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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격

 

아네모네, 속절없는 사랑

written by. 누으리

 

 

 

 

 

 

 

 

 

최 윤은 "윤 화평"을 사랑했음에도, 의심을 이기지 못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과연 나는 그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

 

 

최 윤은 밤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어째서 끝까지 믿어주지 않았는지를. 뭐가 그렇게 두려워 그를 의심해야만 했는지를.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사랑만으로는 그를 믿는 것이 불가능 했던 모양이다. 언제나 의심과 애정 사이에서 저울질 하듯이 그 순간에는 의심으로 저울이 기울었던 것이 아닐까. 최 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화평을 떠나보내고 나서 윤은 한 달 내내 악몽을 꾸었다. 화평이 몸을 던져 없앴던 박일도가 나타나 윤을 괴롭히기도 했고, 물에 젖은 화평이 나타나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대체로 그 두개의 꿈이 번갈아 나타났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 일어날 때면 윤은 속 끝에서 끌어올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한 달 동안이나 꿨는데 익숙해지지를 않네. 갈라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밀어내며 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아침을 시작했다. 햇빛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창문가에 가 커튼을 걷었다. 방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통에 윤은 암막 커튼을 달아야만 했다. 화평의 죽음 이후로 윤에게 찾아온 이상점이었다. 코가 시큰거렸다. 윤은 코끝을 쓸며 걸음을 옮겼다.

 

윤이 아직까지도 살고 있는 집은 혼자 생활을 하기에는 넓은 집이었다. 방도 세 개였고, 항상 혼자서 밥을 먹는 식탁은 지나치게 황량했다. 간소하게 꺼내놓은 반찬 그릇들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혼자라 거하게 차려먹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콩자반을 내려놓고서 윤은 멍하니 멈추어 섰다. 맞은편에 화평이 앉아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빈자리가 문득문득 느껴질 때마다 윤은 뜨거운 것이 울컥거리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화평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억들은 특별한 때에 찾아오는 것들이 아니었다. 집을 나설 때 그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던 곳을 마주칠 때나 어쩌다 택시를 타야할 때, 불쑥 튀어나왔다. 스치는 바닷바람에서 짠기가 묻어나듯이 자연스럽게 몸에 기억이 배어들었다. 나오는 것은 울음소리일까 아니면 고통에 찬 신음소리일까. 윤은 그걸 알아챌 새도 없이 목젖 아래로 삼켜버리고서 반찬의 뚜껑을 닫았다.

 

순전히 내 탓으로 그를 잃었는데 대체 무슨 염치로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건지. 마음에서 짜낼 것도 없이 버석하게 말라 버렸으면 좋을 텐데. 화평이라면 무슨 바보 같은 변명이냐고 핀잔을 줄지도 몰랐다. 아니면 지나치게 책임감이 많은 사람이니 입술만 꾹 깨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이니 전자가 아닐까. 그는 누군가의 고통까지 짊어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세상에 존재하는 죄인은 박일도와 자신밖에 없다는 듯이 굴고 말이다. 나는 그걸 알았는데도. 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의무적으로 먹는 식사인것은 맞지만 도저히 밥맛이 돌지 않았다.

 

세 끼를 모두 굶은 윤은 그 날 밤에도 꿈을 꾸었다.

 

온통 영롱한 색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윤은 눈을 떴다. 꼭 빛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저절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끌어당기듯 몸은 아주 자연스레 향했다. 윤은 잠시나마 자신이 천국에라도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천국이라기엔 너무 휑했으며 천사가 부는 뿔피리도 없었다. 머무를 데 없이 움직이던 발이 멈춰 섰다. 윤은 고개를 올려 위를 보았다.

 

공중에 떠 있는 권좌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나는 이를 만나기 위해 꿈을 꾼 것이구나. 윤은 어림짐작했다. 윤이 본 그, 혹은 그녀, 그것은 단 한 순간도 모습을 유지하지 아니하였다. 윤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바뀌는 모습에 더 이상의 정의를 내리는 일을 포기했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왔구나, 나의 아들아.

 

소리는 귀를 통해 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오르듯이 문장이 피어났다. 그것이 말을 거는 것처럼, 윤은 대답을 떠올렸다.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윤은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리라 짐작했다. 그의 감정이 자연스레 전해져왔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질문을 하지 않고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종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꿈 치고는 너무나 구체적이었으며 그녀의 목소리는 기억 속에 깊숙이 새겨지고 대못처럼 박혀 들어왔다. 변화무쌍하게 정체를 바꾸는 그 분은 자신이 왜 너를 불렀는지 아느냐 물었다. 윤은 그것까진 알 수 없기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있는 당신의 종에게 말씀해주시지요.

 

나는 너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찾아왔다.

 

그렇습니까.

 

윤은 수긍했다. 적어도 신이 자신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찾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죄목을 읊기 시작했다.

 

첫 째, 너는 나에게 몸을 봉헌한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속인의 몸을 탐했다.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두 번째, 신을 따르는 자이면서도 함부로 타인을 의심한 죄.

윤은 두 번째의 죄도 인정했다.

 

그리고 마지막, 내가 아끼는 것을 상하게 만든 죄이다.

 

저의 죄를 모두 인정합니다.

 

그는 정말로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의 죽음을 지나와서야 알게 된 이야기에 윤은 가슴 한 구석이 빠듯해져왔다.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이 세 가지의 죄를 물어 나는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기꺼이 받겠습니다.

 

윤은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자신의 종에게 선고를 내렸다.

 

감히 꿈을 꿀 수도 없는 영생의 삶을 너에게 주겠다. 그 동안의 너에게는 병마도, 사고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신은 너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 할 것이다. 이제 너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겠지. 얼핏 들으면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머리위에서 이죽거리고 웃는 낌새에 윤은 그에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묻고 싶었다.

 

네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윤 화평을 만날 수도 있겠지.

 

그 말에 윤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허나, 너는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왜 입니까. 윤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입니까. 왜 제가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냥 영원을 사는 걸 벌로 내릴 리가 없지 않느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만약, 만약. 제가 그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윤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실렸다.

 

그렇게 되면, 윤 화평은 죽는다.

 

덜컥 몸이 내려앉았다. 신을 배알하는 윤의 눈동자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게 저에게 내려진 벌이란 말입니까. 아예 못 만나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내가 생각하는 너의 죄에 대한 벌은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구나. 역시나 빛으로 짠 것만 같은 옷을 휘두르며 그는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살아보려무나. 마지막 말이 울려오는 동시에 윤은 번쩍 눈을 떴다.

 

윤은 기분 나쁜 꿈이라고 생각하며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상상력이 부족한 그에게 그런 꿈이 과연 가당키나 한 걸까. 윤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에게는 영원을 살아낼 자신도 없었거니와, 다시 화평을 만나 사랑을 하지 않을 재간조차 없었다. 윤은 땀을 흘려 찝찝함에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탁상시곌 보았다.

 

새벽 3시 밖에 안 되었다니. 꿈속에서 하루는 흐른 기분이었는데.

 

윤은 다시 자리에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꿈이다. 그저 꿈일 것이다. 잊어버리자. 몇 번이고 되 뇌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며칠 뒤 꿈을 꿨던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최 윤이 다시 이상함을 느낀 것은 오랜만에 길영과의 만남에서였다.

 

야, 너는 사십대가 되었는데도 얼굴이 그대로냐. 재수 없게.

 

길영의 말에 윤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길영을 바라보았다. 길영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조금 생겼는데도 자신의 얼굴에 주름은커녕 오히려 더 어려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땅히 생겨야 할 것이 생기지 않는다.

 

뭐야, 왜 그렇게 충격 받은 표정을 지어. 너도 놀랍냐?

 

정말로 소름이 돋는 일은 7년 전에 꾼 꿈의 기억이 한 치의 빠짐도 없이 불현듯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사실이었다. 윤은 눈앞이 조금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걸 거다.

 

정말로 그렇게 넘어가고만 싶었다.

 

 

* * *

 

 

윤은 어느 기점부터 성당에 나갈 수 없었다. 자신의 모습이 세월의 흐름을 피하지 못 한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달랐기에. 윤은 자신이 예전에 알던 그 누군가와도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이 이해를 하지 못 할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성당에 나가질 못하니 자연스레 신부의 보직은 그만두어야 할 테고. 근근이 들어오는 생활유지비 역시 끊길 텐데. 윤은 노신부가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앉아 있곤 하던 푹 꺼진 소파에 앉아 고심했다. 월세는 어떡하지. 그래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굶어죽을 일은 없다는 것 아닐까. 몸 하나 뉘일 데가 없어진다는 게 문제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늙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건 합당한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영원에 가까운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그가 원하던 벌이리라. 어떻게 절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윤은 두 손으로 성마른 얼굴을 감쌌다. 말 그대로 미칠 것만 같았다. 갑자기 불멸자가 되었다니. 자기뿐만 아니라 누가 겪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화평이 겪어도 마냥 능글맞게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리라 짐작했다. 언젠가 영겁의 시간을 넘어 화평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이야. 윤은 자신에게 밀려오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버거웠다.

 

오직 윤을 버티게 하는 단 하나,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다음 생의 화평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가까이 갈 수도 없을 터였지만 말이다.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윤 화평을 사랑하게 되면 그가 죽는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못 다한 사랑을 하고서 보내버렸던 당신을 내가.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화평을 생각하면 목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죄여드는 것만 같았다. 피가 들끓고 온몸이 시뻘개질 정도로 열이 올라왔다. 윤은 갑자기 피가 역류하는 사람처럼 거칠게 꺼억꺼억 숨을 쉬었다. 꼭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타는 듯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 고통 속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안해서, 미안해서 어떡하지.

 

윤의 눈에서 바닥으로 한 두 방울씩 물방울들이 뛰어내려왔다. 툭, 투둑 소릴 내면서 떨어져 내린 것들이 목재바닥을 진하게 물들였다. 모든 걸 알면서도 화평을 만나면 사랑할 자신을 생각하니 윤은 차라리 제 머리가 펑하고 터져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좁은 방안에서 고개를 치켜들고서 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물 때문에 빛이 산란되어 들어오는 눈동자에 창문이 비쳤다.

 

만약, 내가 지금 여기서 뛰어내려 버린다면. 그래도 나는 죽지 않는 건가? 윤은 천천히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창가로 향했다. 삐이걱, 찌그덕. 오래된 나무 판자가 들떴다가 내려앉는 찌걱거리는 소리만이 살아 움직였다.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창문 잠금 장치를 풀고 윤은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밀려나갔다. 여린 살결을 베어낼듯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앞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었다. 윤은 별로 높지 않은 건물의 높이를 가늠했다. 기껏해야 다리 하나 부러질 정도였다.

 

윤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옆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여기서 죽어 화평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이 두려움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눈만 딱 감으면 되는데. 윤은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겁을 집어 먹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일 거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화평은 왜 몸에 칼로 진경을 새기고 저 바다 아래까지 들어가려 들었을까.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나에 대한 배신감도 한 몫을 했겠지. 아니 과연 나를 원망하기나 했을까. 내가 그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뒤에서 바람이 윤의 등을 거세게 떠밀었다.

 

 

* * *

 

 

윤은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아까 전, 파묻혀 있었던 소파에 멀쩡히 앉아있는 몸뚱어리에 윤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꼭 시간이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윤은 아까 열어놓았었던 창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고서 자신이 추측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윤이 죽음을 시도하려는 찰나에 시간은 앞으로 되돌아가 윤을 안락한 소파에 앉혀두었다.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말과 같았다. 신께선 잔인도하시지. 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가만히 앉아있는 일을 선택했다.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잠에 들어 꿈을 꾸게 되면 몇 년 전의 그 날처럼 찾아와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어차피 잠을 자지 않아도 죽지 않을 텐데. 윤은 괘종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에게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은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문장이 되었다.

 

아마도 그는 다른 인간에게는 영원에 가까울 시간을 보내며 누구보다 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되리라. 신의 영역에 가까워진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이게 축복일지도 모르지만.

 

윤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한 벌이었다.

 

 

* * *

 

 

항상 비가 내리면, 그걸 그대로 맞는 미친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생긴 건 멀끔히 생겼다든데.

 

■■은 동네 아지매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이런 촌구석에도 별 놈이 다 있구나 싶었다. 아니, 오히려 산동네라 그런 놈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추장 만치 시뻘겋고 녹이 슨 자전거를 타고 가며 ■■은 그 미친 남자가 살고 있다는 집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가 사는 집은 산동네에 있는 집 치고는 도시에 있는 것 마냥 제법 잘 사는 태가 났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

 

꼭 그 남자의 집만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건만, 산동네 사람들은 남자의 집을 그렇게 불렀다. ■■은 슬쩍 자전거를 그 옆집에다가 대었다. 저도 이곳에서 산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비가 오는 날엔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이라곤 눈꼽만큼 조차도 안 해서 그럴지도 몰랐다. 설마 비 오는 날에만 나오는 걸까. 큼큼 헛기침 소리를 내며 담 너머를 옆 눈질을 하며 쳐다보았다. 덜컹. 쇠로 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 기겁하며 몸을 숙였다. 이렇게 타이밍이 좋을 줄이야. ■■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서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으악!”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는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 남자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거 아니야? ■■은 저보다 한 마디는 높이 있는 얼굴을 보며 과연 멀끔하게 생기기는 생겼구나 생각했다. 멀끔하다 뿐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잘생겼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들 비에 푹 젖은 모습만 봐서 그렇게 말하는 거였나.

 

“뭘 그리 빤히 쳐다보세요.”

 

이 남자는 얼굴과 비례하게 싸가지는 없었다.

 

서늘한 느낌의 얼굴을 하고서 제 면면을 샅샅이 보는 시선에 ■■은 의문을 품었다. 누구보다 무정한 얼굴을 한 주제에, 그의 눈만큼은 그리움이 가득했다. 누가 눈이 마음이 창이라 했던가 하는 말은 왜 지금 떠오르는지. 꼭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애상에 젖어 있는 듯해 보였다. 그를 처음 보는 자신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진한 감정이었다. 그 모습에 ■■은 그에게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 같은 구닥다리 작업멘트를 던지고 싶어졌다.

 

 

“거 형씨,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제 이름 말씀이십니까.”

 

 

이름을 물어볼지는 몰랐는지 눈이 커다래지며 이채가 돌았다. 그러자 제법 사람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놓았다.

 

 

“아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그렇게 갑자기 쌩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집에 들어가 버리는 남자의 모습에 ■■는 기가 찼다. 담장 너머에 혼자 남겨진 ■■은 어이없다는 듯이 숨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나 사연 있어요 하는 얼굴로 저렇게 가버리면 신경을 꺼줄 거라고 생각하나? 진심인가? ■■은 모래 바닥을 신발 코끝으로 팍팍 파대며 괜한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 내가 신경 꺼준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것도 못 들어주랴. ■■은 빨간 벽돌집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만나기전까지는 보이지도 않았던 그 남자가 이상하게도 자신의 시야에 자꾸만 들어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은 어이가 없었다. 이름도 물어보지 말래놓고 자꾸만 제 주위를 맴도는 건 무슨 경우라고 해야 하나. 그래놓고서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그 얇은 몸을 파드득 떨며 멀어져가는 꼴이 우스웠다. 의식하니 보이는 건지, 아니면 저 양반이 그냥 재주가 없는 건지.

 

 

“어이~ 윤씨~ 손님 점 보러 오셨네!”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던 ■■를 옆집의 한 씨가 불러 세웠다. 예~ 곧 가겠습니다~ 하고 외치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은 쌩하니 지나가며 미처 피하지 못 한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합니까. 왜 관심도 가지지 말래놓고 자꾸 관심이 가게 합니까. 고통에 차 있는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제 가슴 한 구석을 쿡쿡 찔러대었다.

 

자꾸 잡생각이 드니 오늘 일은 텄네. 텄어.

 

■■은 손님을 보내고 나서 빨간 벽돌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계신 거 다 아니까 빨리 나와요 하고 으름장을 부렸다. 소심하게 열리는 모양새에 ■■은 큭큭거리고 웃었다. 첫 만남 때는 그렇게 온갖 성질은 다 있는 척, 강짜 있는 것처럼 굴더니만.

 

 

“돌아가 주세요.”

 

“그럼 내 눈에 띄지나 말던가.”

 

이 무슨 옛날 옛적 멘트인지. ■■는 문가에 기대서서 자신을 내려보다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제가 눈에 띄어도 못 본 척 하시란 말입니다.”

 

“장난해요? 어떻게 보이는 걸 안 본 척해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피해야 할 일 아닌가?”

 

“그렇게 보이는 걸 못 본 척을 못하셔서 무당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네가 어쩔건데. 내가 내 눈 안 보이게 해주게?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이딴 식으로 말을 내뱉을 거면, 왜 그때 안타깝다는 눈을 했어. ■■은 울컥거리고 올라오는 화를 애써 삭혔다. 야. ■■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렸다. 엮이기 싫으면 엮이려고 애쓰지를 마. 사람 짜증나게 하지 말고. 어중간한 태도로 굴면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은 그 말을 하고서 남자의 몸을 뒤로 밀쳐냈다.

 

“나도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요. 모르는 척도 하기 싫고.”

 

모순적인 문장에 ■■는 남자가 하고 있는 생각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는 척 하고 싶지 않다면서 모른척하고 싶지 않다니. 무슨 수수께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뭐가 당신 진심인데?”

 

어쨌거나 둘 중에 하나가 본심일게 아닌가. ■■의 말에 남자는 처음 자신이 이름을 물었을 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꼭 살아있는 사람 같네. ■■은 제 본심을 말하고서 두터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 이름은 마태오입니다.”

 

“아아니, 누가 세례명 물어봤나.”

 

“그냥 앞으로 마태오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니까 아는 척 하라는 거지. 대충 말뜻을 넘겨짚은 ■■는 시원하리만치 웃으며 마태오의 손을 잡았다. 이제야 속이 좀 편하네. 그쵸? ■■의 말에 마태오는 네, 하고 대답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의 미소가 서글픈 것도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 * *

 

 

최 윤이 처음 보게 된 <윤 화평>의 환생은 뱀이었다.

 

집 근처 작은 동산을 오르다 까만 눈과 마주한 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모습으로 환생을 한다는 말은 분명하게 하지 않았던가. 윤은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작고 얇은 뱀을 손에 안아 들었다. 쉿쉿 거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뱀은 윤의 손을 깨물었다. 아주 잠깐 따끔했지만 크게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아 윤은 가만히 뱀의 작은 머리를 검지로 문질렀다. 윤이 태연하게 자신을 만져오자 오히려 뱀이 당황한 듯 고갤 수그렸다. 그 모양새가 제법 귀여워 윤은 작게 웃음소릴 내었다.

 

한참을 작은 뱀을 쳐다보다 불현 듯 그를 사랑하지 말라던 공허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윤은 화들짝 놀라며 뱀을 낙엽위에 올려두었다. 뱀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멀어져가는 걸 지켜보며 윤은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설마, 단순한 호감조차 사랑이라 치지는 않겠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윤은 화평의 영혼이 다시 새로운 몸을 찾는 여정을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을 가리었다.

 

그 다음에 만나게 된 화평의 모습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성이었다. 희게 샌 머리칼을 틀어 올린 화평은 앞에 선 자신을 보고서 저승사자라 부르며 혼비백산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윤이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에겐 목숨을 앗아갈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미안해요. 쪼글쪼글해진 손을 잡고 윤은 미리 사과를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기억하지 못 할 테지만. 나는 어떤 모습이어도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나 봐요. 아직도 윤 화평이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멈춰있는 것만 같았던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데.

 

세 번째, 네 번째의 화평을 떠나보내며 윤의 마음속에 음습한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고개를 치켜들 듯 그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어차피 그는 죽어서 모를 텐데 내가 계속 그를 사랑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 생각을 하고난 윤은 자기 자신을 죽일 수만 있다면 죽이고 싶어졌다. 그러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제 몸에 주고 싶어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일정한 고통 이상이 되면 어김없이 시간이 되돌아갔다.

 

생전에도, 다시 시작된 생에서도 당신을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나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화평을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박일도라는 존재였을 테니까. 끝내는 동귀어진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더 이상 목숨이 의미 있는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윤은 자신의 긴 생애를 베어내어 그 때의 화평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삶을 연장 시키는 것은 그에게 벌이나 마찬가지였겠지. 윤은 박일도가 사라진 뒤의 화평의 삶이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윤은 그때와 같이 창가에 가만히 앉아 이번의 화평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마을에서 ■■라고 불리는 모양이었지만, 윤에게 그는 화평이었다. 그의 영혼의 색이 화평과 같은 이상은.

 

수많은 화평을 떠나보내며 변화도 있었다.

 

윤을 만나고 나서 죽음의 유예가 조금씩 길어진다는 것. 이번은 6번째니까, 6-7일 정도가 될 것이다. 윤은 달력에 체크해 둔 엑스 표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이것도 신이 주는 벌이겠지만 화평은 항상 윤의 가까이에 나타났다. 언제 나타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가 곁에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하려는 듯이. 아직도 포기를 못했느냐, 욕심을 버리지 못했느냐 하는 신의 음성이 윤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를 피해서 산으로 들어가든, 바다로 도망가든, 신은 항상 윤의 주위에 있었다.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를 통해서 대체 무엇을 보려고 하시는지.

 

윤은 매번 화평의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를 밀어낼 줄 밖에 모르고, 거짓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마음을 속였다. 그의 바보 같음을 비웃듯이 화평은 자신의 속내를 파헤쳐 내었다. 윤은 창문에 투둑거리는 소릴 내며 묻은 빗방울에 밖에 있는 화평이 우산은 챙겨왔을까 걱정부터 들었다. 곧 세차게 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이 어두웠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윤은 느리게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문을 열어주자 뭘 하다 이제 열어 주냐며 뻔뻔스럽게 화평이 집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비가 쏟아질 거 같아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도 되죠? 윤은 그렇게 하라며 등을 돌렸다.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네. 긴 복도를 걷던 윤은 멈칫했다.

 

그냥, 감기에요.

 

아주 오래전에 했던 말인데도. 윤은 순간 자신이 그 전의 집에 있다고 착각했다. 목소리도, 생긴 것조차 같지 않은데. 아프면 꿀물이라도 타 줄까요? 집에 꿀 있어요? 없습니다, 머리 울리니까 바로 옆에서 크게 말하지 말아요. 그럼 우산 좀 빌려줘요. 우리 집에서 가져오게. 화평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윤이 화평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그냥. 그냥, 여기 있어주세요. 윤이 물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자 화평은 그러겠노라며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냉장고에 어떻게 아무 것도 없어. 그 말은 그전에 내가 했었는데. 화평은 냉장고를 열어 텅 빈 냉장 칸을 보고서 혀를 찼다. 찬장을 열자, 버석하게 말린 꽃잎이 담긴 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꽃차에요?

 

화평이 묻자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도 우릴까. 화평은 조그만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탁 탁 탁. 가스가 주입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비 안 맞으러 나가시나. 와전된 소문일수도 있지. 어쩌다 비 맞는 걸 보고 사람들이 꾸며낸 얘기일지도 모르니까.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요.

 

실내에 있는데도 화평은 윤이 꼭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나보고 여기에 있어달라고 했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기어코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화평은 당황하며 허둥지둥 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시간이 없다니. 어디 아파요? 윤은 화평의 뜨뜻미지근한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시간이 많아요. 아주 많아요. 화평의 손바닥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며 윤은 흐느꼈다. 그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삐이이익. 주전자가 성을 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화평이 손을 빼내려 비틀자 윤은 놔주었다.

 

화평은 잘 말린 국화꽃을 잔에 담아 뜨거운 물을 부었다. 테이블에 잔을 두 개를 올려놓고서 윤이 잔을 들기를 기다렸다. 밖에서는 거세게 비가 퍼붓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 좋겠어요.

 

긴 침묵 끝에 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화평은 기가 찼다. 저기 우리 만난 지 3일 조금 넘었거든요. 마태오씨. 내가 당신의 뭘 보고 죽여야 합니까? 그리고 나는 사람 안 죽여요.

 

그럼 제가 사람이 아니라면요. 당신이 나 때문에 죽는다면요. 그래도 나를 살려둘 건가요.

 

네.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싫어요. 윤 화평씨.

 

무슨 헛소리에요. 대체. 그리고 내 이름은 윤 화평이 아니라.

 

화평은 윤 화평이라는 이름에 기시감을 느꼈다. 꼭 누군가 수없이 자신을 그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았다. 뒤에 감춰놓은 거대한 비밀을 누설하듯이 윤의 얼굴은 젖어있었지만 비장했다. 당신, 대체 뭡니까. 그때서야 화평은 윤에게서 인간과는 다른 위화감이 느껴진다고는 걸 알아챘다. 이제 그의 모습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때 힘을 빌리곤 하는 신에 가까운 신령과도 같은 존재에 가까워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의 힘은 막강하여 인세의 균형을 위해 실재할 수 없었다. 윤의 존재는,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떤 정신 나간 신이 이런 존재를 만들어낼 수가 있지. 신이 행하는 일에는 뭐든지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인간과 같이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 할 뿐. 그 뜻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간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나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할 수 있어요. 당신이 그러했듯이. 그런데 당신을 사랑하는 일만큼은 그만둘 수가 없어요. 왜 일까요. 그것만큼은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어요. 이건 일종의 미련이기도 하겠지요. 내가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아요. 아주 오래되고 케케묵은 과거의 감정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당신을 윤 화평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여기니까 어쩌면 당신이 윤 화평이 되는 걸지도 모르죠.

 

그는 정말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용서해달라고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도 내 죄는 쌓이고 있는걸요. 당신을 죽게 만든 건 나였으니까. 이제 내 사랑은 죄가 되었어요. 아주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죄 가요. 이런 내가 감히 나를 사랑해 달라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고 싶어요. 아니,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내 존재는 지워져도 좋으니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내 사랑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도 좋으니까.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이네.”

 

화평은 찻잔을 눈물로 채우고 있는 윤을 보고서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요. 윤이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어떡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웃는 일 뿐인걸.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아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나. 뭐든 자기가 해결하려고 뛰어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하, 화평이 자신의 머릴 헤집었다. 나는 완벽하게 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다르게 자라오기도 했을 테지만. 당신이 이렇게 미안해하는 걸 보면 곱게 죽지는 못한 모양이고.

 

내 죽음에 당신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겠지. 우리는 연인이었어? 네. 얼굴이 잘생기긴 했지만 싸가지 없는 사람은 취향이 아닌데. 그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털어놓을 생각을 했어요. 그 전의 나한테도 털어놓았나. 당신이 처음이에요. 과거의 당신과 직업이 비슷한 사람은 지금의 당신이니까.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틀 후면 당신은 없을 테지만. 윤은 벌써부터 비어있을 화평의 자리를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화평은 거의 다 식은 국화차를 냉큼 비웠다.

 

 

“나는 당신이 완벽하게 나를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뇨, 당신이 죽는 건 내가 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어째서? 그냥 당신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일지도 모르잖아.”

 

“저도 바보가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거 같은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마세요.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니까. 고작 벌을 주기위해서 그런 것에 손댈 수는 없어. 나는 그저 죽을 운명이었고, 당신은 속은 것에 불과할거야. 어쩌면 당신의 신께서는 그저 보여주시는 것일지도 모르지. 내기해도 좋아. 물론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다음생의 나로 하자.

 

 

“단순히 저를 위로하기 위한 말을 하는 건 아닙니까?”

 

“그렇게만 받아들이고 싶으면 그렇게 해. 지금의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그런 말을 하겠어?”

 

 

지금의 당신은 자신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고 믿고 싶을 뿐이야. 물론 그 마음은 사랑이지만 동시에 오만이지. 나를 봐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게 보여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어. 당신은 나의 행복만을 바라고 있지만, 그 속에 자신도 있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 자기 속도 모르고 울고만 있으니. 그런 미숙한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니 나도 참 중증인가 봐.

 

 

“그렇지 않아? 최 윤.”

 

“방금 뭐라고,”

 

“최 윤 이라고 불렀어.”

 

“장난은... 그만하세요.”

 

 

화평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윤은 눈앞이 흐려졌다. 당신이 내 이름을 알 리가 없어.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당신의 손으로. 이 지옥 속에서 나를 구해줘요. 나를 만나면 죽는 것도 모자라, 이제 기억까지 찾게 된다면. 난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윤의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고서 화평은 그의 머리를 슬며시 안아주었다.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최 윤.

 

언제나 못 견딜 만큼 당신을 사랑해요.

 

윤은 화평의 안락한 품에서 흐느꼈다. 신의 앞에서도 쉽사리 접히지 않았던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당신을 만나고 내 세상이 무너졌다가 다시 재창조되었는데. 그 세상에 당신이 없어요. 윤 화평 씨. 나를 두고 가지 말아줘요. 제발.

 

화평은 물기 없이 메마른 웃음소릴 내었다. 나는 널 버린 적 없어. 윤아. 알고는 있어. 하도 눈물을 흘려 짓무른 윤의 눈가를 문질러주었다. 조심조심 문지르는 행동에 윤은 화평의 허벅지에 제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숨기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더 이상 죽음을 맞지 않을 나를 기다리면서 너는 망가지겠지. 깨부수어지고 구성되는 걸 반복할거야. 엉망으로 망가지고 이어 붙여진 너는, 어쩌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지도 몰라. 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걸 책망하려 하는 말이 아니야. 우린 고작 인간이잖아. 신이 되기에는 한참 모자란. 그런 우리가 모든 일을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모든 것을 잊고 나서도, 반복되는 생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 때 나를 믿어주기만 하면 돼. 나를 믿어줘. 이미 사랑한 감정은 풍화되어 먼지처럼 날아간대도. 네가 사랑하지 않는대도. 믿어줘. 그거면 돼.

 

그러면 그때는 내가 너를 사랑할게.

 

화평의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아래로 굴러 떨어져 윤의 입술을 적셨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으려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윤은 눈을 꾹 감고서 화평의 손을 잡았다.

 

그럴게요. 내가 잊어도 당신은 나를 사랑해줘요. 그러면 나도 당신을 다시 사랑할 테니.

 

두 사람의 맹세 이후, 3일 뒤에 윤은 또 다시 마을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김없이 피어난 붉은 색의 꽃 한 송이를 꺾어 유리병에 담은 후에.

 

 

* * *

 

 

촛불로만 밝혀둔 방안에 새까만 셔츠를 입은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방 안에 있는 색이 다 바래진 두꺼운 셔츠를 걸친 남자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시비조나 마찬가지인 말투로 말했다.

 

"거 쎈 사람들 실력 좀 봅시다."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지독한 생의 반복 끝에 찾아온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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