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안녕, 최윤. 그리고 안녕 나, 윤화평.
으로 시작하는 글. 화평은 겨우 인사말 한 줄 적은 채 펜을 놓았다. 고개를 들면 야윈 등이 보였다. 방 너머 성경을 펴 놓은 채로 기도를 하고 있는 뒷모습. 그의 이름은 최윤. 최윤이다. 화평의 입술이 달싹였다. 네 이름을 알아, 최윤. 알고있어. 그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보이지 않으면 청각이 예민해진다.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와 얕은 바람에 의해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앞에서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 화평의 눈이 천천히 모습을 비췄다. 최윤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화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안녕하세요. 윤화평씨.”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화평은 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화평은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아, 하고 멍청히 입술을 벌리고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수첩 하나를 꺼내들었다. 수없이 많은 종이들을 넘기고 난 후에야 원하는 내용을 찾은 듯 손을 멈췄다. 어디서부터 할까요? 그의 질문에 화평은 잠시 입술을 짓눌렀다. 어제는, 최윤이랑 장을 보고 왔어요. 그리고…. 말을 멈춰버린 화평은 그의 눈치를 보다 서둘러 눈을 내려 수첩을 들여다 봤다. 의사는 너그러히 웃으며 계속하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가서, 저녁거리를 사고서……. 화평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최윤씨랑 마트에 가서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화평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마트? 그의 시선이 다시 밑으로 향했다. 아니에요. 저희는 마트가 아니라 시장에 갔어요. 의사의 손에 들린 진료 차트 한 장이 뒤로 넘어갔다. 네, 시장의 분위기는 어땠어요? 그의 손이 손톱을 뜯었다. 분위기. 분위기…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나요. 화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르겠어. 내가 어제 최윤이랑 밖을 나갔었나? 아니, 어제의 내가 존재하긴 하는건가? 의사는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펜을 놓았다. 그럼 어떤 기억이 나요? 그 말에 화평이 얼굴을 들었다. 제일, 최근의 기억이요. 화평은 수첩을 탁 덮고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제일 최근의 기억은 최윤이랑 바닷가를 걸었어요. 걷고 또 걷다가 할아버지 집이 보여서 할아버지를 보러 갔어요. 밥도 얻어먹고, 좀 더 놀다가 집으로 왔어요. 집에선 같이 티비를 봤구요. 그는 말이 끝났다는 듯 눈을 뜨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기분은 어땠어요? 좋았어요. 기쁘고 행복했어요. 좀 전과는 다르게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때의 감정과 최윤과 나의 표정. 우리의 감정이 남아있었다.
“히스테리 신경증의 해리반응이에요.”
“…네?”
“쉽게 말하자면, 스트레스로 인한 기억장애. 즉, 알츠하이머와 비슷하게 보시면 돼요.”
처음 윤화평을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얻은 답이었다. 최윤은 쉽사리 반응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얇게 꾹 다물린 입술을 하고 있자 의사가 먼저 말을 이었다. 한번에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는 건 아니에요. 다만 기억을 서서히 지워나갈거에요. 바로 직전의 기억부터 어제, 그저께, 그렇게 점점 최근의 기억들을 지우고 과거의 기억들만 남을겁니다. 그렇게, 서서히……. 최윤은 조용히 그의 말을 읊조렸다. 왜, 왜…. 말을 잇지 못했다. 의문만 던져놓은 질문에 의사는 손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단지, 환자분의 심리적 문젭니다. 최근에 환자분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었나요? 아니요. 아니에요. 최윤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는데. 그럼 치료는, 어떻게…? 윤의 물음에 의사는 자판을 두드렸다. 심신 안정을 위한 약을 처방해 드릴겁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좋아요.
“그럼 완전히 나을 순 없다는 건가요.”
“…단정 지을 수 없어요. 환자분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겠죠.”
병원을 나선 윤의 얼굴은 무너져 내렸다. 옆에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화평을 쳐다보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선을 느낀 화평도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왜? 나 많이 안 좋대? 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화평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알 수 있었다. 최윤이 이렇게 무너지는 건 순전히 나 때문이겠지. 나 많이 안 좋구나. 화평이 중얼거렸지만 윤은 조용했다.
윤이 화평을 병원으로 데려간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는 힘겨운 소리를 내며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화평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윤화평씨. 윤화평씨. 두어번 그의 이름을 부르자 화평이 천천히 눈을 떴다. 괴로운 눈물로 푹 젖어있는 그의 두 눈을 보고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최윤은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배 위로 손을 올렸다. 토닥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화평이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었다. 최윤, 최윤……. 그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최윤은 화평을 끌어안았다. 저 여기 있어요. 윤화평씨 옆에서 살아있습니다. 윤은 직감했다. 화평의 어제가 또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이번에는 어디까지 가버린 것일까. 알고 싶지 않았다. 과거가 어떻든 간에 화평과 새로운 미래를 써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최윤의 하루는 내일로 향해갔지만, 화평의 내일은 어제로 향해가고 있었다. 기억의 조각이 어긋나고 있다.
화평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그의 일과가 적혀있었다. 병의 증세가 나타난 이후 화평은 하루가 끝나기 전에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을 메모했다. 그리고는 기억하려 했다. 어떻게든 기억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끝맺음은 늘 같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과거 뿐이었다. 그는 종이에 줄을 하나 그었다. 정확히 절반으로. 그 위는 자신이 가진 기억을 그 밑에는 진짜를. 그의 기억 속에 어제는 오랜만에 뭉친 세 명의 그림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강형사님과 최윤이랑 나랑, 셋이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었다. 강형사님은 또 한손에 무거운 검은봉지를 들고왔고 우린 질린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뭐. 노려보는 눈빛에 아무 말도 못했지만. 화평의 얼굴에서 슬금슬금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평화로운 하루와, 좋아하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행복한 그림이었다. 거기까지 글을 마친 화평은 길게 그어진 줄 밑을 쳐다봤다. 내가 아는 어제가 아닌, 진실된 어제. 진실은 언제나 절망적이었다. 우리 셋은 모인 적이 없었고, 나랑 최윤만이 존재했었다. 그는 기도를 하고 나는 일기를 쓰고, 똑같이 병원을 갔다가 동네를 조금 걸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머릿속이 아닌 앞장에 적혀있는 내용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겨우 올라갔던 입꼬리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온점을 찍으며 펜을 놓은 화평은 고개를 들어 최윤을 찾았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최윤.”
“네.”
“강형사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가 언제야?”
“…두달 전쯤이요.”
아, 벌써 그렇게 됐어? 화평은 부러 밝은 톤으로 말했다. 얼굴 본지 꽤 됐구나. 이러다 얼굴도 잊어먹겠네. 최윤은 입술을 물었다. 저번 주에 화평씨 할아버지 댁에서 뵀어요. 말할 수 없다. 사실은 항상 그를 무겁게 했다. 그의 입이, 마음이, 가슴이 무거운 추를 단 듯이 묵직해졌다. 묵주를 들고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님, 당신의 자비는 저희에게 닿지 않는 겁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제 친구를 구원해주세요. 화평은 조용해진 윤의 뒷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만났었구나. 또 내가 지워버린거구나. 그는 눈을 내렸다. 아득히 멀어진 기분. 소중한 기억들은 조용히 잊혀지고 있었다. 이러다 완전히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최윤 너랑, 강형사님이랑 다 내가 지워버리면 어떻게 해. 그때의 난 아무도 없는데. 화평은 눈물로 얼룩진 종이 위를 닦아내고는 얼굴을 문질렀다. 최윤은 성경을 덮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우는 얼굴. 윤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을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실거에요. 저희가 이곳의 ‘악’을 지워냈으니 주님께서도……. 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화평은 고개를 떨궜다. 웃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는 모든 걸 바쳐 ‘악’을 부서트렸는데, 돌아오는 건 고작 이런 거라니. 어쩌면, 최윤 네가 믿는 하느님은 일부러 세상에 그런 존재를 남긴게 아닐까. 인간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는 인간을 위해서. 그분은 그런 생각을 했던거야. 인간을 지지하면서 지워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그런데 하필 우리가 그분을 방해했던거지. 그래서, 벌을 받는게 아닐까. 최윤, 윤아. 그의 주먹은 이미 윤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화평의 울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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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화평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앞으로도 별다른 차도는 없겠지. 이러다 죽기 전에는 갓 태어난 아기의 지능으로 죽는게 아닐까. 화평은 픽 웃으며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툭, 하고 닿이는 단단한 어깨. 모든 기억이 변하고, 잊어버려도 제 곁에 남아있는 단 하나. 최윤. 그에겐 최윤밖에 없었다. 화평은 제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는 바람결에 몸을 맡겼다. 평상 아래로 떨어진 그의 다리는 허공을 맴돌며 동동 띄워져 있었다. 윤은 바닥에 닿지 않는 그의 발을 보며 슬쩍 웃었다. 다행히 화평은 바람냄새를 맡느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화평이 알았으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거다. 바다 앞이라 그런가. 짠내 엄청 난다. 그의 운동화가 윤의 종아리를 툭 쳤다.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최윤은 바나나맛 단지우유에 꽂힌 빨대를 물며 말했다.
“눈 감고 맡아봐. 바람에 엄청 많은 향이 담겨있어.”
화평은 눈을 감고는 흐읍- 숨을 들이쉬었다. 모래, 나무, 바다, 어 약간 탄내도 난다. 누가 폭죽 태우나 본데? 최윤은 태어나서 처음 세상을 구경하는 아이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를 눈에 담고 있었다. 당신은 내일이 되면 또 잊을테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의 하루가 어땠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했었는지. 시선은 느낀 화평은 눈을 뜨고 그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최윤. 나 닳겠다. 닳겠어. 윤은 빨대를 씹었다. 안닳아요. 그의 대답에 화평이 어깨를 툭 쳤다. 안닳을거야. 누구 마음대로. 그니까 그만 봐. 화평은 흥, 하고 새침한 소리를 내고는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 닳지 마세요. 저랑 계속 살아요 윤화평씨. 최윤은 말을 삼켜내며 화평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이건 달아요.”
대신에 윤은 고개를 틀어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꾸욱 누르는 입술이 화평은 익숙했다. 매번 이렇게 서툴게 다가오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말장난 하는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짧게 떨어져 나가는 입술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생명 가득한 연갈색 눈은 저를 담고 있었다. 햇빛과 바다와 자신을. 최윤은 엄지로 반대쪽 눈을 쓸어만졌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게 된 눈. 길게 베인 흉터. 화평은 그런 윤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무슨 생각해? 윤의 시선이 생명으로 돌아왔다. 아프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그 대답에 화평은 머리를 움직여 그의 이마에 꿍 부딪쳤다. 아팠어. 근데 별로 안아팠어.
“…그게 무슨 억지에요.”
“진짜로. 찔렀을 땐 아팠어. 근데 저 바다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생각했어. 내가 찌른게 나라서 다행이라고. 네가 아팠으면 난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괴로웠을 것 같아. 아, 강형사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별로 안아프더라. 오히려 편안하더라고. 윤의 입술이 불퉁하게 나왔다. 저는 안편했어요. 화평은 어색하게 웃고는 불만스럽게 튀어나와있는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윤의 무릎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날씨 좋다. 팔을 위로 쭉 피며 말하자 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날씨도 좋고, 바다도 좋고. 윤이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 좋은 날씨에 약은 안먹었구요. 그러자 화평이 퍽 그의 배를 때렸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넌 이 분위기에 그런 말을 해야겠냐. 최윤은 맞은 곳을 슬슬 문지르며 가만히 화평을 내려봤다. 윤화평은 매순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두렵지 않나요. 지금 나와 함께한 모든 것들이 잠에서 깨는 순간 사라질 텐데. 최윤은 말을 아꼈다. 그저 화평의 시선을 따라 시야를 가득히 채우는 바다를 쳐다봤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파도. 최윤은 그날 이후로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윤화평을 한 움큼 삼켰던 그 깜깜한 바다. 아득히 깊은 곳에서 사경을 헤매였을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손바닥에 땀이 차오른다. 윤은 그의 얼굴을 쓸어만졌다. 나도 이런데,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화평은 그의 손 위로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쌀쌀하네, 들어갈까? 작은 끄덕임에 화평은 몸을 일으켰다.
*
“아…흑, 으으…….”
화평은 오른쪽 눈을 감싸쥐었다. 흐윽….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안돼. 아…, 아파…. 아파……. 화평은 베개 위로 얼굴을 묻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프다. 눈이. 눈이 너무 뜨겁다. 아파. 너무 아파. 베갯잎은 금세 눈물로 젖어들어갔다. 화평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괜찮아…. 괜찮아질거야……. 끙끙거리는 신음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통은 심했다. 눈이 불타는 것 같이 뜨거웠다. 그러나 평소에도 잠귀가 얇았던 최윤은 뒤척이는 옆사람에 눈을 뜨고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윤화평씨, 무슨 일이에요! 최윤이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오른쪽 눈을 잔뜩 쥐고 있는 두 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최윤……. 나, 너무 아퍼. 눈, 눈이…, 타들어갈 것 같아……. 그러자 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윤화평씨 손, 손 좀 내려봐요. 윤이 화평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지만 화평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밀쳐냈다. 안돼. 만지지마. 아파. 아프단 말이야! 화평은 점점 뒤로 물러나며 파들파들 떨었다. 최윤은 마찬가지로 떨리는 손으로 화평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윤화평씨, 제발요…….”
“…나 추워. 최윤, 나 너무 추워…….”
몸이 너무 차가워. 눈이 너무 아파. 나 어떻게 해…. 나, 어떡해…. 최윤, 윤아. 나 좀, 나, 싫어. 죽고싶지 않아. 살려줘…. 최윤, 나 좀 살려줘……. 화평이 그의 품속에서 흐느꼈다. 동공이 불안정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최윤은 불안했다. 화평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실렸다. 괜찮아요. 괜찮아. 당신 안죽어. 윤화평 안죽는다고. 귓가에 들리는 단단한 목소리에 화평은 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 제발…. 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구 휘적이는 화평의 팔을 잡아 품에 가둔다. 그를 안은 팔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화평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불안함 해소를 위해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펑펑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 괴로워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주님, 제발 이 불쌍한 영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최윤은 울었다. 우는 화평을 달래며 울었다.
새벽에 한바탕 난리를 치른 화평은 결국 그의 품속에서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쌕쌕 고른 숨을 뱉는 화평에 윤은 그제야 안심 어린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화평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화평의 심장 고동을 들어야만 했다. 최윤은 그의 고동을 확인하고 온기에 안심한다. 눈의 통증을 느꼈다면 분명 화평은 그날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짙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이렇게 아팠구나. 끝없이 고통스러웠구나. 최윤은 입술을 짓이겼다. 그 사이 서서히 떠오른 태양은 여트막하게 그들을 비췄다. 어째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습니까. 왜, 나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아니, 당신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숨이 턱턱 막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악감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올라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윤은 그것을 토해낼 수가 없어 화평을 끌어안으며 소리를 죽였다.
윤의 직감이 맞았다. 화평의 기억은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화평은 자신을 안고 있는 윤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눈이 퉁퉁 부어있는 얼굴. 최윤? 너, 괜찮은거야? 강형사님은? 어? 박일도는! 화평의 윤의 양 어깨르 붙잡고 흔들었다. …다들 무사해요. 입속에서 여러 번 헤맨 뒤에야 나온 대답. 밤새 울음을 토한 탓에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화평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너네 잘못됐으면 나 진짜……. 작은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다 번쩍 화평의 얼굴이 들어졌다. 근데, 나 어떻게……?
윤화평은 멍한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그의 물음 뒤에 차분히 수첩 하나를 건넨 최윤 덕분에. 어제의 자신이 직접 적어놓은, 모든 이야기들이 담긴 것을. 얼떨결에 받아 든 화평은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첫 장을 읽은 그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두 번째 장을 넘겼다. 뒤로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다 멈칫, 화평의 손이 목적지를 잃었다. 2018년 ●월 ●●일. 박일도는 없다. 아니, 어쩌면 동쪽 바다 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건 이제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내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내 옆을 지켜준 사람들이다. 최윤이랑 강형사님. 그들은 잊어버리지 마. 잊었어도 다시 기억해 내. 그들이 널 위해 어디까지 했는지. 그리고,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줄 한줄 찬찬히 눈으로 담아낸 화평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가장 마지막 장까지 다다른 화평은 그제야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이게, 다 무슨 말이야. 그날 이후로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기억을 잃었다고. 얼이 빠진 얼굴로 묻자 최윤은 가만히 끄덕였다.
“이해가 안 되잖아. 난 여기 그대로 있는데….”
“…….”
“봐바, 여기 내 팔에 상처도 있는…….”
자신있게 소매를 걷은 화평이 말을 흐렸다.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 방금 막 생겨서 피딱지가 앉아있고 막 그래야 하는데. 옅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는다. 흉만 있네. 보기 싫게 흉만 졌어. 그러자 최윤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보기 싫지 않아요. 울퉁불퉁 튀어 나와있는 흉터 위를 손으로 쓸었다. 화평이 후두둑 눈물을 쏟아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작은 방울들이 서로를 끌어당겼다. 정말, 정말이구나. 나만 빼고 다 흘러가버렸어. 나만 여기 두고. 허공을 떠도는 기분이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내가 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이다. 벌써 흘러갔음에도 멍청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의 눈물진 중얼거림에 최윤은 그의 손목 위로 입술을 눌렀다.
“그러니까 난 기억을 잃고 있고, 하루가 가기 전에 여기에 일과를 남긴다고….”
화평은 제 손에 들린 수첩을 펄럭이며 말했다. 끄덕임으로 돌아오는 대답. 그럼, 여태껏 있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진거야? 모두? 네.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단호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화평은 맥이 빠졌다. 그럼 넌. 그의 시선이 윤에게 향했다. 너는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겠네. 그 말에 또 끄덕인다. 화평은 윤에게 등을 긷고는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동안 나는 어땠어?
“그동안 종종 강형사님도 뵙고, 평범한 하루를 보냈어요. …윤화평씨는 평화로웠고, 때로는 너무 나태로웠고, 매 순간 아름다웠습니다.”
얌전히 듣던 화평은 실없이 웃었다. 최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신부님이 그렇게 입바른 소리 하면 안돼 임마. 그에 최윤은 턱을 내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진심입니다. 당신과 함께한 날들이 너무나 소중해서…. 윤의 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제 입을 막은 연인의 입술 탓에. 한동안 입을 맞춘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화평은 그에게서 떨어지고는 목에 팔을 둘렀다. 미안해. 화평이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뭐가요? 그 기억 속에 혼자 남겨둬서. 최윤은 너그러히 미소를 그렸다.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박동이 울린다.
화평에게 차도는 없었다.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최윤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에게 더 이상의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게다가 이렇게 보고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를 무너지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죽여 울고있는 화평의 옆에서, 그저 적당한 위로의 거리를 두고 앉아있을 수밖에. 이것만으로도 당신에게 힘이 되기를 빌어볼 수밖에.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울음에 가득 찬 중얼거림이 윤의 가슴을 때린다. 거짓말 하지마. 우리 아부지가 왜 죽어. 며칠 전에 나랑 전화도 했는데, 갑자기 왜 죽어! 화평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믿지 못했다. 눈앞에 자기 아버지의 유골이 있는데도 믿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믿어. 아부지가 왜…! 최윤은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화평. 그의 옆에서 최윤은 조용히 두 손을 맞잡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찌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최윤은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 더 나빠지겠지. 아마도 나와 강형사님까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이미 화평의 증세를 알게 됐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하느님, 아무리 저에게 내려진 벌이라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 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자비의 빛을 내려주시기를…. 최윤은 고개를 들어 화평을 돌아봤다. 당신이 앞으로도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