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했더구나. 딱 그 한 마디였다. 그래서 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폐하. 가장 알맞고도 겸손한 대답이었다. 딱 제 아비가 원하는 대답. 무릎을 꿇은 현은 그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어깨와 날갯죽지를 베어낸 상처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나,”
“……”
“과유불급이지.”
상처가 지독하게 아렸다. 분명 다시 터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현은 고개를 더 조아렸다. 예, 잘 알겠습니다. 페하. 그 대답에 황제가 간단하게 손짓했다. 소자는 이만 물러가옵니다. 말을 던지고 태화전을 나오는 표정이 싸늘했다.
어의를 불러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 정도 의원이야 제가 사면 그만이니까. 걱정도 바라지 않았다. 그 정도 말은 꼭 해줄 사람이 있어서. 다만 상처에 대해 물어보기는 할 줄 알았다. 분명 전갈을 받았을 텐데. 현은 전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는 아비의 성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아.”
아버지와 비슷한 목소리였다. 왜인지, 둘은 나이가 들수록 비슷해졌다. 갈수록 저 목소리가 듣기 싫어지는 것도 아마 그 이유겠지. 현은 그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 인사했다. 형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물어보는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한 배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그와 자신은. 당당한 걸음걸이와 여유로운 표정, 그리고 향긋함이 가득한 음인의 향.
“오랜만이다.”
“예.”
“이번에도 진 적이 없다지? 덕분에 서남의 백성들이 편안해졌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물론 내가 잘한 것이지만. 현이 뒷말을 삼켰다. 전쟁의 기본도 모르는 형님은 아마 말해도 모를 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1황자는 전쟁에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 급박한 전쟁에 차출당하는 것은 항상 2황자인 서 현이었다. 운만으로 어떻게 전쟁을 이기겠느냐. 그래도 잘했다. 다독이는 손이 현의 상처를 스쳤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한 제 형님은 웃기만 했다.
“아바마마가 뭐라 하시든?”
“폐하께서는 별 말씀 안하셨습니다.”
아바마마와 폐하. 그것이 서 진과 서 현의 차이였다. 현은 철이 든 이후로, 황제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 소리를 뱉은 적이 없었다. 그랬구나. 칭찬이라도 넉넉히 좀 해주시지. 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괜찮습니다. 간단히 대답한 현은 그런 형님을 속으로 비웃었다. 진은 언제나 그랬다. 정해진 후계자. 정해진 애정과 사랑.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늘 현을 경계했다. 저로 인해 무언가를 모조리 빼앗겨버린 동생인데도 그랬다. 같은 부모. 같은 음인. 그럼에도 진과 현은 서로를 그저 결핍 상태로 두었다.
“오늘 연회에는 꼭 와.”
“몸이 괜찮아지면 가겠습니다.”
“너한테도 소개시켜주고 싶어 그런다.”
“……”
“좋은 분이야. 내가 본 양인 중에 가장 멋있으시고.”
다음 달이면 내 혼례인데, 형의 반려를 아직까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아무리 전쟁에 자주 나갔어도 말이야. 진이 현에게 말을 그렇게 많이 한 적은 처음이었다. 형님이 원하시면 가겠습니다. 현은 그가 말을 더 하기 전에 대답했다.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정혼을 먼저 말한 것도 진이니, 아마 그 전부터 마음에 품었을 것이었다.
“너도 어서 정혼을 해야 할 것인데.”
“저는 전쟁을 자주 나가지 않습니까. 지금은 괜찮습니다.”
“마음에 드는 양인은 없느냐?”
내가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주마. 넌지시 묻는 말에 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두 번이나 외면을 한 현이 고개를 꾸벅였다. 형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더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허락을 받고 뒤를 돈 현은 한없이 쓰라린 어깨의 상처를 더듬었다. 축축하게 옷이 젖어 들어갔다. 그 봐. 터진 것이지. 현은 손에 묻어 나오는 피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앗아갔으면서. 현은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는 진의 향내를 되새기며 생각했다. 현이 무향의 음인이 된 것은 진의 탓도 있었다. 현이 음인으로 발현할 때. 진은 죽을 만큼 아팠다. 듣도 보도 못한 병이라 내의원 전체는 물론이고 전국의 모든 명의까지 싹 다 진의 침궁에 있었다. 그러니 현의 발현에 신경써줄 의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민간의 의원을 불러오는 것은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황제 또한 진의 침궁에 처박혀있었다. 의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그 명령하나에 현은 그 어떤 의원도 부르지 못했다. 그저 참고 견딜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래 발현에는 의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현은 제대로 된 약도,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 부작용으로 향이 지워졌다. 원래 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그랬다.
양인은 본디 향에 민감한 존재였다. 음인도 그러했다. 제 향과 다른 형질을 가진 이의 향은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었다. 하지만 서현은 그 향이 없었다. 형 때문에. 그리고 황제 때문에. 어쩌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날, 제가 차라리 죽기를 바랐을지도. 현은 제 무향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는 황제를 떠올렸다. 아마 후자가 맞을 거였다. 그러니 여태 정혼자도 찾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겠지. 현은 확신했다. 황제에게 저는 그저 완벽한 후계자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틈만 나면 전장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죽으라고. 그냥 명예롭게, 황실을 위해 죽으라고. 현은 그 생각만 하면 이가 바득 갈렸다.
실수를 하셨어요. 현은 제 아비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언제든 꼭 해주고 싶었다. 죽든, 다치든 무언가를 당하라고 전장에 내보낸 것은 명백한 황제의 실수였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하물며 정비의 황자인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현은?
전쟁터에서는 전쟁만 하는 건 아니었다. 군대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현은 그걸 배웠다. 제 외숙부와 결탁하는 방법까지도. 형은 본디 외척 간섭을 멀리했으니 자신과 뜻이 맞은 거였다. 현은 그래서 사병을 키워냈다. 평상시엔 황제의 군대이지만, 제가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 서 현의 군대가 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용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대. 현은 그 군대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자신이 있었다.
궁을 벗어난 현이 뒤를 돌아 위엄에 가득 차 있는 황제궁을 한 번 올려다봤다. 욕심내지 않았던 자리였다. 그런 취급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에 의해 깊숙이 베인 어깨가 다시 쓰려왔다. 잘못 피했다면 등판 전체가 갈렸을 거였다. 그런데도. 현은 입술을 짓씹었다. 걱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황궁에서. 그러니 현은 그들을 권력으로 가질 생각이었다. 전부 다. 그리고 황금색 의복을 입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었다. 곧 하늘이 바뀔 것이다. 현은 그 생각을 하며 피비린내를 맡았다. 제 몸에서 나는 유일한 향이었다.
* * *
연회는 아주 시끌벅적했다. 영토는 물론이고, 조공까지 얻었으니 대외적으로는 완벽한 전쟁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현에게 남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런 일이야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별 신경 쓰이지 않았다만 연회장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제 형님은 신경이 쓰였다. 누굴 그렇게 기다리는지 뻔히 알아서. 그래서 그랬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학사님. 들뜬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진의 정혼자였다. 그가 황제가 되면 그 옆자리를 채울 양인. 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한림원의 장원학사였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 그가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현은 그 모양새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떨어졌다. 황제가 손짓하자, 그는 이제 왼쪽으로 몸을 틀어 절했다. 1황자님을 뵙습니다. 공손한 목소리였다. 우리 사이에 무슨 절을 하십니까. 생략하시라니까요. 진이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현은 그 얼굴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그가 현이 있는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2황자님을 뵙습니다.”
그가 인사하며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처음 뵙습니다. 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의 두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시선은 여전히 현의 눈이었다. 박정우. 현은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어서 와 앉으세요.”
진이 제 옆자리를 내었다. 덕분에 시선이 모조리 끊어졌다. 그럼에도 현은 정우를 다시 바라보진 않았다. 제 아버지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알고 있어서였다. 정우를 진의 반려로 들인 것도 그 눈치 때문이었다. 정우의 아버지인 전각대학사가 혹여나 다른 생각을 품을까 해서. 오래된 충신은 현을 꽤 아꼈고, 단 하루였지만 그의 스승이기도 했다. 현이 하루 만에 스승을 빼앗긴 건 아마 그 탓일 거였다. 하루만 가르쳤음에도 대신들 앞에서 현을 칭찬해버려서. 그건 황제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뛰어난 2황자는, 없어야 했다. 사라져야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로 전각대학사는 진의 두 번째 스승이 되었다. 황자에게 고위관직의 스승을 둘이나 붙인 셈이었다. 그건 곧 후계자라고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든, 전각대학사든 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현은 이미 그 전부터 정우를 알았다.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혼례식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예. 폐하.”
“엄하게 키웠기는 하다만, 그래도 손이 많이 간다. 이해해줬으면 해.”
현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진을 엄하게 키운 건 사실이었으나, 손이 많이 가는 건 황제의 마음 때문이 아닌가. 아마 정혼을 위해 전각대학사도 온전히 진의 세력으로 편입했을 거였다. 그러니 제 외숙부의 살생부에 올랐지. 현은 살생부 첫 장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전각대학사의 이름을 떠올렸다.
“폐하, 소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더 있어봤자 방해만 되는 것을요. 현이 생각하며 황제를 봤다. 그래라. 떨어지는 손짓이 경쾌해보였다. 현은 가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뒷모습을 집요하게 쫓는 시선이 하나 느껴졌다. 누군지는 당연했지만, 현은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연회장을 나섰다. 가는 곳은 제 임시 침궁이었으나, 가는 길은 그 반대방향이었다. 황궁의 정원을 빙 둘러 갈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기대하는 바가 있으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절 따를 사람이 섭섭하지 않을 테니까.
저벅저벅 떨어지는 현의 발걸음이 점차 더 줄어들었다. 그 뒤를 따르는 발걸음 때문이었다. 조금은 급하고, 조금은 설레는 소리. 현은 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바위 뒤로 가 몸을 기대었다. 이쯤이면 누구도 보지 못할 터였다.
“현아.”
익숙한 목소리에 현이 뒤를 돌았다. 그였다. 박정우. 형의 정혼자이자, 1황자 세력의 주축인 전각대학사의 장자. 학사님. 현이 부러 거리를 두었다. 정우가 그 말에 섭섭한 표정을 했다. 그건 싫은데. 말하며 벌려오는 품이 넓었다. 현은 그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숨을 들이마셨다. 두 심장이 얇은 옷을 통과하며 마주했다. 이렇게 바로 나오면 누군가는 의심하고 말거야. 현은 그에게 경고했다. 물론 소용없는 경고였다. 전쟁 때문에 몇 달은 보지 못했는데, 정우가 그 경고를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정우가 말을 흘려내며 현의 이마와 뺨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런 정우에게서는 은은하고도 무거운 향내가 났다. 난초의 향, 아니면 국화. 그와 비슷했다. 왜 날 보고 싶어 해. 형님이 있는데. 현이 말하자, 정우는 일부러 입술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 현도 그걸 알았다. 그럼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나중에 제가 받을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또 못된 말.”
“키가 더 자란 것 같아.”
“이미 다 컸는데?”
“그러게. 내가 작아졌나.”
현이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그런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우에게는 다 선물이었다. 서신을 그렇게 주고받았는데도 이렇게나 갈증이 나다니. 현은 황위를 제외한 제 유일한 욕심이 향하는 곳을 거부하지 못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보여줘. 그 말에 정우가 웃었다. 어떻게 보여줄까. 무릎을 꿇을까. 황자님이 없어서 죽는 줄만 알았다고. 현은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입술을 부딪쳤다. 커다란 바위에 현의 등이 닿았다. 하염없이 스며드는 서로의 입술이 달빛아래서 빛나는 것만 같았다.
첫 연정이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의. 현은 정우가 진의 정혼자로 선택되었을 때의 좌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침궁으로 가자. 여긴 너무 좁잖아. 현은 제 웃옷을 헤치고 입술을 묻은 정우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긴 어화원이야. 어디가 좁아. 정우는 타박하면서도 현의 옷을 바로 잡아주었다. 어깨를 감싼 하얀 천이 그의 손가락에 잡혔다.
“다친 거, 왜 말하지 않았어?”
“말을 꼭 해야 하나?”
“해야지. 꼭 해야지.”
정우의 표정이 축 늘어졌다. 그렇게 심하지 않아. 현은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잠시 뒤에는 알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나신으로 몸을 맞댄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니 금방 알 것이었다.
“또 거짓이지.”
“어떻게 알았어.”
현은 몸을 내보이지 않아도 그가 거짓을 알아챘다는 사실이 좋았다. 유일하게 진심을 꿰뚫리는 사람. 그게 박정우였다. 내가 널 모를까. 정우가 말하며 현의 콧잔등위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하얀 천이 감긴 상처를 입술로 쓸었다. 현의 옷이 다시 흐트러졌다. 침궁으로 가재도. 현이 나무라는 척 목소리를 냈다. 잠시만요, 황자님. 정우가 슬쩍 웃으며 상처 위로 입맞춤을 내렸다. 현은 낮게 신음했다. 마음에 드는 양인이 있냐고. 아까 들었던 진의 물음이 기억났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게 너무나도 우스워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박정우.”
“예. 황자님.”
“아니.”
“응, 현아.”
더 말해봐. 현이 재촉했다. 나한테 더 말해줘. 현은 붙잡을 것이 그뿐이었다. 정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말하는 정우의 손을 잡아 끈 현이 제 침궁으로 향했다. 네 개의 발이 가파르고 빨랐다. 가는 길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 말해줘. 숨이 벅차도록 뛰어 침궁에 도달한 현이 말했다. 정우는 그대로 현을 안아 올려 침상 위로 올렸다. 언제나와 같은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현은 정우를 보며 얼굴을 붉히던 형님의 얼굴을 기억해내 짓밟았다. 그래, 모든 것을 다 빼앗은 것은 아니지. 현이 생각했다. 딱 하나는 제 것이니까. 마음. 그거 하나는.
정우가 다급하게 현의 옷을 풀어냈다. 현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원래부터 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현의 머릿속에는 혼례복을 입은 진과 정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날 반란을 일으키는 제 모습까지도. 모든 그림은 당연하고 정해진 미래였다.
‘마음에 드는 양인은 없느냐?’
현은 자꾸만 웃었다. 현아, 현아. 아팠지. 제 상처 위로 눈물을 흘리는 정우의 목소리가 그와 겹쳐졌다. 응. 나 아팠어. 현의 말에 정우는 다시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박정우는 저 대신 이 상처의 곱절을 가지라면 가질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제 아프지 않으려고……. 현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살생부에 그의 아버지 이름이 적힌 것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정우의 목숨을 살리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일 테니까.
“나는 황제가 될 거야.”
그 말에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항상 듣던 말이었다. 반역의 씨앗. 대역무도한 죄.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정우는 유달리 전쟁터에 길게 있었던 현이, 분명 무언가를 준비했을 거라 생각했다. 형님의 세력은 전부 다 죽일 거야. 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정우는 현을 다시 탐하며 속삭였다. 이것도 늘 하던 말이었다. 당신 가문도 박살낼 거야. 그 말에도 정우는 멈추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서 진의 세력으로 들어간 이상, 어차피 정해진 일이었다.
“다시 말해봐.”
“현아.”
“응.”
“널 사랑해.”
난 네 손에 죽어도 좋아. 그 말이 다시 진의 말과 겹쳐졌다. 마음에 드는 양인이라. 아바마마께 청을 올려준다고. 현은 그 오만한 말을 되새기며 정우를 꽉 끌어안았다. 제 모든 것을 앗아간 형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양인은, 오로지 자신만을 탐하고 있었다.
* * *
향이 남았다. 정우의 향이었다. 현은 그래서 세숫물을 대령하는 하인도 오지 못하게 했다. 몸 곳곳에 짙게 배었다. 언제부터 이랬던 것인지.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현은 늘 그 생각을 했다. 향이 없는 음인. 남은 것은 피비린내뿐인 사람. 그런데 그 사이를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향도 꼭 그와 같아서 그런가. 현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난 네 손에 죽어도 좋아.’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제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그 말만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것인지 몰랐다. 자기가 죽일까봐서? 아니면 무언가를 알아차려서? 현은 아마 둘 다 맞을 거라 생각했다. 반역의 성공 기반은 전 세력의 숙청뿐이니까. 정우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만 그의 가문이 몰살당하는 일은 막지 못할 거였다. 외숙부의 세력이 반, 제 세력이 반이었으니 어느 정도는 굽혀야 이치가 맞았다.
“황자님.”
“들이지 말래도.”
“세숫물이 아니라……”
장군께서 함을 보내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약속한 일이었다. 현이 기다리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손끝에서 새어나오는 정우의 향이 현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가져와. 현이 말하자 문이 열렸다. 조그만 함을 가지고 들어온 하인이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바쳤다. 보자기로 싸인 것을 풀어내니 현만 아는 장치로 닫힌 상자가 나왔다. 익숙하게 그것을 연 현이 그 안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살생부였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죽여야 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심호흡을 한 현이 하인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대업이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아마 외숙부는 수도 경계의 성에서 군사들을 진군 시킬 거였다. 수도의 병사들은 나태해져 힘이 없었고, 그마저도 반은 현의 군사들이었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그 준비를 위해 그간 묵묵히 전쟁에 나간 것이기도 했다. 죽을 만큼 싸우고, 죽을 만큼 대항하기 위해서.
“잠깐.”
“예?”
“향이 나느냐?”
나한테서 말이다. 현의 물음에 하인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 향도 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착각인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짙었다. 그가 남긴 모든 것이.
“황자님, 제가 음양에 뛰어난 의원을 아는데……”
“되었다. 나가 봐.”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하인을 혼내며 내보낸 현이 말없이 책을 열었다. 첫 장이었다. 황제 서태우. 1황자 서 진. 전각대학사 박윤우.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현은 차마 다음 장을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현은 제 외숙부에게 한림원 장원학사를 살려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욕심 때문에. 아니라면 제 체면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는 모진 다짐 때문에.
장원학사 박정우
두 번째 장의 첫 이름이었다. 예부 시랑 한정태. 태사 소부 민사경. 익숙한 이름들은 전부 다 알았다만 그의 이름만은 낯설어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주먹을 바로 쥔 현이 억지로 그 다음을 계속해서 읽어갔다. 고위직부터 하위직까지 모든 사람이 적혀 있었다. 전부 다 진의 세력을 뒷받침해주는 자들이었다. 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세상이 온통 하얘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정우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언제였더라?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갑옷을 쥐어들며 생각했다. 군대는 이미 오고 있었다. 황제는 까맣게 모를 것이고, 잦은 전쟁으로 지쳤으니 백성은 무관심 할 거였다. 천천히 갑옷을 쓸던 현이 입을 채비를 했다. 세력의 중추만 죽어준다면. 서현은 승리가 확실하지 않은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일도 마찬가지였다.
갑옷을 입어야겠다. 현이 말하자 밖에 있던 하인이 다시 들어왔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물음이었다. 군대로 가야지. 현은 대답했다. 그리고는 하나씩 씌워지는 갑옷들을 꿰찼다. 기억이 파도처럼 휩쓸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마마마의 첫 번째 기일이었다. 그나마 저를 비호해주던 유일한 사람. 현은 그런 어미를 잃었다는 사실이 끔찍해 어화원 큰 바위 아래서 목 놓아 울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숨이 막히도록 울어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날. 그 어린 현 앞에 선 것은 정우였다. 현처럼 비를 세차게 맞고 있는. 울음을 차마 그치지도 못하고 저를 보는 현을, 정우는 그냥 안기만 했다. 그게 다였다. 이름도, 신분도 밝히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중에 안 거였다. 전혀 중요하지가 않아서. 현은 모든 것을 감싸주는 그 애정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박정우는 그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아마 알 테지. 현은 확신했다. 정우는 제 반역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곧 황궁에서는 내일 행할 혼례의 축하연이 벌어질 것이고, 군사는 턱밑까지 진군할 것이었다. 정우는 반역의 씨앗을 알면서도 그 모든 일에 참석할 것이 뻔했다. 당신을 죽이면 내가 살 수 있어. 현은 그가 품고 간 제 몸과 마음 위로 갑옷을 씌우고 방패를 달았다. 제가 죽이지 않아도, 외숙부가 그를 죽일 거였다.
‘보고 싶었어.’
그 목소리가 폐부를 푹푹 찔러댔다. 그 바람에 현이 가진 모든 살기가 들썩였다. 단 하나 가진 것. 현은 제가 움켜쥔 정우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상상을 했다.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결심만 한다면.
다 되었습니다. 하인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갑옷을 단단히 입은 현이 제 몸을 훑었다. 벌써. 온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왜 벌써. 미간을 찌푸린 현이 칼집에서 칼을 빼어 살폈다. 살기 위해 쥐었던 칼이었다. 죽으라고 내보낸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이 일을 가르쳐준 것은 황제였다. 살생부의 사람은 전부 다 죽여야 한다. 외숙부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휘하의 군사들도 이미 그 명령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우는 황실을 위해 싸울 거였다. 제 손에 죽기 위해서. 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
‘널 사랑해.’
천둥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왜 날 사랑해. 현은 늘 그렇게 물었다. 너라서 사랑해. 정우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비밀리에 몸을 섞고,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가 되었어도 정우는 그 관계를 멈추자고 하지 않았다. 들키면 황족보다는 제가 먼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도려진 마음의 상처를 다시 덧붙여나갔다.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삶을 버텼다고 하면, 모든 게 다 허상일까. 현은 그의 이름이 담긴 글자를 바라보며 그 생각을 했다. 나무가 되기 위해, 버팀목을 베어내는 꼴이었다.
칼을 쥔 손에서 그의 향내가 배어져 나왔다. 본래 향이 없는 음인이다. 자신은.
“소청아.”
“예.”
“말을 준비해야겠다.”
일이 급해졌어. 현이 그 말을 꺼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언제부터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부터 그랬을까? 현은 모든 것이 의문이었으나 단 하나만큼은 의문이 아니었다. 마음. 그거 하나는.
살생부를 쥐어든 현이 제 칼을 들었다. 황제는 제가 언제든 죽기를 바랐다. 아마 죽은 황후가 부정을 저질러 낳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황제는 늘 핑계를 붙여 사람을 미워하곤 했다. 그것이 서현이었고, 아닌 것이 서진이었다. 전쟁터에 떠밀려 나가면서도 실수하지 않은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뭐든지 하나만 잡히면 무너지는 위치와 삶이기 때문에. 오늘 혼례식이 끝나고, 진이 황태자로 임명되면 아버지 목적은 더 확실해 질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마지막 기회……. 현이 그 말을 읊조렸다. 실로 마지막이다. 진이 황태자가 되면 현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정책부터 시작할 거였다. 결국 변방에 나가떨어져 평생 국경이나 지키며 살거나, 아니라면 전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몰래 탄 독을 마시고 병사하거나. 뒤집지 않는다면 뻔한 미래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당신은 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현은 불현듯 그때처럼 눈물이 찼다. 비가 오는 날도 아니고, 어머니의 기일도 아니었다. 손에 잡힌 살생부가 파르르 떨렸다. 원하는 것. 현은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뜨며 그것을 생각했다. 원하는 것. 그것은 많았으나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황자님. 말을 준비했습니다.”
“그래.”
“저, 수도 밖으로 가시는 것이지요?”
소청은 눈치가 빨랐다. 그간 제 주인이 당해온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그 물음에 현이 하인을 한 번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뜻밖의 대답에 소청의 눈이 커졌다.
“궁으로 가야겠다.”
폐하에게 할 말이 있어서. 현은 그 말만을 한 채 말 위로 올라탔다. 급한 일이니 말을 타고 입궁해도 별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원하는 것은 많았다. 현은 그래서 말을 타고 달리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속도를 바꿨다. 하지만 여전히 유일한 것은 단 하나였다.
“폐하. 외숙부가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나약하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이다. 현은 죽이고 싶은 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생각했다. 제가 함께 반역을 저지르려 했어요. 그러니 어서 군사를 모으십시오. 친왕들을 입궁 시키세요. 욕심을 짓누르는 말이었다. 원하는 것을 하라고 했지. 현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박정우를 죽이는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 원하는 것 하나를 못 잊어서.
“저를 죽이세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현이 맹독과도 같은 말을 뱉어냈다. 아비의 앞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는데. 늘 저를 죽이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러니 죽이세요. 폐하는 절 죽이고 싶어서, 반역을 만든 실수를 하신 겁니다. 그러니 저를 지금 당장 죽이세요. 저를 아들로 생각하신 적 없잖아요. 조금의 거름도 없는 진심이 튀어나갔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아름다운 혼례복을 입은 진과 정우가 대전으로 뛰어들어 왔다. 현은 그에게서 나는 제 향을 맡았다. 현아. 정우가 다가오려 했으나, 현은 그를 외면했다. 그는 살아야 하니까.
내 향이었구나. 현은 그제야 그것을 알았다. 그의 것이 제 것이고, 제 것이 그의 것이었다. 향이 없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향이 되기 위해 그랬던 것일지도 몰랐다. 정우는 언제나 제 옆에 있었으니까.
내 향이었어. 나는 피비린내 나는 사람이 아니었어. 생각하는 현이 비로소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현의 몸에서 강렬하게 그의 향이 뻗어 나왔다. 오로지 서현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오로지 당신뿐이었어. 차마 말해주지 못한 진심이 현의 눈물을 타고 흘렀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서. 하지만 그게 제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살아. 내 향을 가지고 살아. 말없이 정우를 바라보는 현이 비로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