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최윤을 구하는 법.
1.
유월의 끝섬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고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는 긴 장마를 맞이한다. 장마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리고 아궁이에 군불을 댄다. 섬 전체가 짜고 습한 폭우에 갇히기 때문이다. 해풍이 몰고 오는 소금기와 비가 품고 오는 습기가 만나는 일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흐늘흐늘 축축한 공간에 모래알을 뿌려 놓고 구른 것처럼 불쾌지수를 높인다. 부지런히 온갖 데를 쓸고 닦고 해도 소용이 없다. 비가 들이닥치더라도 때가 되면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그나마 기온이 내려갔을 때 방의 온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일로, 윤화평은 일찌감치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새벽 내 소강하여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자 다시 폭격처럼 쏟아졌다. 먼 하늘에서 거친 바다에 꽂히는 작살처럼 번개가 내리치니 동이 트자마자 야트막한 잠에서 깨었다. 화평은 옷을 대충 챙겨입고 나와 한참을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더위에 땀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화평은 졸린 눈을 부비며 잔가지를 불 속으로 하나둘 끊임없이 던져넣었다. 불이 곧 사그라들 것처럼 휘청였다.
꽤 오랜 시간 폐가였던 집은 곳곳에 비가 새고 외풍이 들었다. 겨울엔 아궁이에 불을 때놓으면 반나절을 버티지 못했다. 이 집을 화평에게 소개한 동네 이장이 수리를 싹 하고 들어가야 살만하다 얘기했지만, 화평은 잔금을 치르는 마지막 날까지 웃기만 했다.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니고. 때가 되면 떠나리라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 집에 머문 지가 벌써 한 해가 지났다. 거진 터를 잡았다 해도 거짓은 아니다.
큰귀신 박일도로부터 살아 돌아온 윤화평은 바닷가 마을에서 일 년 반, 끝섬에서 일 년을 보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었다. 변화는 더디고 시간은 빨랐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에 화평은 어느 정도 공감했다. 몸에 지닌 상처가 아물고도 흔적으로 남은 것처럼, 지난한 기억을 뒤로 두고 한참을 달려도 자꾸만 삶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져 돌아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특히 여름이 되면 더욱 그랬다. 그가 바다로 가 죽었다 산 것은 삼 년이 덜 된 늦가을의 일이었는데, 그는 끝섬처럼 때가 되면 여름 장마에 갇혔다. 아니, 그날의 동해에 갇혔다. 짜고 습해서 기분이 찜찜한 장마가 저를 끌어내린 바다와 비슷하여 때때로 우울감이 심한 날엔 수몰되는 기분을 느꼈다. 바다라면 계양진에도 있다. 그곳의 장마는 길지 않지만 폭풍우가 자주 벼랑을 친다. 견디지 못한 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 안에 자리 잡았던 큰 귀신이 소멸함을 알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더뎠다. 이대론 다시 계양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터를 잡게 되었다.
윤화평은 불길에 빠르게 타는 잔가지를 바라보며 속으로 염불을 외웠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타는 가지처럼 타죽거나 가지를 태우고 몸집을 키우는 불처럼 살고 싶다. 이리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니 목적 없이 사는 삶이 되어버렸다. 화평은 이게 사는 건지 죽은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따지면 죽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만.
한쪽 눈이 멀더니 다른 감각이 기이할 정도로 발달했다. 화평은 어떤 기척에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비바람이 만들어내는 뿌연 물안개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발소리였다. 또 비가 처마나 땅이 아닌 곳에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궂은 날씨에 그런 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화평은 집게를 부뚜막에 올려두곤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부엌에 난 쪽문은 망가져 닫히지 않아 떼버린 지 오래다. 문지방을 넘어 처마 아래에 서니 저 멀리, 커다란 검은 우산 하나가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비를 뚫고 손님을 데려오고 있었다. 화평은 슬몃 표정을 굳혔다.
이런 날, 굳이 폭풍우를 뚫고 오는 이가 있으니 화평은 기어코 살아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비틀비틀, 오롯이 화평에게 오고자 하는 지친 걸음이었다. 그 걸음걸음에 꽃은커녕 죽음으로 무게를 더해 주저앉힐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내리는 비에 빗살무늬로 구겨진 검은 셔츠를 입고. 흠뻑 젖어 더 짙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없이. 곧 더 거세게 몰아칠 비바람을 예상하며. 누군가에게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마을이 물기에 젖는 때에. 수마를 견디는 윤화평에게로 오는 그는.
- 왜 나와 있습니까? 여름 감기 들면 고생할 텐데요.
위아래로 검은 옷에 검은 우산을 쓰고도, 이제는 신의 종이 아닌 그.
최윤이었다.
2.
여름이라고 영원히 장마는 아니다. 작년엔 이상기후로 한 달을 채운다는 끝섬의 장마가 보름이 채 되지 않았다. 또 재작년엔 바닷가 마을의 긴 장마 끝에 가을이 오니 겨울을 상상하지 못하게 봄을 안은 손님이 왔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었다. 강길영과 최윤은 기어코 윤화평을 찾아냈다.
윤화평이 그들의 방문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는 계양진의 본가에 이것저것 사서 보낼 때부터 언젠가 두 사람과 재회하리라 생각했다. 재회가 더 늦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강길영은 촉이 좋았고 최윤은 끈질긴 면이 있었다. 게다가 머리도 좋았다. 그런 두 사람이 윤화평을 찾는 데에 일 년이나 걸린 것은, 당연히 윤화평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면 연락하지 않을 사이도 아니라 생각했고.
그런 두 사람을 윤화평은 보기 좋게 배신했다. 죽어서 넋으로 남는다면 찾아갔을 테지만, 살았으니 연락하지 않았다. 큰 귀신이 있으나 없으나 셋이 만날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은 수였다. 귀한 인연인지 삼생의 악연인지 모를 연이 아니던가. 게다가 두 사람은 각자 돌아갈 일상이 있었다. 제겐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윤화평은 두 사람이 일상을 살길 바랐다. 시간이 지나고 자신에게도 그런 일상이 생기면. 또 믿음에 확신이 생기면. 그때까지 제가 죽지 않고, 그들이 저를 잊지 않는다면. 그때 연락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당시 화평은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저를 기어코 찾아낼 것을 예상했음에도 그날이 오니 상상 이상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습관처럼 본심을 숨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화평은 진실한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연락하지 않은 솔직한 이유를 말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란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두 사람이 윤화평을 찾은 곳은 끝섬에서 배로 한 시간 걸리는 육지 마을이어서, 차만 있으면 상용시에서부터 왕래하기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길영은 주일마다 짬을 내어 안부 확인차 화평의 집을 방문했다. 올 때마다 양손에 무얼 바리바리 싸 들고 오긴 했으나, 그 정도는 화평도 나쁘지 않았다. 걱정하여 애틋한 맘도 시간이 가면 희석되어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길영은 바쁘니까. 형사니까. 실제로 재회하고 석 달즈음 지나자 사건으로 바빠져 불시에 드문드문 왔다.
문제는 최윤에 있었다. 그는 너무 자주 오고 너무 오래 곁에 머물렀다. 길영이 아예 짐을 싸 들고 이사를 와야 하는 거 아니냐, 비웃는데도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하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화평이 그를 겨우 설득해 이사 오는 것을 막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집 안 곳곳에 최윤의 물건이 놓여있는 것에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 이사를 했다. 맘먹고 오가면 어렵지 않지만 맘먹기까지 번거로운 곳으로. 배로는 한 시간 반에 차로 삼십 분 정도 걸리지만,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가 완공되기까지 일 년은 족히 남았던 끝섬으로.
따지자면 셋 중 삶의 토대가 그나마 단단한 길영은 윤화평을 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지만 최윤은 달랐다. 그는 윤화평을 찾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했다. 그 사실을 아주 뒤늦게 안 화평은 처음엔 화를 내고 나중엔 울었다. 매일 제집에 드나들던 모습을 봐놓고도 몰랐던 제가 무심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오지 마라 얘길 하면서도 최윤이 제 곁에 있는 게 좋아서 욕심 낸 걸 깨달았다.
최윤이 말했다. 윤화평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겨울과 봄을 함께 보내고 맞이한 첫 번째 여름. 마당에 핀 주홍색 나리꽃, 자주색 달개비, 노오란 금계국 사이사이에 희고 붉고 발그레한 봉선화가 피어, 그 꽃잎을 한 아름 따다 백반에 빻아 손가락에 올리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제가 뭐라고 떠들었던가. 봉숭아물이 첫눈이 내릴 때까지 빠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세간의 말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최윤은 그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 믿었다.
최윤이 다시 말했다. 윤화평 당신이 내 첫사랑이라고.
고백은 죽어도 안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떤 오만이었나. 윤화평은 대답하지 않고 침을 꼴깍 삼켰다. 초조하여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최윤은 손톱 끝에 붉게 빻은 꽃잎을 올리고 푸른 잎사귀를 명주실로 동여맨 손가락으로. 윤화평의 뺨과 입술과 귓불을 애틋하게 문대고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어 끝섬으로 도망하게 했다.
3.
도망을 쳐도 관계의 종말은 오지 않은 채 다시 유월, 최윤은 끝섬의 여름까지 윤화평을 따라붙었다. 거친 폭풍우에 쓸려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비틀대며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 어떻게 왔어? 배 뜨지도 못했을 텐데.
- 다리 완공됐잖아요. 택시 기사가 못 간다는 걸 어깃장을 놓고 우겨서 왔습니다.
- 파도가 더 크게 쳤음 다리까지 물이 들쳤을 거야. 최윤, 목숨이 여러 개야? 그러지 마아.
- 봉선화요. 거진 물이 빠졌어요.
이런 소릴 금년 봄부터 했다. 봄엔 봉선화가 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하필이면 작년 겨울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최윤은 억지를 부렸다.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 금년에 또 봉숭아물 들이고 첫눈을 같이 맞자고. 눈도 오지 않은 끝섬의 겨울을 함께 보낸 건 안중에도 없었다.
화평은 그런 윤을 어르고 달랬다. 신부님, 금년엔 자주 오지 마. 저번 마을에 작은 교회가 있다는데 거기서 미사도 성사도 집전하고 그래. 거기 사람들 착해. 내가 알아봤는데, 환속한 사제가 집전한 성사도 유효하다며. 거기 신부님 돌아가시고 벌써 삼 년째 평신도들이 돌아가며 관리만 하더라. 불법이긴 해도 너 가면 좋아할 거야. 그렇다고 환속했다고 말은 하지 말고. 시골 사람들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말 안 하면 거짓말한 건 아니잖아. 내가 종종 찾아갈게. 응? 그러며 손을 어루만졌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다. 얼기설기 엮어 하난지 둘인지 모르게 된 나무 넝쿨처럼. 최윤은 손가락을 바르작대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주어 손을 마주 잡고 손가락을 맞물리게 해도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최윤은 윤화평이 제 손을 잡은 것보다 손가락 사이 틈으로 흐르는 땀과 빠져나가는 바람이 더 신경 쓰였다. 윤화평은 최윤에게 그런 사람이니까.
- 내가 싫습니까?
그래, 싫어. 싫으면서 좋아. 그 말을 삼켰다. 화평은 지난가을과 겨울, 반도 남지 않은 붉은 물이 빠질까 손톱을 바투 깎지 않던 그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 신부님, 있지. 나는 네게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야.
-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 그래. 그럼 됐지. 서로 살았으면 된 거야.
실제로 최윤이 그렇게 말을 했다. 살았으면 됐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재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화평이 살아있음에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고요한 집과 눈 뜬 어둠에 까무룩 잠든 윤화평의 얼굴을 바라보며. 실은 잠들지 않은 귓가에 중요한 비밀을 고백하듯 속삭였다. 그때부터였을까. 최윤이 저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잠을 잃은 귀뚜라미가 쓰르르 수풀을 헤집는 소리. 밤새가 푸드덕 날아올라 나뭇가지가 떨리는 소리. 가까운 절벽에 높은 파도가 쿵쿵 몸을 부딪치는 소리. 우르르, 천둥이 고함을 치면 쫓기듯 달려와 땅으로 자살을 하는 빗소리. 처마에 간신히 매달려 버둥대다 바람에 떠밀려 목매는 빗방울 소리. 보이지 않아도 눈 앞에 선연하게 그려지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소리를 뚫고. 최윤의 마음이 공허하게 죽어가는 소리가 잠들지 않은 귓가에 윙윙 간지럼 태우던 그날은.
윤화평이 최윤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 윤화평 씨, 전에 살던 집 마당에서 봉선화를 따왔어요. 아직 사람이 살지 않더라고요. 걔들도 비바람에 죽는 것보다 손끝에서 다시 피는 게 행복할 테죠. 긍휼한 마음을 가져요. 임마누엘. 하느님의 이름을 가진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 꽃들을 불쌍하게 여길까요?
윤화평은 최윤이 고백을 하기도 전에 그의 마음을 알았다. 알아서 고백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윤화평을 잘 아는 최윤이 품에서 까만 봉지 하나를 꺼내 윤화평에게 내밀었다. 봉지 안에는 색색의 봉선화 꽃잎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4.
누군가 윤화평과 최윤에게 두 사람이 필연이냐 묻는다면, 그들은 순전히 우연이라 대답할지도 모른다. 삶의 연속성은 누구라도 언제고 필연보단 우연에 의해 깨져야 한다. 그것이 필연적 운명이라면.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게 행운이 아닌 불행이라면. 너무 기구한 삶이 아닌가 하여.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이 운명이 필연이었는가에 관해 묻는다면, 두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운명이란 박일도뿐이고, 그로 인해 박살 난 삶의 조각을 모아 끌어안다 보니 서로의 조각이 엉망으로 뒤섞여 무엇이 내 것이고 네 것인지 몰라서. 정말 몰라서 그걸 하나의 필연적 운명공동체로 착각했을 것이라 말한대도.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다. 모두가 너무 불행했으므로.
다만, 윤화평이 왼쪽 눈을 통해 본 박일도의 행동을 아무도 보지 못한 것처럼. 윤화평의 오른쪽 눈을 통해 본 최윤의 모습. 그러니까 온몸이 땀에 젖고 구마자가 토해낸 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개의치 않고 악마를 퇴치하던 모습. 침묵과 우울이 겹쳐놓은 소주잔처럼 딱 맞아떨어져 슬픔이 찾아와도 울음을 참고 기도하던 모습.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멱살을 잡다가도 순간의 연민을 참지 못해 흔들리던 모습. 큰 키만큼이나 길게 늘어진 검은 그림자를 질질 끌며 먼저 걸어 나가던 모습. 그 모습들을 윤화평과 강길영을 뺀 누구도 보지 못한 것처럼.
아무도 없었다. 최윤이 윤화평을 굳이 운명으로 여겨 사랑하게 된 일을 이해할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윤화평이라 할지언정.
5.
말간 꽃의 목을 따다 보드라운 꽃잎을 죄 뜯어 푸른 잎을 섞어 날카로운 돌부리로 짓찧는다. 곧 붉은 피가 쏟아진다. 붉은피와 찢긴 살점을 모아모아 소금을 뿌려 덧나게 하고 괭이밥을 넣어 한 번 더 짓찧은후, 손톱 위에 올려 푸른 잎으로 감싸 명주실로 묶는다. 하룻밤이 지나고 실을 풀면, 죽은 꽃이 손톱 위에 다시 붉게 태어난다. 꽃이 죽어 다시 피어오르기까지 시간은 겨우 하루. 그 꽃이 지지 않기를.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지내고 첫눈이 오는 날까지 기도하는 시간은 거진 반년. 눈이 내리지 않아 또다시 반년. 또 꽃을 죽여 새 꽃을 피우고 첫눈을 기다리는 시간도 반년.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 반과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 반. 최윤은 꽃처럼 죽어 다시 피어오른 윤화평을 오래도록. 꽤 오래도록 기다리며. 그의 곁을 살고, 그를 살리려고 발버둥 쳤다.
6.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장마는 변덕스러워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 물안개에 보이지도 않던 해가 어느새 중천에 떠 정수리를 쪼아 먹었다. 화평은 부랴부랴 푸른 파라솔을 평상 옆에 펼쳤다. 길영이 섬에서 맞는 볕이 더 따갑다며 구해온 아주 커다란 파라솔이었다. 세 사람이 들어가 앉아도 그늘이 졌다. 그러다 보니 꽤 무게가 나가 파라솔을 펼치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알아 사용을 아끼지 않았다. 물건은 사람 손을 타야 생명이 오래간다. 쓰고 쓸고 닦아줘야 한다. 길영이 서운하지 않게 잘 쓰고 잘 관리해 줄 생각이다.
전화상으로 안부를 물은 길영은 빨라야 보름 뒤에나 볼 수 있다고 했다. 상용시는 여전했다. 늘 다사다난하여 강길영을 달리게 한다. 화평은 길영이 멈추는 일을 상상할 수가 없다.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만 길영은 달리는 일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절대 멈추지 않고 제 길을 간다. 화평은 조금 웃었다. 바쁘다는 건 잘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안심이 되었다. 최윤도 그러면 좋으련만.
- 그 자리가 딱 좋네요. 다시 비 오기 전에 볕 좋은 데서 합시다.
- 이 더운데, 손가락을 싸매고 싶어? 악취미라니까. 꼭 물들일 거면 안 보이는 발에 하던지.
- 왜요? 제가 아무것도 못 하는 사이에 도망이라도 가게요? 싫습니다. 손에 할 겁니다.
공교롭게도 최윤이 바쁠 일은 윤화평밖에 없었다. 사제도 관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집처럼 드나들며 화평을 참견하고 돌봤다. 이제 곧 서른 중반의 남자를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대했다. 길영이 같이 살지 그래?, 말하기 전에 짐을 싸 들고 왔다가 소박까지 맞았으면서. 자존심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꾸준히도 왔다. 한 번 오면 짧게는 보름 길게는 몇 달을 살았다. 덕분에 섬마을 사람 모두가 이 집을 설명할 때 잘생긴 총각 둘이 사는 집이라 했다. 이사 온 보람도 없게 실상 같이 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화평은 굳이 니 집 내 집을 나눴다. 니 구역 내 구역 하며 선을 넘지 말라는 말을 에둘러 말했다. 윤은 제가 사 온 물건으로 화평의 공간을 채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선을 넘지는 않지만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이다. 길영이 사 온 물건들이 화평을 안심시킨다면 윤이 사 온 물건들은 화평을 불안하게 했다. 그 물건들로 자꾸만 저를 부수고 채우려 했으므로. 윤화평은 이제 최윤의 삶이 곧 저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 참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고 멀쑥한 남자가 손톱만 빨간 거 다들 비웃을 텐데도?
- 곱상하게 생겨서 괜찮다던데요. 저기 아래 빨간지붕 사는 할머님이.
- 너 요새 섬 할매들이랑 친하게 지내더니 넉살이 늘었어.
- 윤화평 씨는 좀 점잖아졌단 소리 듣지 않습니까? 저랑 지내잖아요.
- 됐고, 앉아. 봄부터 노래 부르던 거 해야지.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짓하자 표정 없이 농을 던지던 얼굴이 활짝 편다. 넉살만큼 웃음도 늘었다. 죽상을 하고 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둑한 그림자를 달고 걷다가도 이내 해사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최윤은 변하지 않은 듯 변했다. 셋 중 가장 고지식하여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꺼릴 줄 알았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변화에 가장 더딘 건 되려 윤화평이어서, 화평은 윤이 웃을 때면 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모르는 어린 최윤은 이런 식으로 웃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더 순수하게 웃었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순진할 수는 있지만 순수할 수는 없으니까.
화평은 어린 최윤의 순수한 얼굴을 상상했다. 하지만 너무 막연하여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둠이 묻지 않은 최윤의 얼굴이. 비틀대지 않는 최윤의 걸음이. 걱정 없이 투정을 부리며 안아달라 손 뻗는 얼굴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화평이 가장 잘 아는 최윤의 얼굴이라고 하면. 저를 울듯이 쳐다보는 그런 얼굴이었기에. 화평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 최윤. 이러고도 이번 겨울에 또 눈이 내리지 않으면 어째?
꽃잎 다섯 장에 잎사귀 한 장을 평평한 돌 위에 놓고 소금을 솔솔 뿌려 괭이밥을 섞어놓고 짓이기길 머뭇거리는 손을, 그보다 마디 하나가 더 큰 손이 겹쳐 잡고는 꽃 무더기를 돌부리를 내리찍었다.
-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거든요.
- 너 하느님을 배신했잖아.
- 환속했다고 믿음을 버린 건 아닙니다. 저는 아직 신을 믿습니다.
신을 믿는 사람이 이런 미신을 잘도 믿는다고. 화평은 말을 하지 않고 혀를 찼다.
- 윤화평 씨는 이런 거로 기도하는 제가 한심합니까?
- 아니이. 한심하진 않고 좀.
불편하지. 이제 윤화평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전에 최윤이 그랬듯 말을 참을 뿐이다. 화평은 꽃 무더기를 짓이기던 돌을 고쳐잡으며 제 손을 덮고 있는 큰 손을 슬쩍 쳐냈다. 더워. 붙지 마. 핑계를 댔다.
- 어쩔 수 없잖아요.
해사하게 웃던 얼굴이 점차 구겨지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화평은 윤의 어떤 부분이 저를 보고 계속해서 웃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입을 악물어 더 다부진 턱이. 살이 빠져 더 도드라진 광대가. 늘 무심해 보이지만 물기가 가시질 않는 눈동자가. 제게 눈높이를 맞추려 굽어진 어깨가. 앞으로 한껏 뻗어 나온 사슴 같은 모가지가. 갈피를 잃고 안절부절못하는 크고 마른 손이. 미력하게나마 손톱 끝에 남은 수줍은 봉숭아물이. 아. 화평은 탄식했다. 최윤은 이제 절망하는 순간에도 사랑을 하는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모든 면면이 미소지으며 사랑을 속살거리는구나.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도.
- 윤화평 씨에겐 핑계가 필요하니까.
사랑하는 일에.
7.
푸른 파라솔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금 매질하듯 떨어지는 빗줄기에 푸른 파라솔이 검푸르게 변했다. 파라솔도 멍이 든다. 화평은 계속해서 색이 짙어지는 파라솔 아래 가만히 누워있었다. 파라솔 안쪽 꼭대기에 달아둔 캠핑용 랜턴이 희미하게 눈을 빛내자 날벌레가 날아들었다. 깜빡깜빡 점멸하려 드는 눈 아래 꿈이 젖어 드는 것처럼. 속눈썹이 떨리듯 날개를 파르르 떨며. 파라솔에 든 멍울이나 걱정하는 윤화평 보란 듯이. 파라솔의 푸른 갓으로 돌진하여 머릴 깨고 죽었다.
그에 화평은 번뜩 눈을 떴다. 날벌레가 머리를 깨고 죽은 푸른 파라솔이 강과 바다가 된 꿈에서 눈을 떴다. 화평은 종종 꿈에서 정신이 깼다. 눈을 뜨면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게 이상하단 생각을 했지만 어쩐지 포근하여 꼭 깨야겠단 마음이 들지 않았다.
꿈에는 늘 바다로 흐르는 강이 있고 작은 배 한 척이 있었다. 화평은 두리번거리며 그 배를 찾았다. 강의 가장 얕은 곳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곤 다가가 힘주어 배를 떠밀었다. 강물이 허리까지 차자 배가 저절로 뜨는 것이 느껴져 서둘러 배에 올라탔다. 배는 천천히 강줄기를 따라 바다로, 또 바다로 흘러갔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막막하여 두려우면서도, 화평은 계속해서 배를 타고 나아갔다. 그러다 문득, 기시감이 들어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좀먹힌 검은 남자가 처음부터 배에 존재했던 것처럼 여상히 노를 젓고 있었다. 화평은 그 남자를 벌써 스무 밤을 넘게 만났지만, 단 한 번을 말을 걸지 않았다.
남자는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검정 펜으로 까맣게 칠해버린 공책의 오자처럼. 낙장이 생겨 버려진 파본처럼. 어둠에 먹혀 일그러진 얼굴. 도무지 원래의 얼굴을 상상할 수 없으니 모르는 얼굴이랄 수밖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신이거나 악마거나 삼도천의 사공이거나. 화평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여 얼굴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 악마는 있고 신은 없는 이름을. 구태여 물어보았다가 또다시 악마라고 한다면 어쩔 셈인가.
화평이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노를 젓거나 손바닥을 강물에 담갔다가 물을 마시는 등의 평이한 행동만 보였다. 화평을 남자를 몇 번이고 관찰했지만 특징이나 이상행동이 없어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상관없었다.
말없이. 둘이서 바다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엔 본래의 물결을 따라 떠내려오는 것들이 많았다. 물에 젖어 퉁퉁 불은 나뭇가지. 수면 위로 날아와 죽은 새. 마시고 버린 녹슨 유리병. 물고기를 잡다 망가진 어망. 배에서 떨어져 나온 스티로폼 조각. 다시는 불이 들어오지 않을 랜턴. 바람에 날려 잃어버린 모자. 어디에 쓰던 것인지 모를 굵은 밧줄. 산 사람의 것인지 죽은 사람의 것인지 모를 신원미상의 신발. 세상의 죽은 것들 사이로 떠내려오는 신발 한 켤레.
최윤은 그 신발 한 켤레를 성모상을 모신 탁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있나. 신성한 십자고상 아래 고결한 성모상. 그 옆에 남루한 망자의 신발이라니. 제 가족이 남긴 유품도 꼭꼭 숨겨 놓고 보는 최윤이었다.
화평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신발을 건져냈다. 무엇이 제 신발을 육광이 형을 빌어 최윤에게로 가게 했을까. 그건 필시 신이 아니라 악귀의 짓이라 생각했다. 그렇지않고서야 일상을 회복하려 하는 최윤에게 제 신발을 건네지 않았을 테다. 더럽고 축축한 신발. 화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발을 세게 쥐었다가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텅. 신발이 나무배에 부딪히는 소리에 노를 젓던 남자가 움츠러들었다. 화평은 남자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꿈은 늘 내용이 같아서 조용하던 남자가 신발을 던지면 반응을 보이는 걸 벌써 스무 밤 넘게 보았다.
최윤은 어땠을까. 화평은 허탈하게 웃었다. 어린 최윤의 행복한 얼굴은 상상하기도 버겁더니 어른 최윤의 불행한 얼굴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연했다. 최윤은 제 신발로 인해 세상이 반 평 더 불행해졌을 테니. 울었거나 울지 않았거나. 성모상 곁에 둔 신발을 매일 바라보며. 더는 생각하기가 싫을 정도로 슬픈 얼굴을 했을 것이다. 아-. 화평은 마른세수를 했다. 어쩌자고.
- 어쩌자고 그랬어?
노를 젓던 남자가 단 한 번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화평은 천천히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좀먹힌 남자. 공책의 오자처럼 까맣게 칠해진 남자. 낙장이 생긴 파본처럼 잘못된 얼굴의 남자. 알 수 없는 얼굴의 그 남자는 더럽고 축축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 왜 최윤에게 널 보냈어?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지만, 화평을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 윤화평.
신은 가지지 못하고 악마는 가진 이름을 한 신발의 주인.
화평은 절망했다. 이윽고 눈에서 물이 홍수가 되어 쏟아지고 바다의 짠 냄새가 훅 올라왔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배는 점차 기울었다. 윤화평이 펑펑 울었기 때문에. 점점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아 결국 수몰되었다.
윤화평. 태어난 것이 오점인 남자. 꿈에서도 저를 죽이고 싶은 남자. 그리하여 푸른 파라솔 아래 무릎을 대주고 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계속해서 훔쳐주는 이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남자.
- 일어나요, 윤화평 씨. 감기 걸려요.
그러나 그의 한 마디에 물속으로 가라앉은 몸을 일으켜 꿈의 수면 위로 올라오는 남자.
윤화평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없어야 최윤이 정상적인 삶을 살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신발을 보낸 이기적인 마음을. 그런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최윤의 마음을.
- 건드리지 마. 제발 날 내버려 둬.
알면서도 영원히 모르고 싶었던 것이다.
8.
- 나는 당신을 구해요.
손끝에 푸른 잎사귀를 동여맨 최윤이 눈을 부비며 아이처럼 울었다. 정성껏 감싸 흰 실로 동여맨 보람도 없이 봉선화 잎사귀가 눈물의 마찰력에 죄 뜯긴다. 최윤의 눈물은 붉고 푸르다. 눈을 문대는 손길을 따라 붉은 눈시울 아래 엉망으로 푸른 잎맥이 뻗어난다. 엉망진창이네. 화평은 최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최윤은 화를 내거나 기뻐하는 모습보다 괴롭고 슬퍼하는 모습이 더 극적인 사람이다.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얼굴엔 늘 직각으로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가 드나드는데, 슬퍼할 때는 얼굴이 지나치게 구겨져 전체적으로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린다. 번개도 치고 천둥도 쳤다. 뭐랄까, 더 인간적으로 된다. 화평은 그게 마냥 보지 싫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장마라고 해서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는 것은 아니듯, 윤화평 역시 일분일초가 우울한 것은 아니다. 불행하다 느끼는 와중에 틈틈이 행복했다. 가령, 최윤이 사 온 소고기를 안주 삼아 기쁨이 겹쳐진 소주잔에 술을 물처럼 따라 받아 마실 때. 길영이 사준 푸른 파라솔이 펼쳐진 평상에서 소일거릴 할 때. 아궁이에 군불을 놓으며 최윤이 전해주는 육지 소식을 들을 때. 두 골목 지나 언덕 아래 사는 노란 지붕 할매가 오가다 찬거릴 던져주고 갈 때. 마당에 마련해둔 물그릇과 밥그릇에 고개를 쳐박고 식사를 하던 섬 고양이들이 눈인사를 해올 때. 그리고.
- 당신이 싫다 해도 나는 윤화평 씨를 구할 겁니다.
최윤이 저로 인해 울 때.
화평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그게 어찌나 소름이 끼치는지. 윤화평은 진작 알고 있었다. 저로 인해 최윤이 슬프고 괴로워하는 때에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을.
- 이런 데서 혼자 잠들지 마세요. 악몽도 꾸지 말고 감기도 걸리지 말아요. 제발, 윤화평 씨.
죽지 말아요.
화평은 윤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알아들었다.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로. 눈물이 떨어진 가슴으로. 가슴 안에 뛰는 심장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죽고 싶다가도 살고 싶은 게 인간인데. 화평이 살고 싶다가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고 푸념하는 화평에게 육광이 그랬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고 산다고. 넌 더하겠지. 화평아, 그래도 살아. 아마 죽어 찾아왔을 때도 손짓하며 그런 얘길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윤은 자꾸만 죽지 말라 한다. 살라 하는 게 아니라 죽지 말라 애원한다. 언뜻 보면 같은 말이지만 화평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최윤은 지나치게 죽음에 집착한다. 하느님의 나라에 갈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아닐 테니. 아마 최윤에겐 죽음 그 자체보다 그날의 윤화평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문제일 것이다.
화평은 한숨을 쉬며 더듬더듬 평상을 짚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 거참. 봉숭아물 들인 거 이러니까 오래 안 가는 거야. 자꾸 우니까 눈물에 지워지잖아.
- 이런 건 또 들이면 됩니다. 마당에 봉선화 씨앗을 많이 뿌려뒀으니까.
- 부지런도 하네. 이리 가까이해. 얼굴 흉하다.
주춤주춤 굽는 허리를 끌어다 가까이 붙이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원망하듯 바라본다.
- 최윤.
- 왜요.
- 최윤, 난 말이야.
네가 나 같은 거 말고, 진짜 좋은 사람을 사랑하면 좋겠어.
- 알아요. 압니다.
그래도 난 당신을 구해요. 또다시 잃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을 한 채 화평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윤을 끌어안는다. 등 뒤로 팔을 두르고 연방 토닥거린다. 윤은 머뭇거리다 화평의 어깨를 깍지 낀 손으로 감싸 안는다. 얼굴에 얕게 깔리는 평화와 달리 온몸이 더위에 몸살을 앓는다. 살이 붙은 곳마다 땀이 줄줄 나고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한다. 화평은 이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윤화평은 최윤에게 싫다고 말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시작은 늘 윤화평이었다. 그냥 홀로 죽은 척 살면 될 것을 기어코. 육광에 부쳐 신발을 보낸 것도. 계양진으로 택배를 보낸 것도. 끝섬으로 오는 최윤을 막지 않는 것도. 손톱에 봉숭아꽃잎을 올리며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어르고 달래며 손을 마주 잡았다가 내치는 것도. 이렇게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긴 장마를 견디는 일도.
최윤을 필요로 하는 윤화평이었다.
9.
윤화평은 최윤을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그보다 더 깊게 생각할 뿐이다.
10.
- 봉선화 꽃잎이 곤죽이 됐어. 최윤, 네 손톱 다시 물들이려면 이걸로는 안될 거 같은데?
- 날씨가 덥고 습하니까요. 됐습니다.
- 아니이, 그거 집착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괜찮은 척해?
- 진짜 물든 건 손톱이 아니니까요. 핑계는 또 만들면 됩니다.
- 와. 나 방금 소름 돋았어. 최 사제 요즘 되게 낭만적이고 막 그르네?
- 가끔은 저희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울 수는 없잖아요.
- 있지, 최윤.
- 왜요.
- 첫눈이 오기 전에 돌아가자.
네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함께.
11.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완벽한 해피엔딩이 어디에 있을까. 최윤과 윤화평은 일생이 불행했고. 여전히 불안을 견디며 살기에. 앞으로도 불행할 확률이 높다.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 말해야 할 운명을 이고 지고. 일분일초가 행복하다가도 또 일분일초가 불행할 그런 엔딩으로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장마 끝에 윤화평은 돌아갈 것이다. 할아버지와 길영과 윤이 기다리는 육지로. 실은 그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쪽 바다에서 살아온 것처럼. 고요히 잠든 계양진으로. 봄마다 어머니와 함께 봉선화를 심어두었던 그곳으로. 낮에는 볕이 역십자가 모양으로 들고 밤에는 어둠이 죄책감으로 오는 그 공간으로. 세 가족의 불행의 역사가 마루 밑에 숨어 있는 그 집으로. 제 손으로 시작한 불행으로부터,
저를 툭, 건드려 마음을 붉게 물들인 그의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