 조금.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몇 번이나 손목에 파고들어요. 아니 파고드는 것 같아요. 음, 찢어지는 느낌 같기도 하고 베이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그걸 잡아 벌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어쨌든 아파서, 너무 아파서 몇 번이나 그 위를 쓸고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아요. 흔적뿐인 고통이니까 그걸 치료할 방법조차 없이, 그냥 무기력하게 그 아픔에 고통 받는 수밖에 없죠.
업보인가봐요, 업보.
사제가 감히 자살 시도를 하려 했던 업보 말이에요.
“-윤화평 씨?”
“-어, 어?”
“들어오지 않고 왜 멍하니 서있습니까?”
“어어, 아니다. 들어가고 있잖아.”
최윤의 탁했던 음성을 떠올리면 납덩이가 얹어진 것 마냥 가슴이 묵직해진다. 싱겁네요. 하며 멀뚱히 서있는 화평을 두고 돌아선 최윤에게서 축축한 땀내와 젖은 천 내음이 났다. 윤을 따라 들어간 화평의 눈이 제일 먼저 침실 쪽으로 향했다. 평소 깔끔하게 접혀있는 모습만 봤던 이불이 둥글게 말려있었다. 쉬게 놔둘걸 괜히 찾아왔나 미안함이 스쳤지만, 저를 본 낯에 언뜻 스쳤던 반가움을 믿고, 기왕 온거 뻔뻔하게 나오기로 했다. 뻔뻔한 척 구는 것은 익숙했다.
“몸은, 괜찮아?”
“-그렇죠, 뭐.”
딱 부러진 말이 나오질 않는 것 보니 확실히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애매모호한 말은 별로 하지 않는 최윤이었으니까.
완전히 지친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비가 며칠간 멈추지 않았으니 더욱 그럴 것이었다. 혹여나 욱신거림이 멈출까 해서 상처 약을 손목에 덧바르기도 했다고 했다. 소용없는 일이란 걸 모를 리 없었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웠단 거겠지. 소파 옆에 널브러진 약통을 주워 익숙하게 선반에 올리는 화평을 눈으로 좇던 윤이 물었다. 술 사왔어요?
-
벌써 10년 전 일인데 아직도 제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화가 날 정도입니다. 술에 취해 슬쩍 기울어지려는 몸을 부축하자 어린애 같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최윤은 술에 취하면 꼭 아이라도 된 양 군다. 나이차이가 많이 났던 형에게 했던 투정을 기억하는지, 익숙하게 칭얼거리는 윤의 꼭 감긴 눈을 보던 화평은 부축을 위해 팔뚝을 잡은 손을 옮겨 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르긴 했어도 덩치가 작지는 않은 사람인데도 화평의 품에 쏟아져 내리는 윤은 작고, 어리고 애달팠다. 아예 무너져 내린 머리가 화평의 무릎에 올려졌다. 불편하지 않아? 화평의 물음에 고개를 내젓는 윤에게선 알싸한 술 냄새가 났다.
맨 정신이면 화평도 윤도 질색을 했을 무릎베개를 하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가슴을 규칙적으로 다독여주는 화평의 손을 느끼며 느긋하게 눈을 감은 윤은 술기운에 몸이 따끈할 터인데도 추운 사람처럼 몸을 옹송그린다.
“왜, 추워?”
“아니요, 안 추워요. 그냥”
“그냥?”
“그냥…. 무서워요.”
뭐가? 라고 되묻지는 않았다. 내가 옆에 있잖아, 라는 말도 삼켰다. 그저 계속 다독다독 두드려줄 뿐이었다. 별것 아닌 손길이었음에도 윤에게 위로로 다가가길 바랐다. 부디. 긴 몸을 잔뜩 구기고, 양 손을 가슴팍 앞에 모으고 웅크린 윤이 잠이 빠져든 걸 확인 했음에도 화평은 다독임을 멈추지 않은 채 가만히 윤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화평이 비 오던 날 방문했을 때 윤은 명백한 거절을 입에 담았다. 내가 실수로 –‘실수’라 칭했다 최윤은-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지언정, 이 이상은 쓸데없는 참견이고 오지랖이라며 말로 할퀴기 바빴다. 화평이 가지고 온 술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숨을 몰아쉬던 윤의 온 얼굴을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렇기에 화평은 물러설 수 없었다. 늘 단정했던 얼굴이 잔뜩 흐트러져 있으면서, 구해달라고 온 몸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세우며 밀어내는 게 화도 났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윤화평이 최윤을 포기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윤화평은 최윤을 사랑했다.
최윤은 윤화평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의지한다. 같은 목표를 가진, 그 목표를 위해 어려운 상황을 함께 한 동료의식에 가깝다는 걸 물론 알았다.
윤화평은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무게가 같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화평은 본디 욕심을 낼 수 없는 삶을 살았기에 윤의 감정에 대한 포기도 빨랐다.
그냥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니까, 그리고 너는 나를 싫어하진 않으니까. 그걸로 족해.
-
윤이 잠에서 깬 건 자꾸만 들리는 앓는 소리 때문이었다. 바스락, 이불이 스치며 나는 소리에 섞여 나는 화평의 울음기 있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끙끙 거리는 화평이 보였다. 예전엔 제법 통통했던 몸이 삐쩍 말라 웅크린 등에 날개 뼈가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윤화평 씨, 일어나요.
윤이 몸을 완전히 일으켜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던 화평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마냥 화평의 호흡을 확인하고 경직된 몸을 천천히 주물러 주는 행동은,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했다.
윤화평은 박일도를 스스로 받아들였다. 마치 자신이 짊어지는 게 업보라는 듯이.
‘이제부턴 내가 할게, 지금까지 고마웠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이 화평의 목소리가 허공에 부유했다. 입에 잔뜩 고인 피는 화평의 목구멍에서부터 꾸역꾸역 쏟아져 나와 턱으로 잔뜩 흘렀다. 피가 방울져 떨어진 바다는 금세 화평의 흔적을 집어삼켰다. 남이 보면 인상을 잔뜩 찌푸릴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임에도 화평의 얼굴은 차라리 평화로워보였다. 그렇기에 윤은 덜컥 겁이 났다. 정말로 끝인 것 같아서.
스스로 바다 깊은 곳으로 걸음을 떼 서서히 잠겨 사라지는 화평을 막아보려 몸을 던졌다. 물 속에서 눈을 뜨자 심해로 가라앉는 화평이 보였다. 주변에 잔뜩 번진 화평의 피도 보였다. 윤은 제 목숨을 걸 작정을 했다. 박일도 때문에 화평을 잃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니 그 누구 때문이던 간에 화평을 잃을 수는 없었다. 최윤에게 화평의 존재는 그랬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곁에 없으면 이상한 사람. 소중한 사람. 윤은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기꺼이 화평을 향해 기도했다. 멀어지려하는 화평을 잡아 올리며, 화평을 앗아가려는 악을 없애려. 눈앞이 가물거려왔고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지만 부디 신이 화평을 앗아가지 않아주기를. 기도했는데. -다시 뜬 눈 앞에 화평은 없었다. 길영의 울음만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윤화평이 사라지는 것을, 홀로 짐을 짊어지고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길영을, 윤을 괴롭혔다.
저런 깊이의 바다에서는 살수가 없어요. 물살도 거세고. 게다가 맨 몸이었다면서요.
다들 의미 없는 일이라 만류했지만 둘은 미친 사람처럼 화평을 찾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양 굴었다.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결과는 절망만 안겨줬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화평의 마지막 모습이. 스스로 바다 속으로 잠겨드는 뒷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도저히.
긴 시간동안 화평의 귀환을 믿고 바라며, 꾸역꾸역 견뎌온 두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화평이, 혹여나 환상이 아닐까. 강한 열망의 시간이 헛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세 사람은 재회했다. 꼬박 1년만이었다.
화평은 조금 길어져 덥수룩한 머리와, 하얗게 바래진 오른쪽 눈과 함께 돌아왔다.
-
화평은 잠에서 깨어난 뒤로도 한참을 앓았다. 미처 막지 못해 잇새로 새는 신음이 고통에 절어있었다. 손바닥으로 흐린 오른쪽 눈을 꾹꾹 눌러대며 아픔을 누르고자 이를 악문 화평의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화평의 손을 잡아 내리고, 찬물 적신 수건을 눈 위에 얹어 살짝 눌러주자 움칫 놀랐다가 곧 몸이 느슨하게 풀렸다.
“많이 아파요?”
“아프긴 무슨.”
원래도 방어적인 사람이었지만, 재회 후 화평은 가능한 속마음을 밖으로 꺼내려 하지 않았다.
기쁜 일이 있어도, 화가 치밀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일에도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히는 모습이 답답해 이유를 물은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을 대신하는 화평의 조용한 미소였기에, 윤은 화평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1년간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 하지 않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화평의 속내를 들을 자격은 윤에게 없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에 서운했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감정을 누른지 벌써 몇달 째인데도, 아플 때조차 자신에게 의지하기는커녕 홀로 감내하려 몸을 더욱 웅크리고 신음을 참는 화평의 모습은 윤에게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고통을 주었다.
진통제라도 줄까요?
아니.
찬물 한 번 더 적셔올게요.
괜찮아.
윤화평 씨.
나 정말 괜찮아. 최윤.
…….
정말이야,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 방해됐지? 미안하네…….
또 이런 일 조차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화평에게 벌컥 화를 내 버릴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문 윤이 낮게 속삭였다.
“저, 갈까요. 윤화평씨?”
“…….”
“방해되는 건 제 쪽 아닌가요?”
낮에, 본인의 집에 불쑥 찾아온 윤을 보던 화평의 표정이 떠올라 조금 삐딱하게 말이 나가고 말았다.
말을 뱉음과 동시에 후회한 윤이, 그게 아니라….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눈에 올렸던, 이제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내리고 가만히 윤을 응시하던 화평이 또 그 웃음을 지었다. 모든 건.
“방해되는 건 내 쪽이지. 예전부터 쭉.”
모든 건 내 탓이고, 내가 원인이지. 그리 말하는 것 같은 웃음. 차라리 눈물 쏟길 바라게 되는 슬픈 웃음. 속이 또 다시 쓰렸다.
-
여러 날, 몇 번이나 반복된 화평의 거절이 아프긴 한 윤이었지만, 화평의 집을 찾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또 왔네, 하는 화평의 달갑지 않아 보이는 얼굴을 태연히 받아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 나름의 발전은 있었다. 한숨 쉬며 뒤돌아서는 화평에게 윤은 부러 부산스레 말을 걸었다. 언제부턴가 최윤은 제법 말이 많아졌다. 화평의 앞에서.
“계양진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어요.”
“…신부님은 계양진 근처에 무슨 이틀에 한 번씩 일이 생기십니까?”
타박 놓는 화평의 말에 어깨를 으쓱 하며 태연하게 입술을 삐죽이자, 웃음을 터트리는 화평이 좋았다.
울 것 같던 웃음에 장난기가 스며든 게 좋았다. 딱히 밀어내려는 걸 포기한 건 아닐 것이다. 그냥 윤이 밀리지 않았던 것 뿐. 그리고 화평이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 뿐.
“오늘은 제가 강 형사님 대신 소고기 사왔습니다.”
“강 형사님은 못 온대?”
“오늘은 바쁘대요. 출동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간 지도 삼일 째라던가.”
“힘들겠네.”
제법 안부도 묻는 화평이 윤의 손에서 소고기를 빼들어 냉장고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맨날 소고기야? 이젠 몸에서 피가 아니라 소고기가 흐르겠어. 화평의 투덜거림은 지독하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벅찬 마음을 즐기며 화평을 따라 들어간 방에서 가장 먼저 윤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깔려있는 두 개의 이부자리였다. 약간 놀란 눈으로 두 채의 이불을 바라보는 윤의 시선을 눈치 채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화평이 부러 불퉁하게 내는 큰 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아, 아니. 올 때마다 그렇게 자고 간다고 하니까! 어차피 깔게 될 거 미리 깔아 둔거야! 이따 귀찮을까봐!!! 그러니까 그렇게 웃지 말라고 최윤!
윤은 차오르는 감정을 막기 힘들어 화평이 창피해할걸 알았음에도 맑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 이불 치운다?!”
“-아니, 아니에요. 큽. 감사해요.”
“아 진짜….”
“진짜 고마워요 윤화평 씨.”
“…….”
화평이 저를 챙겨주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였을 것도 좋았지만, 자신의 방문을 더 이상 불편해하기만 하진 않는 것 같아서 윤은 가슴이 벅찼다. 쑥스러운지 몸을 휙 돌려 부엌에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하기 시작한 화평을 돕기위해 나서는 윤의 입에서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
.
.
가물가물한 시야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쏟아지는 졸음에 초점 맞추기가 영 힘들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자, 무언가 윤의 미간을 조심스레 눌러온다. 잔뜩 내려앉은 어둠이 한밤중임을 짐작케 했다. 순간 창밖에서 무언가 번쩍인 덕에, 그 무엇이 사람임을 알았다. 그제야 윤은 그 이가 화평이겠구나, 했다. 으음. 끙 소리가 절로 날만큼 오늘따라 잠에서 깨어나기가 힘들어 윤이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자 또 화평은 그런 윤을 만류했다. 왜 자지 않고 일어나 있는 걸까. 분명 화평이 잠에 빠진걸 확인하고 저도 잠자리에 누웠었는데. 윤화평 씨, 왜 안 잡니까…. 어물어물 중얼거리듯 묻는 윤의 말에도 화평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건지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화평은 윤의 이부자리 앞에 앉아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싶어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잠을 쫒으려 고개를 몇 번 털다가 몸을 일으키자 화평의 시선도 따라 올라왔다. 가물거리는 시야가 조금씩 잡혀가고 화평의 하얀 얼굴이 푸릇한 어둠 사이로 보였다. 화평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
“윤화평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직도, 아파?”
“네?”
“아직도 -오면, 아파?”
그제야 덜컹, 낡은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창틀이 삐걱 이고 유리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 큰 비는 아니었지만 바람 때문인지 창밖은 을씨년스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그 순간, 한 번 더 창밖이 번쩍 하고, 그 뒤로 제법 신경질적인 천둥소리가 따라붙었다. 그 탓에 화평의 말 일부를 놓치고 말았다. 네? 되묻는 윤의 얼굴을 살피며 윤화평은 한 번 더 입술을 뗐다.
“아직도, 비만 오면 아파?”
그러면서 제 마른 팔을 뻗어 윤의 손목을 쥐어오는 것이었다. 저가 더 아픈 얼굴을 한 채로. 뼈마디가 툭 불거진 손가락으로 윤의 손목을 제 눈앞으로 가져가서, 마치 고통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양 굴었다. 이제 최윤은 더 이상 비 오는 날 아프지 않음에도. 윤화평을 잃고나서 그따위 아픔은 아무 상관이 없어졌는데도 말이다.
윤화평. 화평은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혹여나 내가 아플까 걱정이라도 했다는 걸까.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있던 1년의 시간동안 저 이는 적어도 비오는 날 정도는 나를 생각했단 걸까. 최윤은 이 안타까운 사람을 어찌해야할까 눈앞이 어질해지는 걸 느꼈다. 자기 아픔이나 챙기면 되었을걸. 그땐 멀쩡했던 사람이 새롭게 여기저기 아프고, 다치고,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면서.
이럴 때조차 남을 생각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윤화평스러웠지만. 그랬기에. 윤화평스러웠기에 최윤은 가슴이 아팠다. 변하지 않았다는 게 안심이 되면서도, 하필이면 그런 점이 여전하다니. 한숨이 나온다.
아니요. 안 아파요. 최윤이 조용히 속삭였다.
“윤화평 씨만 옆에 있으면, 저 더는 아프지 않습니다.”
“…뭐?”
“근데 윤화평 씨가 없었던, 그 1년은.”
“…….”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아팠어요. 저.”
“…최윤.”
“이깟 상처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요.”
“윤아.”
“이제 떠나지 마요. 옆에 없으면 싫어요.”
“…….”
“아니면 저 다시 아플 것 같아. 아파서 죽을지도 몰라.”
당황스러움에 크게 뜬 눈이 사랑스러웠다. 화평은 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을 아픔도 보듬어주는 그런 큰 사람이었다.
화평의 무릎에 얼굴을 괸 채로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해서 또 품에 파고든 저를 안고 불편하게 몸을 굽혀 자고있던 화평이 보였다. 벽에 기대서 도롱도롱 잠든 화평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던 그 날이. 아마 윤화평을 사랑하게 된 첫날이 아니었을까. 윤화평을 잃게 되었던 날 최윤은 자신의 마음을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화평의 마음을 한참이나 눈치 못 챘던 것도. 눈치 채고 나서도 당황스러움에 데면데면 거렸던 것도. 그래도 멀어지는 게 싫어 이기적이란 걸 알면서도 다시 윤화평을 찾았던 것도.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까 확인하며 화평을 시험하듯 굴었던 것도.
그리고 자신의 마음도 화평과 같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망설이다가, 화평을 떠나보냈던 것도.
좋아해요. 윤화평 씨. 진짜 좋아해요. 사랑해요. 그러니까 이제 계속 내 옆에 있어줘요.
이제 내가 윤화평 씨를 챙겨줄래요. 화평 씨가 아픈 날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간호도 해주고, 기분 안 좋은 일 있으면 애교도 부려줄게요. 같이 산책도 가고, 강 형사님한테 불쑥 놀러도 가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수다 떨다 잠들기도 하고, 우리 그래봐요. 나랑 같이 해봐요.
화평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정신없이 옷소매로, 손바닥으로 손등으로 닦아도 쏟아지는 많은 눈물을 모두 훔치기는 무리였기에
윤은 화평을 품에 안아주었다. 옷에 와 닿는 화평의 얼굴이 잔뜩 뜨거웠다. 연신 코를 훌쩍이면서도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화평이 사랑스러워 더욱 깊게 안아준다.
화평이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연신 중얼거렸지만 치미는 울음 때문인지 뚝뚝 끊겨 무어라 말하는지 도저히 말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밤은 길었고, 다음날도 있으니. 그리고 부족하다면 그 다음날도. 계속. 앞으로 함께할 나날들이 이어질 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