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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화평의 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아마 불신일 것이다.

 

 

 

불신은 바다의 형상으로 온다. 깊고 시꺼멓고 잔잔하게 변치 않고 제 수위를 유지한다. 턱을 들면, 잠기지 않지만, 힘이 빠지면 금방 물을 먹을 깊이로, 하염없이 출렁거린다. 출렁임은 유난스럽지 않고 조용하다. 그러니 턱까지 차오른 불신은 지쳐야만 알아차릴 수 있다. 뻣뻣한 목덜미가 느슨해지면, 금세 입안으로 물이 쏟아진다. 꼬르륵, 그리곤 부푼 배와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끊임없이 휘젓던 다리에 쥐가 나 아래로, 더 깊고 더 시꺼멓고 더 잔잔한 곳으로. 불신은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으며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계속 턱 밑에서 찰랑댄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집어삼킬 날을 기다린다. 불신은 차가워 쉽게 체온을 빼앗아간다. 게다가 요즘은 겨울이라 더욱 심해 저체온증에 걸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말은, 대부분이 불신에 잠겨, 죽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윤화평은 다르다. 그는 불신 속에서 살아가며 오직 불신만이 그를 살게 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윤화평의 한 번 정한 것은 고치지 않는 성정과 더불어, 그의 역사 때문이다. 끊어지지 않고 여태껏 이어진 삶은 끔찍해 무언가에 의지해야 한다. 최윤이 믿음에 의지하듯이 그 또한 믿음에 의지한다. 다만 그는 불신을 믿을 뿐이다. 살이 아리는 물속에서 정신을 붙잡고 나아갈 수 없지만, 끊임없이 물을 박차면서. 있는 힘껏 턱을 치켜들고 산소를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혹시 물을 먹어 가라앉지 않도록 애쓴다. 다리에 힘이 빠져도 목은 꼿꼿함을 유지한다. 오랫동안 불신 속에서 살아간 덕에 익힌 비결 중 하나이다. 윤화평의 불신은 깊고 넓어 평생이 걸려도 육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자그마한 무인도는커녕 암초라도 만날 수 있을지, 윤화평은 늘 제자리이다. 분명, 사람을 구하고 악마를 드러냈음에도 발목이 끈에 묶인 듯 같은 곳에 떠 있다. 손과 다리로 아무리 헤쳐도 윤화평의 몸 대부분은 잠겨 있다. 최윤은 언젠가 불신에서 건져낸 그의 시체를 상상한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게 탔을 테지만, 목 아래는 물에 잠겨 하얗고 퉁퉁 불었을 것이다. 손가락은 쭈글쭈글해서 지문을 알아내기 힘들 것이며 허벅지나 복부는 굶주린 물고기 떼들이 파먹어 쏟아진 내장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 그를 건져 올렸을 때 처참해 누구도 그를 제대로 봐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썩은 내 나는 육신, 육지에는 윤화평이 묻힐 땅이 없다. 그는 죽어서까지 새빨갛게 타올라 자그마한 도자기에 담길 것이다. 어쩌면 담기지도 못하고 다시 바다에 뿌려지거나. 어떤 것이든 끔찍한 결말에 최윤은 몇 번이고 이사를 권했으나 그는 떠나지 않는다. 하필이면 불신을 믿어서, 하필이면 불신 속에 살아서 윤화평은 바다가 보이는 집을 골랐다.

 

 

 

 

윤화평의 집은 벽이 얇아 비린내와 파도 소리가 쉽게 새어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최윤은 윤화평의 집에 있을 때마다 말이 많아진다. 기어코 들어오는 바다를 조금이나마 덜기 위하여 자꾸, 떠든다. 하지만 그는 말주변이 없다. 이야깃거리도 별로 없다. 그러니 금세 입을 닫고, 멀거니 지켜보게 된다. 넓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윤화평을. 근본적인 해결은 그의 믿음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꺾어버리기엔 가련하며 내버려 두기엔 미련하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니 최윤은 끊임없이 불안하다. 불신과 달리 불안은 덜 수 있음에도 덜어내지 못하고 계속,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윤화평 근처에 있으려 한다. 꺾어도 꺾지 않아도 윤화평의 결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은 죽음이다. 단지 죽음의 주체가 다르다. 불신을 내버려 두면 윤화평을 죽이는 것은 불신이지만, 불신을 꺾으면 생에 의지가 사라지는 쪽은 윤화평이므로. 최윤은 두렵다. 어리석고 강렬한 믿음이 비참하다. 그런데도 그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모래밭에 앉아 해류를 거슬러 오지 못하는 윤화평을 가만히 본다. 고달픈 명命을 꾸역꾸역, 이어나가는 모습에 최윤은 서러워하다가 안쓰러워하다가 화를 내다가 무릎 꿇고 기도한다. 사실상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건 최윤이 신을 믿고, 신의 뜻을 믿고, 신의 구원을 믿으며, 신의 징벌을 믿기 때문이다. 불신에 뛰어들기엔 그도 충분히 끔찍한 명을 살았다. 그렇지만 최윤은 윤화평이 불쌍하다. 파도에 무너질 모래성을 보듯이 꼬르륵, 가라앉을 윤화평이 가엽다. 아마 윤화평은 최윤이 가여우리라, 예상한다. 서로에게 죄책감과 동정을 느끼는 이 불온한 관계는 어떤 희미한 것에 의하여 이어진다. 최윤은 그 희미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죽고 난 후의 윤화평을 생각한다. 그는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한 채 겨우, 모래사장에 앉을 거라고,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구도 악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감시할 거라고, 최윤은 생각한다. 바다 앞에 선 윤화평, 그건 사실 상상이 아니라 상기이다. 바다 앞에서, 바다 안으로, 서서히 잠기는 뒷모습. 그날은, 윤화평이 여전히 불신 속에 잠겨 있듯이 최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최윤은 무얼 했는가, 윤화평이 스스로 죽기를 자처했을 때, 최윤은 겨우, 기도만 했으며, 살아서 다시 만난 윤화평에게는 그를 부여잡고, 눈물을 쏟았다. 그러니까 그건 곧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지금도 둥글게 만 윤화평의 등을 바라만 본다. 최윤은 윤화평의 척추를 어루만지고 싶다. 그러나 최윤은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무릎에 모래를 묻힌 채 불신의 수평선을 볼 뿐이다.

 

 

 

 

지금, 엄청 미련해 보이는 거 알아요? 최윤은 최대한 믿음을 꺾지 않도록 조심히 말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말은 훨씬 거칠고 투박하게 튀어 나간다. 윤화평은 말없이 등을 더 둥그렇게 만다. 그냥 약 먹어요. 괜한 고생 말고, 그는 만지지 못한 척추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들고 오느라 약간 흔들린 물컵은 금세 잔잔해진다. 윤화평은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 중얼거린다. 감기 아니야. 땀에 젖은 옷이 가려지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 최윤은 문득, 윤화평이 여기에 있는 게 최윤 자신임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누가 아닌 그에게 유약한 최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최윤은 한숨을 틀어막고 묻는다. 감기가 아니면 뭔데요. 그러자 윤화평은 감기가 아니라 무병巫病이라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지만, 윤화평이기에 어느 정도 신빙성 있다. 최윤은 신을 받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지옥 같은 스무 해를 살았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무어라 반박하면 좋을지 또한 알지 못한다. 윤화평은 종종 이런 식으로 최윤이 잘 모르는 이유를 들먹이곤 한다. 그러면 최윤은 고작, 무병이라도 먹으면 나을 수 있잖아요, 같이 순진한 이유를 댄다. 소용없다니깐. 윤화평은 궤변인 듯 아닌 듯 짜놓은 말을 건넨다. 사실상 말이 되건 안 되건, 윤화평이 질 일은 없다. 최윤은 윤화평을 이기지 못한다. 그가 이기려면, 시간을 돌려 제 몸에 글자를 새기던 윤화평을 막거나 혹은 더 뒤로 돌아가 윤화평의 목을 조르던 자신을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최윤은 늘 윤화평에게 지고 만다. 패배는 방관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이다. 따라서 오용, 남용, 그런 거 다 하면 안 되는 거야, 하고 윤화평이 웅얼거릴 때 최윤은 입을 닫는다. 그는 한숨조차 쉴 기회를 잃고 가만히 쟁반 위에 놓은 약의 주의사항을 읽는다. 축축한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확인하자마자 달려나가 근처 약국에서 사 온 종이 곽에는 어떤 효능을 내고 어떻게 보관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복용하면 안 되는지가 적혀 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자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니까 윤화평은 약을 먹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증상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병의 원인이 이상하다고 한들, 반응은 세포에서 일어나니까. 그러나 최윤은 그저 땀에 반짝이는 목덜미나 베개에 쏟아진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엔 어떠한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어떻게 윤화평을 설득해야 할지 적혀 있지 않음에도 느리게 눈을 깜박인다. 또다시 최윤은 보고만 있다. 괜히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펴면서, 저 깊은 모래 밑에서 부글거리는 충동을 잊으려 한다. 땀이 한 방울, 목덜미에서 올곧지 않게 흐른다. 최윤은 검지로 훔치고 싶으나 기어코, 참아낸다. 그는 바싹바싹 말라가는 목구멍 때문에 떠놓은 물을 마시고 싶지만, 윤화평이 약을 먹지 않아도 물은 마실지 모르니까. 참는다.

 

 

 

 

윤화평,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무색하도록 달뜬 숨소리가 들린다. 어렴풋한 파도 소리와 한 번씩 크게 몰아쉬는 윤화평의 숨소리가 서늘한 바닥에 부옇게 깔린다. 최윤은 부디 그가 이사하길 바란다. 새로운 집에서 살며, 불신을 탈수하길 바란다. 평생이 지긋지긋하지도 않은지, 그는 팔을 뻗어 괜히 닫힌 문에 힘을 준다. 그래도 육안으론 알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 그가 뻗은 팔을 거두고 윤화평을 내려다보았을 때, 윤화평은 몸을 돌린 상태이다. 그러니까 윤화평은 최윤을 마주한다. 최윤은 아까보다 구겨진 이불에 시선을 둔다. 최대한 윤화평의 번들거리는 목덜미나 이마, 건조해서 겨우 침을 바른 버석한 입술을 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최윤, 하고 갈라져 볼품없는 목소리로 불러오니 눈을 피할 수 없다. 윤화평의 앞에선 최윤은 자유의지가 사라진다. 이윽고 희뿌연 눈에서 땀방울만큼이나 빠르게 눈물이 흐른다. 열로 인해 고였던 게 베개와 머리카락을 적신다. 눈이 멀어도 눈물은 난다. 그러나 세로로 그어진 흉을 따라 곧게 흐르진 않는다. 바다만큼 어렴풋하게 들어온 빛이 윤화평의 눈으로 쏟아진다. 마침 희멀건 쪽이라 빛은 거슬리지 않는다. 하지만 착실히 말라가고 있으므로 깜박인다. 깜박, 깜박. 최윤은 하얀 동공이 꼭 진주 같다고 생각하다가 스스로 낯부끄러워 볼 안쪽 살을 씹는다. 생리적인 눈물이 간헐적으로 쏟아진다. 그게 참 윤화평을 더욱 약하게 보이도록 한다. 만일 그를 상자에 넣는다면 분명 바깥에 파손 주의 스티커를 붙여야 할 것이다. 평화는 원래 깨지기 쉬운 것이므로. 어쩌면 윤화평은 생각보다 더 많이 그의 이름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최윤은 주먹을 쥔 다음, 엄지로 검지를 가린다. 저 눈물을 모두 닦으려면 아무래도 검지로는 불충분할 것 같다. 최윤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며 거스러미를 뜯어낸다. 아, 찰나의 쓰라림과 함께 붉은 살이 드러난다. 쏟아지는 눈물이 눌린 귀에 고이는 게 거슬리는지 윤화평은 다시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천장으로 향하게 한다. 그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천장을 본다. 말린 등이 곧게 펴지고 마른 배가 꺼지며 이마에 무언가를 올려놓기 좋은 자세. 최윤은 조만간 수건에 물을 적셔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물수건을 뜨거운 이마에 올리고 물기를 짜느라 차가워진 손으로 가슴이나 배를 토닥이고 싶다. 수건은 시도해볼 만한데, 그는 그저 시선을 따라 고개를 꺾는다. 천장에는 얼룩이 가득하다. 비가 샌 흔적이거나 비슷한 부류의 원인으로 생겼으리라 짐작한다. 지저분한 벽지와 지저분한 천장, 지저분하게 살아온 윤화평과 지저분하게 살아남은 최윤. 얼룩은 커다란 구름 같은 게 하나, 주먹만 한 점이 세 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모양이 예닐곱 개 있다. 양이라도 세듯이 최윤은 하나하나 눈으로 센다. 윤화평이 내뿜는 열기가 옮아 붙어 나른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어쩌면 윤화평도 그처럼 얼룩을 세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 잠든다면-지금 최윤이 가장 바라는 결말이다.-그때 물수건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부엌에 갔다 온다면 못 본 사이 다시 몸을 웅크릴 수 있다. 따라서 최윤은 그가 바른 자세로 잠들기를 기다리며 잠시 미적지근한 시선을 이마에 올린다.

 

 

 

 

하지만 윤화평은 잠들지 않는다. 원래부터 희뿌연 눈 하나와 열기로 가득해 뿌옇게 된 눈 하나가 천장에 닿지 못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화평은 어느 것도 보지 않고 있다. 허공을 떠돌 뿐이다. 윤화평의 이런 시선은 이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그 자리에 윤화평이 아닌 존재가 윤화평의 껍데기를 쓰고 숨 쉰다. 휘젓던 발버둥을 멈추고 그저 둥둥, 익사한 시체처럼 떠다닌다. 윤화평이 잠든 윤화평을 보고 있노라면, 줄이 끊어진 부표처럼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떠내려갈까 두렵다. 그래서 최윤의 손가락이 옷자락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한다. 미끄러운 싸구려 장판을 꾸물꾸물, 마디를 접었다 피며 기어가 납작한 소매 끝을 잡고자 한다. 손톱만큼, 아니, 손톱의 절반만큼, 아니, 손톱의 삼 분의 일만큼. 잡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가냘프게. 그러나 검지와 중지가 느린 탓에 흰 소매에 닿기 전, 윤화평이 윤화평의 단단하지 못한 껍데기로 돌아온다. 그는 여태 열에 녹아 흐물거리던 상체를 세우며 말한다. 곧, 동백이 질 거야. 윤화평은 뜬금없는 것을 보는 만큼 뜬금없는 것을 말하는 재주가 있다. 참으로 맥락 없는 문장에 최윤은 손을 뒤로 물릴 생각을 하지 못한다. 동백, 동백이라니. 윤화평은 일어나 이내 장롱 손잡이를 잡고 두꺼운 옷을 꺼내기 시작한다. 두껍다고 해도 상대적인 것으로 절댓값만 놓고 본다면 저걸 입는다고 따듯한지 의문스럽다. 최윤은 갑자기 땀이 밴 옷 위에 이것저것 껴입기 시작하는 윤화평을 멀거니 바라본다. 그러다 오랜만에 윤화평은 꽤나 충동적인 사람임을 실감한다. 하지만 이건, 미련한 짓이다. 최윤은 일어나 윤화평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지금 뭐합니까? 그랬더니 윤화평은 여전히 뻔뻔하게 나가야 해, 하고 말한다. 그 몸으로. 최윤은 가지 못하게 막는다. 아니, 글쎄 감기가 아니라니까. 알았어, 갔다 오면 네가 준 약 얌전히 먹을게. 됐지? 되지도 않는 타협을 하려 한다. 이번만큼은 최윤이 소리 내어 크게 한숨을 쉰다. 그는 천장을 보기 전 흐렸던 눈이 또렷해진 것을 확인한다. 아직 열이 남아 있지만, 무언가 바뀐 듯하다. 이대로 찬 바람을 맞으면 더 심해질 게 뻔한데도 윤화평은 저렴한 이유로 협상한다. 그거면 최윤에게 통할 거란 듯이. 갔다 오면 꼭 먹기로 한 거예요, 윤화평의 미련한 짓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또한, 최윤이 윤화평을 이기지 못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는 영원히 꺾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최윤은 혹시 몰라 곱게 걸어둔 제 목도리를 윤화평의 목에 두른다.

 

 

 

 

원래 윤화평은 돌보고, 기르고, 어르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최윤은 집 곳곳에 놓인 화분에 놀랐다. 화분의 크기는 제각각이며 색깔이나 식물의 종류도-최윤이 보기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윤화평의 말에 따르면-하나 같이 다르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좁은 마당을 지나야 하는데 마당에 일렬로 서 있는 푸른 이파리를 지나칠 때마다 이곳이 윤화평의 집이 맞나, 하는 의심에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 윤화평은 추우니까 들어올 거면 얼른 들어오라고 투덜거려, 최윤은 황급히 들어가다 몇 번 길쭉하고 빼곡한 잎을 건드린다. 잎은 문이 닫히고 나서도 출렁거린다. 최윤은 물조차 사두지 않은 냉장고를 기억한다. 그는 그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무얼 샀는지 머릿속으로 영수증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윤화평은 익숙하지만, 제 몸은 돌보지 않으면서 식물은 돌보는 윤화평은 낯설다. 따라서 최윤은 윤화평이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는 것을 볼 때마다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건 윤화평이 불신에 빠져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가 금세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자신을 의탁했으리란 예상으로 변질하여 쓰라려진다. 그의 평생은 증발과 소멸과 죽음으로 득실거렸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한 번 뿌리를 내리면 누가 파내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는 생명체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마치 낮은 담벼락을 집고 허리를 조금만 숙이면, 바다에 떨어질 것만 같은 집에 계속 살고 있는 것처럼.

 

 

 

 

최윤은 윤화평이 더 이기적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정반대로 덜 이기적이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다. ‘더’와 ‘덜’은 받침 하나 차이인데도 제법 크다. 어떤 단어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에 귀결된다. 윤화평이 더 이기적이길 바란다면, 그 자신을 돌보기를 원할 것이며 덜 이기적이기를 바란다면, 그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최윤은 둘 다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윤화평은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복수에 눈이 먼 사람이며, 눈이 멀어 자신을 돌볼 수 없다. 따라서 최윤은 장갑을 끼고 왔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나무를 짚은 손바닥에 우둘투둘한 껍질이 느껴진다. 그는 윤화평이 갑자기 픽, 쓰러져 산을 구를까 봐 겁이 나 뒤처지는데 윤화평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산을 오른다. 적어도 장갑을 챙겼다면, 윤화평이 미끄러져 굴러떨어질 때 재빠르게 그를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장갑이 없으므로 손이 쉽게 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이 그리 춥지 않다는 점으로, 최윤은 일단 당장은 그가 돌아보지 않고 부디 이기적이게, 올라가길 바란다. 조금 전까지 열이 났던 것치고 희미한 비틀거림도 없이, 심지어 최윤보다 더 뛰어난 발걸음으로 오르니 최윤이 할 일은 그를 부지런히 쫓는 것뿐이다.

 

 

 

 

어쩌면 윤화평의 말대로 그는 진짜 무병인지도 모른다. 최윤보다 빠르고 망설임 없이 올라가는 뒷모습이 증거이다. 물론, 최윤은 그보다 옷이 얇으며 하나뿐인 방한용품-목도리-마저 윤화평에게 양보했으니 더딜 수 있다. 그러나 꼿꼿한 허리는 기묘하다. 조금 전 그를 바라보던 뚜렷한 눈처럼. 백 퍼센트 순수한 윤화평이 아니라 불순물이 섞인 듯하다. 사실 산이라 부르긴 하지만, 높이는 해발 오십 미터도 되지 않아 야산 축에도 끼지 못한다. 오히려 언덕이란 이름이 더 어울리는-그래서 최윤은 더 창피한 것이다. 이것도 제대로 못 오르다니.-수준이다. 최윤은 잎이라곤 없는 마른 가지나 축축하고 누렇게 깔린 풀을 굽어보며 다음 발을 디딘다. 겨울 냄새뿐인 산에 홀로 생명력을 뽐내는 나무가 정말 존재할까. 동백, 그의 기억에 따르면 윤화평이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뒷산에서 동백을 있다던 발견 한 번, 겨울이 왔으니 꽃이 피었을 거라는 짐작 한 번, 마지막으로 조금 전 동백이 질 거라는 예언 한 번, 총 세 번뿐이다. 윤화평은 동백이 피었음을 알면서도 여태 보러 간 적이 없다. 그러므로 꽃이 진다는 것은 윤화평 혼자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그러니 윤화평은 몸을 드나들던 무언가에 의한 무병일 수 있다. 최윤의 유일한 신을 위하여 그는 무언가를 신이라 칭하진 않지만, 윤화평에게는 신이다. 윤화평은 그를 바다에서 건져 올린 데 신의 힘이 작용했을 거로 생각한다. 사소한 믿음, 따라서 최윤은 신이라고 부르진 않아도 감사하다. 감사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영적인 것이든 아니든 구분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동백은 윤화평이 기르던 식물이 아니다. 홀로 싹을 틔우고 몇 년 혹은 몇십 년 다리를 박고 살아왔으니 윤화평이라고 하는 인간의 손을 타지 않더라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던 동백을 보러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윤화평의 껍데기를 빌려 쓴 무언가의 고집일까. 그 고집에는 윤화평의 고집이 섞여 있을까, 섞여 있다면 어떤 고집일까. 최윤의 발자국이 아직 녹지 않은 눈에 짙게 남는다. 밑창에 묻은 눈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루처럼 뿌려진다. 그는 여전히 누런 풀과 공허한 밑동을 보며 걷다가 더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든다. 발밑만 보던 시선을 올리자 멈춰선 윤화평과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꽃이 보인다. 어떤 이유로 왔건, 그곳엔 아직 지지 않은 동백이 있다.

 

 

 

 

최윤은 조금 전 윤화평이 멈춘 자리에 똑같이 멈추어 선다. 그와 서너 발 떨어진 곳에 선 윤화평은 나무에 손대지 않고 가만히 있다. 최윤은 그가 동백이 지기를 기다리는 거로 생각한다. 곧, 이라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단어가 언제일지 최윤은 가늠할 수 없다. 그건 오늘일 수 있지만, 내일일 수도 있으며 기간을 더 늘리면 이번 주이기만 하면 되지 않나. 그래서 최윤은 윤화평을 부른다. 윤화평 씨, 하고 부르자 윤화평은 대답 없이 그저 동백을 향해 고개를 든다. 결 나쁜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진다. 최윤의 부름은 허옇게 뭉친다. 그러나 금세 허공에 녹아들며 사라진다. 최윤은 한 번 더 부른다. 윤화평 씨, 그제야 윤화평이 입을 열어준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해.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내린다. 여전히 돌아보진 않는다. 최윤은 동백이 지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 그가 말하려던 것은 사실 긴 문장이지만, 줄이고 줄여 간단한 부름이 된다. 확실히 어제보다 따듯하다. 어제만 해도 귀 끝이 얼 것처럼 아팠는데 오늘은 아니다. 하긴 어제처럼 추웠더라면, 최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밖에 나가는 것을 막았을 테니 굳이 따지자면, 유한 데에는 날씨 탓도 있는 거라고, 핑계를 댄다. 다행히 윤화평은 멀쩡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 전만 해도 환자였으니 조바심이 생겨 윤화평 씨, 하고 또 부른다. 최윤은 그가 돌아보지 않고 타박할 거로 예상한다. 거 참, 되게 재촉하네.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신부는 어떻게 된 거야? 특유의 죽죽 늘이는 말투로 비꼴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윤화평이 돌아본다. 먼저 왼쪽 귀가 보인다. 그다음은 또렷한 왼쪽 눈이고, 이어서 깔끔한 콧날을 지나 흐리멍덩한 오른쪽 눈이 들어온다. 윤화평은 별다른 비꼼 없이 최윤을 맞이한다. 그때, 바람이 분다. 조금 전만 해도 날이 풀려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취소해야겠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차갑게 불어온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윤화평의 속삭임이 최윤의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봐, 최윤, 동백이 내리고 있어.

 

 

 

 

그의 말대로 붉은 동백이 내리기 시작한다. 휘휘, 꽃과 가지와 이파리를 흩트려 놓은 바람이 사이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꽃송이가 떨어진다. 최윤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엄지 끝을 넣을 수 있을 만큼 입을 벌린 채로. 후드득, 후드득, 동백이 제 머리를 잘라내는 모습을 보고 있다. 끊어지는 소리는 물론, 전조 증상도 없이 바람과 함께 운명한다. 잘리기 전부터 벌건 머리는 늘어진 노란 꽃술처럼 추락한다. 지구에서 사는 것은 예외 없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착실히 아래로, 떠내려간다. 잘린 머리는 윤화평의 머리카락 위를 미끄러지거나, 얼굴을 스치거나 혹은 희멀건 눈에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마침내, 바닥에 도착한다. 하지만 딱 한 송이가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남는다. 최윤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동백을 지켜본다. 용케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윤화평의 주변을 지독하게 뒹구는 꽃송이가 이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주위가 온통 붉어서, 윤화평이 자꾸만 하얗게, 사라진다. 점점 누렇게 죽은 풀 위에 눈처럼 녹아들어, 함께, 죽어갈 것만 같다. 이 자리에는 온통 죽어가는 것뿐이다. 최윤은 한 발, 제 근처까지 날아온 꽃을 밟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새로 윤화평 씨, 하고 흘린다. 그는 꽃이 진 것도 봤으니 이만 돌아갑시다, 하고 말할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를 괴롭히던 불안이 찬 바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설령 그의 주장대로 감기가 아니라 해도, 윤화평은 눈이 녹다 만 낮은 산이 아니라 집구석 이불 안에 있어야 했다. 최윤은 실수를 바로잡고 싶어 지금이라도 얼른 돌아가자고 할 생각이다. 동백이 지건 말건, 당신은 살아 있고, 아직 죽으려면 멀었고, 그러니 당장 산에서 내려가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줄 생각이다. 그러나 한동안 윤화평에게 자유를 빼앗겼던 혀가 주제도 모르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동안 늘 윤화평의 의지에 짓눌린 설움인지, 혹은 복수인지 멋대로 꿈틀거린다. 평소라면 뇌가 전달한 문장을 혀가 고스란히 읊을 것이며 읊은 문장은 윤화평의 대체로 불신에 반하지 않는 것인데 이번에는 다르다. 혀가 얼기설기 짜낸 문장이 거꾸로 뇌에 전해진다. 우둘투둘한 미뢰를 거슬러 수많은 신경을 타고 위로. 그래서 스스로 뱉고도 어떤 문장을 꺼냈는지 인지가 느리다. 혀가 꺼낸 것은 이만 죽지 마세요, 그런 문장으로 상당히 순진하고 직설적이지만 최윤은 생각보다 처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절박하고, 처절하고, 징그러울 줄 알았는데 연습 한 번 안 하고 평범하게 꺼냈다는 게 놀랍다. 윤화평은 어떨까, 그는 먼저 숨을 한 번 들이마신다. 그리곤 최윤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다. 감기 아니라니깐 되게 걱정하네, 감기여도 안 죽어. 걱정하지 마. 그는 아마 최윤이 이곳까지 올라온 것 때문인 줄 아는 듯하다. 그러나 문장은 훨씬 전, 바래지 않아 여전히 선명한 과거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가, 물에 잠겨, 가라앉았을 때. 차디찬 겨울, 바다, 불씨라곤 없는 밑으로, 십자가를 졌을 때.

 

 

 

 

최윤은 한 발 더 다가간다. 그리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동백 위로 어깨를 움켜쥔다. 진한 꽃향기가 코끝에 내려앉는다. 그는 손바닥 밑에서 짓이겨진 동백을 외면하며 속삭인다. 감기든 감기가 아니든,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손가락 네 개가 윤화평의 어깨를 지나 등을 향해 뻗고, 나머지 하나만 어깨를 진득하게 누르고 있다. 다른 손은 동백이 없는 빈 어깨를 쥔다. 윤화평은 가까워진 최윤의 입술을 바라본다. 허연 입김이 허공에 퍼지려는 것을 윤화평이 빨아들인다. 빨려 들어간 언어는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아, 쩍쩍, 시럽처럼 올라붙은 문장이 달아 윤화평은 입을 벌린다. 하지만 아직 답변이 준비가 안 된 듯 한 번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기다리는 동안 최윤은 눈이 내린다면, 윤화평의 내리깐 속눈썹에 몇 송이가 걸릴 거로 생각한다. 속눈썹이 팔랑인다. 깜박, 팔랑, 깜박, 팔랑. 이윽고 속눈썹이 위로 고정되며, 입이 벌어진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최윤은 윤화평의 입속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것을 본다. 차가운 사실이 흔들리며 보글보글, 소리를 낸다. 그건 참 부질없는 변호 같다고, 최윤은 생각한다. 그리고 헷갈리던 바람이 확실해진다. 윤화평은 이기적이다. 최윤은 그가 덜 이기적이길 바란다. 그는 지금 아무래도 좋을 과거의 변호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혼자서 죽을 생각 좀 하지 말아요, 하고 속삭인다. 옷에 가려지지 못한 말단이 따듯해도 착실히 얼어붙는다. 그러나 윤화평은 배심원이라곤 없는 초라한 법정에서 여전히 기원을 변호한다. 최윤은 판사도 검사도 아니다. 유일한 방청인이다. 피해자 신분으로 참관한 방청인. 엉성하게 자리한 목도리 사이로 가는 목이 보인다. 짓이겨진 동백과 달리 제대로 붙어 있는 목을 보며 최윤은 한 번 더 말한다. 그가 받고 싶은 것은 과거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약속이다. 그도 알고 있다. 누군가는 지옥을 걸어야 했다. 오직 숭고한 마음으로 누군가는 기꺼이 죽어야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최윤과 윤화평 둘 중 하나여야 했으며, 단지 윤화평이 좀 더 빠르게 움직였을 뿐임을 최윤은 잘 안다. 하지만 최윤은 윤화평 씨는 지금 살아 있잖아요, 하고 최대한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혼자서 다 떠안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윤화평은 눈을 끔벅인다. 최윤은 그다음 무엇이 넘실거릴지 이미 안다. 불신이다. 윤화평의 눈에 불신이 일렁인다. 아직, 모르잖아, 하고 그가 웅얼거린다. 악마가 살아남아 바다 밑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작게 웅얼웅얼, 최윤은 불신 속에서 흔들리는 윤화평이 보인다. 잔잔하다고 해도 물결은 움직여 윤화평도 함께, 흔들린다. 그리고 다시 세차게 바람이 분다. 미처 내리지 못한 동백이 우수수, 떨어진다. 눈을 맞는 것 같이 머리에 무언가 닿았다가 금세 사라진다. 최윤은 윤화평의 곧은 눈썹을 보다가 미끄러져 그 아래 불투명한 유리 같은 눈을 본다. 두 눈으로 한 눈을 살핀다. 그것은 순교와 구원의 증거이자 불행과 끝의 상징이다. 최윤은 불신에 잠겨 가라앉을 윤화평을 상상한다. 불신이 그를 살게 하지만, 분명 그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최윤은 바람과 함께 훅, 끼쳐 오는 꽃향기를 맡는다. 그러자 바람이 날린 동백이 둥실둥실, 불신 위를 떠다닌다. 수면 위에 떠 있는 꽃은 윤화평의 얼굴에 닿고 만다. 아, 믿음. 당신의 꺾이지 않는 불신. 최윤은 그렇지만, 이라는 서두를 꺼낸다. 그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볼품없어진 동백을 내리누른다. 윤화평의 어깨에 스며들게 힘을 준다. 어쨌든 당신은 살아 있잖아요, 하고 불신에 최윤이 동백을 띄운다.

 

 

 

 

윤화평이 한 눈으로 최윤의 두 눈을 살핀다. 한참 말이 없던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쉰다. 내쉰 한숨은 희멀건 색으로 내리 꺼진다. 주로 한숨을 쉬는 쪽은 최윤이었으므로 이로써 최윤이 처음으로 승기를 잡게 된다. 좋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그게 돌아오면 난 또 어떻게든 막을 거야. 만약 이전과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또 할 거라고. 어쩔 수 없어, 내가 해야 하는 거니까. 윤화평이 미간을 좁힌다. 최윤은 윤화평의 협상조건을 기다린다. 그는 몇 번 입을 벙긋거렸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씹었다가 겨우, 제시한다. 그럼, 내가 너랑 같이 죽는 건 어때? 적어도 혼자 죽는 건 아니니까 최윤, 네가 말한 대로잖아. 너무도 뻔뻔한 제안에 최윤은 입을 벌리지 않는다. 윤화평은 최윤의 복잡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아, 짧은 깨달음을 내뱉는다. 그건 신의 뜻을 어기는 건가. 최윤은 아직 모래사장에 있다. 그는 동백이 바다를 떠다니는 것을 지켜본다. 떠내려간 수많은 동백 중 일부는 방향을 잘못 잡아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고, 일부는 물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이 젖어 침몰한다. 멀리 떨어진 윤화평에게 한 송이도 닿지 못한다. 아, 최윤은 동백을 보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가만히 보는 것으론 부족하다. 최윤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윤화평은 멋쩍게 웃는다. 역시, 좀 아니지? 그냥, 알아들었으니까 앞으로 생각해볼게, 하고 윤화평은 최윤의 손목을 밀어내려 한다. 그때 최윤은 문득 소나기처럼 신따위 개나 주라지, 둘의 관계만큼이나 불온한 문장을 떠올린다. 윤화평의 신이든 최윤의 신이든, 불신이든 믿음이든, 그가 무병이든 감기든, 다 개나 주라지. 그는 신발을 벗는다. 그리곤 푹푹, 패는 모래사장을 디디며 달려나간다. 양말 안에 모래가 들어온다. 그러나 최윤은 신경 쓰지 않고 기꺼이 불신에 몸을 던진다. 풍덩, 뛰어들어 얼굴을 수면 밖에 내민다. 그는 팔로 물을 헤집고 다리로 박차며, 나아간다. 떠다니는 동백 아무거나 하나를 쥐고, 불신의 한가운데 있을 윤화평, 모래사장에서는 점으로만 보이던 윤화평을 향해 헤엄친다. 직접 꽃을 전달하기 위하여. 불신에 젖자 최윤의 지난 믿음이 녹아버린다. 수용성 믿음이 쉽게 사라진다. 그의 불안은 믿음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함께 사라진다. 최윤은 불신을 가로지르며 가까스로 윤화평을 붙잡는다. 그래요, 최윤이 윤화평의 어깨를 고쳐잡는다. 네 손가락이 어깨뼈를 더듬는다. 나랑 같이 죽어요. 그 말에 윤화평이 최윤의 손목을 잡고 떼어낸다. 짧은 손가락이 최윤의 손목, 맥박 위에 닿는다. 그는 손을 뒤집어 손가락 마디와 손금, 어렴풋한 주름을 구경한다. 최윤, 너 나 진짜 사랑하나 보다. 그렇게 속삭이곤 손바닥 가운데 눌어붙은 동백을 검지로 건드리다가 후, 숨을 분다. 마침내, 동백이 떠난다.

 

 

 

 

최윤은 그제야 윤화평과 그를 잇고 있던 희미한 실이 무엇임을 깨닫는다. 두 글자로 모든 걸 설명하기엔 상당히 복잡한 삶을 살았으나 일단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어떤 단어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게 최선이다. 사랑, 최윤은 입을 벌리지 않고 윤화평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음미한다. 낯설고 부끄럽고 간지러운 맛에 볼 안쪽을 씹는다. 낯선 것은 이상하고 씁쓸하다. 그래서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편다. 이만 손을 떠난 동백이 최윤의 왼발 옆에 내려앉는다. 한 송이뿐이지만, 윤화평에게 전달한 것으로 만족한다. 타협은 완벽하진 않으나 완전하다. 그래서 손은 비게 된다. 윤화평은 상처받은 동물을 돌보듯이 꽃이 떠나간 자리에 제 손을 얹는다. 손금과 손금이 어긋난다. 차가운 말단끼리 만나봤자 서로를 녹이지 못하는데도. 윤화평이 한 발, 다가온다. 최윤은 다가가지 않는다. 더 이상 좁힐 간격이 없다. 그는 최윤이 못했던 동백을 조심히 어깨에서 건져 최윤의 머리카락과 귀 사이에 끼운다. 그러더니 애도 아니고, 킥킥, 소리 내며 웃는다. 하지만 목이 잘린 꽃은 오래 남지 못하고 추락한다. 누구도 동백의 추락을 지켜보지 않는다. 춤이라도 추듯, 손을 겹치고 눈을 마주하고. 그래, 나랑 같이 죽자. 윤화평이 속삭인다. 최윤은 왜 하필 동백일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이내 조금 전 윤화평의 변호만큼이나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우연만큼이나 운명이 넘치고, 운명만큼이나 우연이 넘쳐서. 그러니까 그리하여 그럼에도 동백이라고, 믿음이 지는 계절, 그것은 우연인 동시에 필연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과거가 된다. 이제 됐어, 윤화평은 손을 거둔다. 그는 최윤의 어깨에 이마를 한 번 비비고 떠난다. 희미한 땀 냄새가 꽃향기와 섞이며 스친다.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내려가자, 춥네. 진즉, 최윤이 뱉었어야 하는 말을 끝으로 새빨갛고 노란 머리를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또다시 윤화평이 앞장선다. 최윤은 제 발밑을 가득 채운 꽃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챈다. 동백이 졌으니 곧 봄이 올 것이다. 꽃이 지고 봄이 온다니 이상한 일이다. 실은 동백이란 조금 더 오래, 겨울을 지나 봄까지 피어 있을 꽃으로, 유독 윤화평과 본 나무가 일찍 진 것임을, 최윤은 그런 것까진 모른다. 그저, 곧 봄이 올 거라고, 당연히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동백은 자신의 거름이 되었다가 금세 피어나 겨울을 들고 오겠지, 최윤은 바닥에 깔린 꽃송이를 밟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는 약속을 잊지 않도록 곱씹는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해 딱딱한 나무를 잡아가며 되새김질한다. 장갑은 끼지 않았고, 손은 시리지만, 아무래도 좋다. 최윤은 악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와 함께 불신 속에서 살아야지, 그리고 끝내 악마가 온다면 윤화평과 함께 죽고 함께 퉁퉁, 불은 시체가 되리라, 다짐한다. 윤화평이 그와 한 몇 안 되는 약속이므로 어길 수 없다. 하지만 그와 한 약속 중 당장 지켜야 할 것은 최윤이 아니라 윤화평이 지켜야 한다. 윤화평은 약속대로 감기약을 먹어야 한다. 최윤은 저 밑에 있는 까만 정수리를 보며, 한참 밖에 있었으니 적어도 두 알은 먹게 해야겠다고. 그다음, 웅크리지 않고 바로 눕게 해 이제는 열이 나지 않는 이마 위에 물수건 대신 입술을 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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