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의 꿈속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떨 것 같아,
내가, 잠시나마 당신을 찾아다녔던 때가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
이 가시 나고 부스러진 마음에 이름을 붙여 당신에게 건넨다면,
당신은 또 내게 미안해만 할 거야,
Please, Come Here,
pieta, pieta,
나의 생은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막 어머니의 국부를 찢고 첫 비명을 질러대기 위해 세상에 나오려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에, 외조부모님은 버스 사고로 돌아가셨다. 처참한 가을이었다. 첫 번째 생의 시작이었다.
형이 나를 끔찍이도 아꼈던 것은 단순히 나를 키운 것이 그였던 탓이었다. 어둡게 침닉한 집 안에 달리 형제가 몸을 부대낄 곳이 없던 탓이었다. 부모를 거스르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온 형은 사제가 되었다. 그래도 구마사제가 된 것은, 저 나름의 반항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분노해주지 않는, 알아주지도 않는 미약하고 우매한 반항. 12살의 늦은 봄, 침대 밑에서 도망쳐 나와,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새 삶이 시작될 것을 예감했다. 두 번째 생이었다.
악몽과, 형의 그림자와, 폭력과 기도가 무질서하게 뒤섞인 그 생은, 스스로 손목을 끊음으로써 끝이 났다. 서로 이름도 몰랐던 먼 친척의 차 안에서, 새로운 생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참담한 날들이었다. 뚝뚝 끊어진 삶의 조각들을 그러쥐고, 서품을 받으며 나는 궁금해 했다. 죽음 없는 새 삶의 시작이, 내게도 올까. 신의 축복으로 크고 작은 행복을 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처럼, 내게도. 정말 새롭고 흰 시작이, 언젠가.
타오르던 13살의 여름, 당신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얼굴도 잘 기억할 수 없는, 이름 한 글자도 모르는 당신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더위가 들어 성당 구석에서 앓던 나를 보다 못한 양신부님이 타이르듯 일러주었다. 당신은 이미 멀리 떠난 지 오래 되었다고. 그 짧은 문장들은 며칠을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마치 당신이 나를 버렸다는 양. 가끔, 꿈을 꾸면 당신이 있었다.
부마자들의 비명과 저주로 너덜한 하루들을 살아내는 어른의 밤에,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해 피가 양말을 다 적시도록, 내가 그 시골길을 멈추지 못하고 걸었던 이유를. 어린 날의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만큼은 나를 내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어느 음습한 여름, 당신을 다시 만났다.
손끝을 대면 데일 듯이 열이 나는 당신을.
윤화평,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동그랗고 밝은 눈을 가졌었구나.
당신, 많이 아팠구나.
당신을 다시 만나면, 나는 꼭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 늦은 밤 우리 둘 모두 식은땀에 푹 젖어 있던 것처럼, 당신에게 나와 같은 어떤 것이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설령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과 나라면. 그러나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 우스운 것은, 어린 나는 다시 만났을 때 당신에게 건넬 어떠한 말도 생각해 두지 않았다는 것.
당신의 삶이 어떠했을 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잘못이야, 당신은 늘 그렇게 말했으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고 쉽게도 말하면서 제게만은 늘 엄격했다. 그것만으로도, 무감한 당신의 얼굴 아래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당신도, 나처럼 피폐한 밤들을 헤쳐 왔구나.
어린 날의 마냥 이기적인 상상처럼, 당신은 나를 내치지 않았다. 내칠 수 없었다. 당신은 내게 미안하니까. 조각 난 나의 삶도 당신의 잘못으로 여기니까. 그래서,
익숙하고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 찾아오고,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당신이 차를 달려 여기에 오는 일이 매일 밤 반복되는 것이다. 나와 당신의 통화 목록에 서로의 이름이 가득하고, 정작 건 사람은 말이 없는 통화가 그 목록에 엇비슷한 시간을 쭉 기록해내는 것이다. 당신에게 기대 앓으며 당신의 시다운 이야기를 들어주다 새벽 세시가 다가오면, 당신이 몸부림치는 나를 끌어안고, 순서가 뒤바뀐 구마경을 외우고, 젖은 뺨을 토닥이는 것이다.
지금처럼. 꼭 지금처럼.
오늘의 이야기는, 중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당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사이를 두고, 익숙하게 소파에 몸을 묻은 당신의 목소리는 마치 굵은 소금 같았다. 거칠고 짠 음절들이 켜켜이 쌓여 당신의 기억을 풀어내고, 나는 고통에 찬 몸을 그 안에 묻는다.
당신은 참 조용한 아이였다고 했다. 귀신들이 시끄러워서, 당신은 조용했다. 친척집에 얹혀 살기 시작하고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코피를 자주 쏟아 책상 위에 항상 두루마리 휴지를 두고 다녔다. 이젠 보이지 않는 귀신 대신 찾아드는 악몽이 무서워서 당신은 밤을 새워 책을 보았다. 새벽 세시에 귀신 힘이 제일 세지고 이런 거 그 때 알았으면 공부도 못 했겠다, 당신은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그랬던 당신은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중학 선생들이 발칵 뒤집어지고 친척들이 보호자를 찾는 전화에 귀찮은 눈치를 주었지만, 당신은, 처음으로 그 집에서 고집을 부렸다. 화가 나 전화를 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싶다며 우는 손자를 꺾지 못했다. 검정고시를 보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신은 계양진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때까지는 이 잡듯 이 땅을 다 뒤져 박일도에게 복수 하겠다는 생각까진 없었다고, 당신은 말했다. 그건 더 자라고 나서 감응이 시작된 후였다고.
어린 당신이, 부마자들의 살인을 느끼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티셔츠 끝을 꽉 쥐며 어렴풋이 생각했다. 점점 당신의 목소리가 희어지는 것 같았다. 시계는 막 두시를 지나고 있었다.
고향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것도 당신에겐 녹록치 않았다. 다들 당신과 할아버지를 못내 겁내했다. 둘은 혹여 화라도 당할까, 괴롭히지도 못하고 가까이하지도 못하는 애물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봄에, 당신은 언덕배기집을 내려와 옆 동네까지 걸었다. 밤마다 꿈에서 보는 그 길을 낮에 걸었다. 무서워 근처에도 가지 못 했던 집 앞에, 당신은 하염없이 앉아 해가 조금씩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린 당신이 늦게 나를 기다렸던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네. 당신은 싱겁게 얼버무렸다. 있지, 그 때 찾고 싶었던 건, 박일도보단 아버지였어. 뜸들이다 뱉어낸 단어들이 물에 젖는다. 기억의 단편들이 밀려온다. 앞뒤 재지 못하고 달려 나가던 뒷모습, 멀리서 들려오던 당신의 찢어지는 목소리, 다리 끝에 매달려 손을 뻗던 충혈 된 눈자위.
이럴 때면, 이렇게 푹 젖은 얼굴을 할 때면, 꼭 당신은 바다 밑에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 깊고 깊은 동쪽 바다 아래에 잠겨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열에 달떠 당신에게 기댄다. 내 입에서 나오는 짧은 단어는 다 당신도 열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되어 단단한 열의 덩어리가 당신의 몸 깊숙이 뭉쳐져 있기 때문이다. 형,
어느 새벽 세시에,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나를 발견한 당신을 나는 형이라고 생각했다. 떠돌이 개에게 쫓기던 개구쟁이 시절의 환영 탓이었다. 그날의 나를 구한 건 형이었고, 그날로 나를 구하는 건 당신이 되었다. 바닥을 긁던 손을 마주 쥐고 당신은 한참 나를 안아 달랬다. 정말 저가 내 형이라도 되는 양 다정하게 굴었다. 금세 당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체했다. 윤아, 부르는 소금알 같은 목소리가 포근해서, 가끔 땀에 젖은 머리칼에 내려오는 입맞춤이 안심이 되어서.
당신은 시계를 다 보고도, 내게 마냥 속아준다. 당신은 늘 그럴 것이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 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리 잔인해지는 것은,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탓이다. 스스로 버티는 법을 알아야 할 어른을 뒤늦게 아이마냥 안아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의 팔이 몸을 감아오고, 두터운 손바닥이 통증을 달랜다. 당신의 몸을 마주 안고 얼굴을 파묻으면,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작고 꾸준하게 속삭인다. 괜찮아, 윤아, 다 끝났어. 넌 아무 잘 못 없어. 내가 꼭 지켜줄게, 우리 윤이. 어렴풋이, 피 묻은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다. 당신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면, 당신은 나를 더 애타게 안는다. 당신의 간절한 속삭임이, 점점 뚜렷해지는 환청과 환영들을 덮는다.
당신의 입맞춤이 나의 찢어진 삶들을 기운다. 이렇게 나의 삶들이 실은 하나로 이어져있었음을 실감하면, 그것이 향하는 곳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꼭 마주 안은 당신. 내 품 안의 당신. 깊고 고요한 이름을 가진 당신.
가끔 생각하곤 했다. 만약 우리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내가 시골길을 헤매던 그 날에, 당신이 해를 바라보던 그 날에 우리가 만났더라면. 무엇이 달랐을까. 우리는 조금 더 빨리 서로를 알아보았겠지. 우리는 조금 더 빨리 서로를 안아주었겠지. 그저, 조금 빠를 뿐이었겠지. 나는, 결국, 당신을 사랑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꼭 지금처럼.
이 뒤에 볼 환영을 알고 있다. 새벽 세시가 오면, 당신이 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다.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바다를 향해 걷는 것이다. 그 상처들을 알고 있다. 내가 찌르고 또 찌른 자국들을 안고 당신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내치는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손들이 다가와 속삭인다. 결국엔 너도 죽을 거야, 걔 옆에 있으면 다 죽어.
그럴까, 나도 죽게 될까, 당신의 옆에서. 그날까지 당신은 옆에 나를 두어줄까.
오늘 이후로 매일 밤마다 칼에 찔리는 고통을 겪을 거라고
당신이 부적을 들고 찾아온 날을 기억한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는 당신을 떠올렸다. 이승 너머의 것을 보는 눈동자와, 닿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투박한 손과, 아픔이 알알이 배인 당신의 목소리를. 문 밖에 선 당신을 끌어안고 싶었다고, 당신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주었으면 했다고, 그날로 늘 나는 당신이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에게 말한다면, 당신은.
대신 가지 말라 애원하면, 그것이 내 형에게 하는 말이라 믿는 당신은 연신 입을 맞추며 약속한다. 아무데도 안 가, 윤이 옆에 있을 거야,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정말, 정말.
두 번째로 우릴 만나면 칼에 찔린 상처가 온몸에 드러나고 살이 썩고 피가 썩고 영혼이 썩어갈 것이며
악마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이미 나는 나의 신 앞에 썩어 문드러진 사도로 서기로 택했다는 것. 내가 당신을 알아본 그 날에, 내가 당신에게 마냥 삶의 보상을 갈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느 날에. 내가 늘 다른 이들에게 아깝게 떼어주던 애정의 원주인을 알게 되었을 때에.
세 번째로 우릴 만나면 그땐 반드시 죽을 거라고
죽음이, 목전에 와 있다.
나의 남은 생은 당신을 위해 쓸 거야. 당신의 행복을 위해 쓸 거야. 완연한 끝에 당신이 있어야, 일그러진 달의 이름을 가진 이의 생이 완전해질 테니까. 어쩌면, 나는 그저 당신의 어긋난 생의 틈에 끼워 맞춰지기 위해 났는지도 몰라. 오직 이 때를 위해 이 기형의 삶을 살아왔는지 몰라. 당신을 살게 하려고. 그러니,
계속 내 곁에 와줘. 나와 이 작고 사소한 거짓말들을 계속 하자. 주인의 이름을 써넣지 않은 마음들을 계속 나누자. 마치 반쪽짜리들이 된 것처럼 계속해서 서로를 품자.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당신이었으면, 삶의 끝에 곁에 있는 이가 당신이었으면, 그 죽음의 목적이 오직 당신이었으면. 그것이 나의 바람이니, 그러니, 계속 여기에 와줘.
비극이 우글거리고 환영이 춤을 추는, 악마가 사위를 돌고 저주가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그 안에 오직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내가 있는, 나의 집.
여기에 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