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도가 사라졌다.
자신은 물론 길영과 화평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앗아갔던 그 귀신은 동해바다 저 깊숙한 곳에 다시 갇히게 되었다. 화평을 데리고서. 큰 귀신을 가둔 화평의 몸을 삼킨 바다는 오늘도 평온했다. 반짝반짝 햇빛을 받으며 잔잔한 파도만이 너울거리는 바다를 윤은 오늘도 멍하니 응시한다.
따르르릉-
순간 잔잔한 파도소리만이 들리던 그 고요한 곳을 훼방이라도 놓듯 단조롭지만 이질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윤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요란한 기계음이 더 커지며 푸른빛을 내는 핸드폰을 응시하자 눈에 들어오는 '강길영'이란 세 글자. 윤은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강형사님"
"최윤, 잘 지내고 있냐? 밥은 잘 챙겨 먹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씩씩한 음성에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여전하시구나 강형사님은.
"네, 잘 먹고 있습니다. 덕분에 요즘 살도 오르고 있어요. 강형사님은 잘 드시고 계시죠? 범인 잡는다고 끼니 거르지 마시고 꼭 챙겨드세요."
"오냐, 알았다. 내가 오늘 통화 한 이유는..."
안부인사가 지나가고 본론에 들어가기 시작한 통화내용에 집중하던 윤은 길영의 말에 착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윤화평의 기일. 곧 있으면 화평이가 저 바다에 삼켜져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게 1년째가 되는 날이다.
"나 그날 연차 냈으니까 너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날 휴가 내라고 전화한 거야. 내 차 타고 같이 내려가."
"당연하죠. 그런데... 아직 소식은 없는 건가요...?"
응...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대답을 끝으로 둘 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통화가 종료되었다.
화평이 바다에서 사라진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갔으나 화평의 시신은 아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영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윤은 더욱 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은 화평의 시신을 찾길 바라는 것인지, 이대로 발견되지 않길 바라는 것인지.
발견되지 않으면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말 죽은 것이라면 더 이상 차가운 바다에서 고통받지 말고 육지로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왔던 그에게 죽음 이후까지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
"마태오 신부님, 오늘도 기도 열심이시네요. 주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 감사합니다, 수녀님"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닌 수녀님의 말엔 칭찬이 담겨있었지만, 윤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박일도가 사라진 뒤 윤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게 하루를 알리는 시작이었고, 퇴근할 때도 성당에서 제일 늦게까지 남아 기도를 올리는 것이 마지막 일과였다. 다만 그 기도의 주인공은 화평이었다.
화평이가 무사하기를,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 것이라면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처음에는 화평의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올린 기도였다. 주님께 그 불쌍한 사람을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그의 숭고한 영혼이 필요해 꼭 데려가야 했으면 남은 사람들에게 몸이라도 돌려달라고. 그렇게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작된 기도는 이제 완벽하게 윤화평 밖에 남지 않았다.
제발 꿈에라도 나와줬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다시 부활해 돌아오셨듯이 화평이도 그 거친 바다를 헤쳐 나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 주기를...
그렇게 오늘도 기도를 올리는 윤이었다.
**
드디어 윤화평의 기일이 다가왔다. 그날임에도 윤의 일상은 변하지 않고 아침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윤화평을 위한 기도를. 기도를 끝내고 고개를 올려다보니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주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를 은은하게 비쳐온다. 그 빛이 꼭 십자가에서 후광이 나는 것 같아 더욱 더 성스럽게 느껴졌다. 그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다 곧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슬슬 길영이 자신을 데리러 성당으로 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킨 윤은 성당의 문을 열었다. 햇빛이 열린 문틈으로 쏟아지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린 윤은 그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문을 마저 활짝 열었다.
화평의 제사상에 올릴 소고기를 산 뒤 바라본 하늘은 아주 깨끗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주변에 심어져 있는 화단들을 둘러보았다. 햇빛을 받은 식물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생기를 뽐내는 것이 아주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것이 생명이 지니는 힘일 것이다. 여러 꽃과 식물들을 보던 도중 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크고 화사한 해바라기. 활짝 핀 채로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꽃. 태양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 때부터 밤이 되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끝없이 태양만을 쫓아 바라보는 꽃.
그 순간 윤은 이 꽃이 자신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없이 윤화평만 바라보는 '최윤'이라는 해바라기. 자기희생으로 모두를 구한 그를 숭배하며 또 그를 끝없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여유롭진 않지만 길영과 만나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윤은 무엇에 홀린 듯 성당으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돌려 성당과는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근처에 꽃집이 보였다.
성당 앞에 도착하니 차가 한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윤은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길영의 차였다. 창문을 두드리자 창문이 열리며 길영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타. 한마디를 던진 뒤 잠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최윤, 그건 뭐냐?"
"해바라기요."
"아니 그걸 누가 몰라서 묻냐, 갑자기 웬 꽃이야?"
"그냥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요. 예쁘게 피어 있길래..."
"뭐, 화사하니 예쁘긴 하네. 윤화평도 좋아하겠다. 그나저나 그 검은 봉지는...?"
"아, 이거 소고기요. 윤화평씨 소고기 엄청 좋아했으니까요."
그 말에 길영이 헛웃음을 짓더니 팔을 뒷좌석으로 뻗어 검은 봉지를 집어 든다. 그리곤 윤의 앞에 흔들어보였다.
"오늘 윤화평 배 터지게 먹겠네."
푸핫-
제사상에 앉아 소고기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을 화평의 영혼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옆에 앉은 길영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곧이어 차가 움직이며 성당을 벗어났다.
계양진에 도착해 제사상에 소고기를 잔뜩 올린 뒤 화평의 영정사진 앞에 곱게 포장된 해바라기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
화평의 집을 나오니 평상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와 친척분이 계셔 인사를 드리던 중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택배의 존재. 아무리 봉사단체라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챙겨줄 리는 없었다. 마음속에서 택배의 발신지를 추적해야 한다는 외침이 들렸다. 길영을 바라보자 길영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택배가 온 경로를 역추적해 택배를 보낸 자를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어부였다. 그 어부에게 택배의 존재를 물어 그것을 보낸 자의 집 주소까지 알 수 있었다. 그 집으로 향할수록 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윤은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드디어 집이 보였다. 길영과 함께 집 근처를 기웃거리자 곧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음엔 어둠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햇빛이 그 인영을 향해 빛을 내리쬐는 면적도 늘어났다. 윤은 순간 뒤에서 비치는 햇빛이 그 사람에게서 나는 후광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이 강림하는 것 같은 눈부신 빛. 그 빛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인영은 화평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제대로 자르지 않은 것인지 덥수룩한 머리에 한쪽 눈이 바래긴 했지만 틀림없는 화평이었다. 그는 윤이 바라는 대로 저 바다에서 살아돌아왔다. 시간은 걸렸지만 그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순간 윤은 깨달았다.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자신도 화평을 숭배하며 평생 바라보게 될 것이란 것을. 화평이 윤의 신이 될 것이란 것을.
윤은 화평을 향해 달려가 그를 품 안에 가두었다. 품 안에 화평이 느껴졌다. 그리움에 미쳐 보이는 환상이 아닌 손에 잡히는 이 느낌은 진짜였다. 진짜 윤화평씨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화평의 손이 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평의 손길에 결국 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화평의 어깨를 조금씩 적시기 시작했다. 길영도 그런 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셋은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더 이상 그들의 앞에 어둠이 가로막지 못하도록 햇빛이 그런 그들을 따사롭게 비추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