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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다. 정확히 언제부터 꾸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화평은 이따금 같은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었다. 대체로 이렇게 꿈을 꾸면, 긴 이야기의 부분이라고 하던데, 화평의 꿈은 비슷한 이야기의 연장선도 아니었다. 하나의 꿈을 다시 꾸는, 반복되는 레퍼토리의 연속이었다. 꿈의 발화점을 모르니 당연히 해결책도 없었다. 우울증의 한 종류일까, 라고 화평은 생각했다. 꿈을 꾸고 나면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유난히 화평은 심적으로 많이 지쳤다. 하루를 망치기 좋은 원인이 꿈이었다. 꿈에서 재 몸속에 있는 큰 귀신이 질기게도 살아나 화평을 옭아맨다. 화평의 사지를 단단히 묶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감각은 꿈에서 깨어나도 생경하게 남아있어 마치 꿈 속이 현실이 아닐까 라는 착각을 준다. 몇 십년동안 해멨던 그 귀신을, 이제는 없고 사라진 이 현실에서, 아직도 그 귀신이 판을 치고 다니는 것과도 같은 착각을 준다. 귀신은, 화평의 숨통을 조이고 발버둥을 치게 만들어 화평이 겪는 고통을 바라보고, 비웃는다. 끝난 줄 알았던 운명의 굴레는 애당초 끊어지지 않았던 걸까. 제 몸에 새긴 팔문진경은 소용없는 구실이었던가. 화평은 조금씩 조금씩, 우울의 숙주가 되어 제 몸을 갉아 먹도록 내어준다.

 

식은땀으로 인해 윗옷이 반 이상이나 젖었다. 누가보면 여름의 중간이라고 느끼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바깥 날씨는 살결을 뚫는 추위가 한창이다. 화평은 한숨을 내뱉었다. 난방을 틀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독한 이 악몽에 시달려서 인지는 도무지 알 턱이 없다. 화평은 고개를 돌려 비어있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있었는 흔적을 남겨주듯, 시트에 구김새가 있었다. 손을 올려 온기를 느껴보았다. 자리에서 벗어난 지 좀 된 듯, 온기는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시계는 고작 오전 5시 10분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모두가 잠에 한창일 이 시간에, 참 바쁜 사람이기도 했다. 저의 바쁜 연인에게 섭섭함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를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사람이다. 그 속내가 검게 그을려졌든, 살인귀에 뒤집혀 혈을 즐기는 것은, 지금의 화평으로썬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화평도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귀신 하나 잡겠다고 현직 국회의원에게 칼까지 휘두른 본인이 아닌가. 오히려 모든 우울과 자책의 원인은 전부 화평 스스로에게 있는 거였다. 화평은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를 머금은 하늘색이 화평의 잊어버린 눈물 색과 같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새벽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겨울은 외로웠다. 굳이 이유를 묻자면,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치자. 겨울은 모든 생명체가 잠에 들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화평이 살았던 동쪽 바다의 겨울은, 바닷물이 천천히 얼었다. 차가운 바람은 물을 스쳐 화평의 뺨에 닿이기도 했었다. 얼마나 시려운지, 밖에 조금이라도 있으면 금세 볼과 두 손이 빨갛게 되어버리곤 했다. 길가에 있는 꽃들도 시들고, 녹읍이 짙게 물들었던 나무들고, 잎새 하나 없이 축 처지곤 했다. 도시는 더더욱 그랬다. 삭막한 이 곳에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화평도 시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김비서가 식물이라도 키워보는건 어떻겠냐고 물었을까. 식물이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화평은 귀를 쫑긋 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비서의 모습을 본 화평은, 식물이라….. 혼잣말을 내뱉은 화평은 비어있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꽃?

응, 꽃.

왜 하필 그건데.

 

모태구는 난데없는 화평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서류를 보던 시선을 내리고, 몸을 살짝 돌려 옆에 있는 화평에게 물었다. 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집에서 키울만한 어여쁜 꽃이 많다는 건 모태구도 안다. 장미, 라벤더, 코스모스 같은 흔하디 흔한 것들. 꽃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러한 종류를 생각하니까. 하지만 모태구의 예상에 빗나가면 말이 달라진다. 많고 많은 꽃들 중 윤화평이 물은 건 협죽도였다. 왜 이 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까지 찾았는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면서 말하는 화평의 얼굴은, 어떤 감정과 생각이 깃들어있는 지 태구로썬 알기 어려웠다. 워낙 내면을 감추고 사는 윤화평이므로.

 

독초잖아. 태구가 한마디 하였다. 알아, 독초인 거. 화평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말했다. 헛짓 하려는 건 아니지? 태구가 미간을 구겼다. 살짝 심기가 불편했는지, 손등에 핏줄이 돋아난다. 화평은 손사레를 치고, 넉살좋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도 몰랐는데. 독초가 벌레도 덜 꼬이고 오래 산다고 해. 화평이 태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런 모습까지 나온다는건 뜻을 굽히지않겠다는 화평의 의지였다. 혼자 있으니 심심해서 그래. 나 한쪽 눈도 안 보여서 딱히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겠고. 괜히 모태구 너랑, 김비서님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 키워도 돼? 화평의 말에 태구는 잠시 생각하듯 제 턱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한참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비서에게 알아보라고 할게. 태구의 승낙에 화평은 그제야 웃었다. 고마워, 모 사장. 그 웃음에 태구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요즘 일 바쁘지? 화평은 커프스단추를 푸는 태구에게 물었다. 연초는 늘 바빠. 늙은 주주들이 허파에 바람만 들어서, 비위 맞추느라 화도 나고. 넥타이를 푸는 태구의 모습을 보고 있던 화평은 옅게 웃었다. 대기업 사장도 할 게 못 되는 것 같네, 우리 모 사장 일하는 거 보면. 장난스런 화평의 말에 태구는 옅게 웃었다. 그도 그럴것이, 태구는 정말 바빴다. 화평을 만난 이후로 이리 시간이 안 난적은 처음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것들, 언젠간 다 없애버려야지. 라고 태구가 생각하면 기가 막히게도 화평은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무슨 말 내뱉은 적도 없는데.

 

화평은 소파에 몸을 기대어 태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익숙했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모태구가 쉴 틈 없이 바쁘게 된 시간이 벌써 1달은 넘었으니까. 연도가 바뀌고 나서 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집에만 있는 화평으로썬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태구가 집에 있으면 화평의 상태는 많이 나아졌다. 모태구에겐 강인한 기운이 있다. 화평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세습무 집안의 기운보다 더욱 강한 기운을 품은 사람인데, 어떻게 못 알아볼까. 그 덕분에 악몽도 적게 꾸는 화평이었다. 물론, 바쁜 모태구를 붙잡고 같이 있어달라고 말을 할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받은 게 많은데, 더군다나 대기업 사장인 사람을 붙잡고 지내기엔 화평은 너무 어른이었다.

 

몇 시에 출근해야 해?

5시 전엔 나가야 해.

힘들겠네.

 

화평의 말에 태구는 별로, 라고 짧게 대답했다. 어련하시겠어. 화평은 으, 그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 꽃 들어올 거야. 태구가 말했다. 정말? 기쁜 소식에 화평은 밝은 미소를 띄었다. 이제 좀 안 외롭겠다. 오랜만에 보는 그을림 없는 화평의 웃음이었다. 자주 본 웃음인데도, 그 웃음이 태구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웃음으로 다가왔다. 이런 적은 잘 없었다. 모태구의 촉은 뛰어나다. 틀린적이 없다. 지금 모태구의 촉은 불안함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윤화평. 모태구가 화평을 불렀다. 화평은 이불에 파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태구를 바라보았다. 왜 부르냐는 듯. 말해. 화평의 말에 태구는 잠시 표정이 굳었다. 무언가를 말 하려고 하는 듯, 달싹였다. 아니, 됐어. 태구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뭐야, 싱겁게. 화평이 태구를 살짝 째려보았다. 잠이나 자. 태구는 그런 화평의 표정을 외면하였다. 제 촉이 틀리길 바라는 것이었다. 설령, 이 촉이 맞다고 하면….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모 사장 또 까칠하게 굴지. 화평의 투정이 들렸다. 붕 뜬 구름처럼.

 

화평은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없어 무엇이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된다. 옆에는 태구가있었다. 사람 한 명 더 있다고, 싸늘했던 침대는 덕분에 온기가 아늑히 있었다. 몸을 돌려 태구의 곧은 등을 바라본 화평은 손을 뻗어 등 위에 올렸다. 왜, 윤화평. 태구가 목소리만을 내어 화평에게 물었다. 나 요즘 잠을 못 자, 모 사장. 화평의 덤덤한 말에 태구가 바로 누워 화평과 마주하였다. 불면증? 태구가 물으니 화평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뭔데. 글쎄, 알면 내가 이러겠어. 화평은 장난스레 말하였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 인상피라는 소리였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런가 봐. 박수 팔자가 이리 거세서 어떡하지. 장난치지 말고. 태구가 으르렁거리듯 목소리가 낮아졌다. 괜찮아. 모태구, 우리 모 사장 있을 땐 괜찮으니까…. 자자,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화평이 태구에게 다가가 두 팔을 뻗어 태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오늘은 이리 있어 줘. 포근한 감촉에 편안함을 느낀 화평은 슬슬 잠이 오는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태구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화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렸다. 방 안은 어느새 화평의 숨소리만 울려퍼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태구가 지금 하는 것이라곤 윤화평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몇 시간 뒤 태구는 화평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흐르는 시간이 이렇게 욕스럽게 느껴질 줄은 상상도 못 한 태구였다.

 

아침부터 바쁜 화평은 김 비서의 도움으로 협죽도를 집 안에 들여놓았다. 거실 중에서도 적당한 채광이 들어오는 곳에 협죽도를 내려놓았다. 협죽도를 바라 본 화평은 싱긋 웃었다. 꽃이 참 곱네. 혼잣말을 내뱉은 화평은 협죽도의 싱그러운 분홍빛 꽃을 바라보았다. 계양진에 지냈을 땐 이리 화려한 꽃을 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개나리, 철쭉, 진달래 등이 전부였던 바다를 머금은 촌 동네였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협죽도를 매만진 화평이었다.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던 김비서의 말이 가슴에 콕콕 찔렸다. 정말 독초일까, 독을 품은 것들은 아름답다던데. 화평은 중얼거리며 협죽도를 살펴보았다. 생각해보니 화평의 주위에도 독을 품은 이가 있긴 했다. 저한테만 아직 그 맹독을 내보이지 않은 거지. 화평은 아름다운 그를 생각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화평은 한숨을 내뱉었다. 태구가 나가고 난 후, 화평은 또 악몽을 꾸었다.

 

다 너 때문이야.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다 죽어.

 

화평의 가슴 깊숙이 비수처럼 꽂힌 말은 꿈속에서 수도 없이 화평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버지가 화평을 원망했던 말, 주위 사람들이 화평을 보고 손가락질하던 모습.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화평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그 장면의 연속이었다. 이 꿈은 너무나도 지독해 화평을 썩어들어가게 했다. 잃어버린 흰 눈은 불안함의 근원이었다. 몸에 새겨진 경이 아물지 못하고 그 위에 누군가가 파고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프지 않다고 하면 순 거짓말이다. 화평은 지쳐갔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오랫동안 있고 싶었다. 모든 걸 잃어버린 미망인에게 남은 유일한 끈이었다.

 

협죽도는 다행히 집에 잘 적응했다.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꽂으니 더욱 어여쁘게 보였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찾는다고 하루가 금세 가버렸다. 절반의 시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시간이 두 배 들어간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뭐가 되었든 화평은 좋았다.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낸 적이 요즈음 들어서 없었으니 말이다. 생기가 넘치는 협죽도는 제 빛깔을 한껏 내뿜었다. 화평은 잠시 협죽도를 만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진 변함이 없다. 사실 독을 가지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까. 괜찮지 않을까. 화평은 상처투성이인 제 손을 바라보다 밀려오는 수마에 눈을 감았다.

 

태구는 저녁 시간 조금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일찍 왔네. 화평이 의외라는 듯 태구를 바라보았다. 평소같으면 그러게, 라고 말할 태구가 대답이 없었다. 모 사장, 화평이 태구를 불렀다. 모태구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꽃은. 태구의 말에 화평은 손가락으로 곱게 놓인 협죽도를 가리켰다. 예쁘지? 웃음을 머금은 화평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만지지는 마. 김 비서가 그러는데, 청산가리의 6천 배나 독하다고 하더라고. 화평이 협죽도를 바라보다 말했다. 슬그머니 오른쪽 손은 주머니에 넣어두는 화평이었다. 태구는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로 다가가 협죽도를 바라보았다. 예쁘지? 옆에 따라 온 화평이 말했다. 화평의 말에 태구는 어. 하면서 짧게 대답했다. 이상한 짓 하면 다 버릴 거야. 태구는 웃지 않으면서 협죽도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화평에게 시선을 두진 않았다. 또 그런 말 한다. 나 안 그런다니까? 화평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왼손으로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태구는 그제야 화평을 바라보았다. 정확힌 화평의 보이지 않는 오른손을.

 

아, 이거 죽었네. 협죽도 덕분에 거실을 오랜만에 둘러보다가, 화평은 한탄을 하였다. 잘 관리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선반 위에 놓여진 다육 식물이 죽어있었다. 크기가 주먹만 해서, 신경쓰지 않으면 눈에 안 띄는 식물이었다. 화평은 작은 화분을 들어서 쓰레기통에 식물과 흙을 버렸다. 생명을 제 손으로 앗아간 기분이었다.

 

모 사장은 내가 죽으면 어떡할 거야.

살려낼 건데.

불가능하잖아.

내가 못하는 건 없어.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화나려고 하니까. 태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따라 생각이 많아서 그래. 화평이 괜히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 윤화평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아? 태구의 날 선 목소리에 화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간헐적인 화평의 우울이었다. 우울함이 윤화평을 좀먹었다. 태구는 제 능력 밖의 일이 있다는 것에 신경질이 났다. 윤화평은 언제 시드는지 모르는 난초였다. 처음 볼 땐 거친 억새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속은 너무나도 여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파악이 안 되는 존재였다. 나는 내가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화평이 건조하게 말했다. 마치 타인의 일을 전해 주는 것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화평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듯 태구가 되물었다. 윤화평 네가 무슨 죄가 있어.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의 길을 살아온 사람에게,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원리대로 따지자면 죄는 오히려 모태구에게 있다. 아니, 그게 당연한 말이었다. 화평은 옅게 웃으며 태구를 바라보았다. 그 웃음이,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으스러질 것 같은 웃음인지라 태구는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마. 모태구. 화평이 웃었다. 일 때문에 바쁘잖아, 괜히 내가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네. 화평이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습관이었다. 사소한 것들이 크게 다가왔다. 윤화평은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습관적인 윤화평의 행동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모태구는 속이 불편했다. 윤화평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걸까. 억지로 알아내 보려고 하면 무너질 게 뻔하다. 태구는 그저 손을 내린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지 않을까. 나아질 순 있을까. 확신이 전혀 들지 않았다.

 

깊은 새벽이었다. 태구는 저절로 떠진 눈에 몸을 반쯤 일으켰다. 시간은 오전 3시.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창문 밖의 풍경은 아직 먹물처럼 어두웠다. 2시간 뒤면 나가야 한다. 어차피 잠도 안 오고 그냥 깨어있는 편이 나았다. 태구는 미간을 구기며 어지러움을 참았다. 일이 바빠지면서 두통이 심해졌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앓는 소리와도 같은 소리였다. 누군가 아픔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 듯했다. 난생 처음 듣는 낯선 소리에 태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지. 소리의 기원지는 가까웠다.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혹시. 태구는 손을 뻗어 협탁 위에 있는 무드등을 켰다. 옅은 불빛에 방 안이 어렴풋이 보였다. 태구는 고개를 돌렸다. 으으…. 앓는 소리가 너무나도 아프게 들렸다. 화평이었다. 화평은 식은땀을 흘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픈 걸까. 태구가 손을 올려 화평의 이마에 갖다 댔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독한 악몽이면 저럴까. 잠을 요즘 통 못잔다는 말은 이걸 의미하는 걸까. 태구는 화평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화평은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깨울까. 어깨를 쳐 화평을 깨우려는 순간, 점차적으로 새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는 화평을 보곤 태구는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마에 올린 손을 내렸다.

 

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화평의 손이 제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꿈 속에서 저를 찾는걸까. 화평의 손을 놓으려고 태구가 화평의 손에 자기 손을 갖다대려고 했다. 이것만 안 봤더라면. 화평의 독을 만진 사람의 손같이 붉은 반점처럼 군데군데 돋아났다. 태구는 화평의 오른손에 시선을 때질 못하고 한동안 목석처럼 굳어있었다.

 

꿈을 자각했다. 반복되는 꿈을 수도 없이 꾸게 된다면 다들 그러지 않을까. 화평은 알면서도 괴로웠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다 죽였어. 아니야, 아니라고. 화평은 몸부림을 친다. 달아나려고 해도 검은 형체들이 화평을 단단히 묶었다. 도망칠 수 없도록.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수처럼 화평을 옭아맸다. 네 형제도, 가족도, 모든 사람을 다 죽였어.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화평은 소리를 쳤다. 결백함을 주장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박일도야, 박일도가 그런 거라고. 화평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없어진 귀신은 극락에 가질 못했다. 아직도 화평을 괴롭혔다. 박일도는 너야. 누군가 속삭인다. 화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반복되는 꿈을 감당하기엔 화평의 마음은 금이 많이 갔다. 누가, 누가 좀 도와줘. 화평은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갑자기 환한 빛이 들어왔다. 화평의 몸을 옭아맨 것들은 빛에 타들어 갔다. 마음을 갉아먹게 만드는 속삭임들은 사그라졌다. 화평은 자유로워진 몸에 숨 막히는 고통이 없어져 가는 걸 느꼈다. 따뜻했다. 꿈을 꾸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뭐지, 무슨 일인 거지.

 

화평은 눈을 떴다. 밝은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왔다. 새벽 어스름의 하늘이 아니라서, 지금 이 상황이 혹여 꿈속은 아닐까 싶은 화평이었다. 아직 현실이 와닿지 않아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화평은 시계를 보았다. 오전 7시. 실로 오랜만에 깬 시간이었다. 아, 꿈속의 그 따스함은 모태구였을까. 화평은 옅게 웃었다가 제 손을 무심코 내려보았다. 붉은 반점이 돋아난 손은, 독이 오른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병드니 몸도 병이 들어가고 있는 화평이었다. 모태구는 분명히 이 손을 봤겠지. 제 두 손을 꾹 쥐고는, 한숨을 내뱉은 화평이었다. 병의 해결책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화사한 아침이지만 화평의 입안은 쓰게 느껴졌다. 저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아침이었다.

 

모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지방 출장이 긴급하게 잡혀서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대기업 사장이니까, 바쁠 만도 했다. 모태구는 그 연락을 남기고, 몇 시간 뒤에 또 다른 연락을 남겼다. 허튼 생각 하지마. 단순한 7글자였다. 뜬금없이 왜 이런 문자를 보낸 걸까, 하면서도 화평은 그 문자 한 통을 받고 한동안 굳었다. 그 문자 7글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화평은 휴대폰을 껐다. 그 문자에 대답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한동안 힘껏 돌보니, 처음에 왔을 떄보다 지금의 협죽도는 파릇파릇 생기가 넘쳐났다. 아름다운 자태를 내보이며 붉은색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화평은 아직도 붉은 반점이 사그라지지 않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협죽도의 독성은 성인일 경우 잎 두세 장만 섭취해도 즉사의 수준에 다다른다고 했나. 모태구의 말처럼 이 위험한 식물이 왜 끌렸을까. 화평은 조심스레 협죽도를 살펴보면서 생각했다. 살면서 더 위험한 것을 감내하였기 때문일까. 두려움이 잠식하고 있는 몸은 더욱 강하고 독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일종의 보호차원이었다. 짓무르고 썩어들어가는 화평의 속내를 이 꽃은 알고 있을까. 화평은 쓰게 웃으면서 꽃에 물을 주었다. 너에게도 물을 줄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화평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건네듯 내뱉었다. 잘 있어, 잘 지내. 연습하듯 인사를 내뱉어보는 화평이다. 아직 어색한지 단어가 입안에서 돌멩이마냥 구른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모태구가 없는 집 안은, 화평에게 있어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옥이었다. 며칠 전 화평은 쏟아지는 수마에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인간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죽음이었다. 잠은 죽음이다. 화평은 그리 생각했다. 잠에 빠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악한 기운들이 화평의 몸을 잠식한다. 화평은 식은땀을 흘렸다. 익숙하다. 이것은 다 허상이다. 곧 깨어날 신기루다. 두려워하지말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화평은 마음속으로 계속 되내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 저를 원망하는 목소리, 익숙한 얼굴들이 화평에게 날을 세우고 심장을 찌른다. 그래, 다 나의 원죄야. 나를 미워하고 원망해.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들이 편해진다면, 이 세상에 벗어나 생을 끝마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버티기 위해 꿈의 굴레에서 이를 아득 문 화평이었다.

 

익숙함에 속았기 때문일까. 익숙함이 독이었다. 삶은 늘 예외를 안기기 마련이니까.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화평은 경직되었다. 아냐, 이건 꿈이다. 지독히 지속되는 화평의 꿈이다. 꿈이지만…. 왜, 왜 네가 내 꿈에 나오는 거야. 화평은 두려움에 가득 찼다. 예상치 못한 인물은 다름아닌 모태구였다. 화평의 구원과도 같은. 그런 태구가 화평의 지옥에 들어왔다. 이것도 귀신의 농락일까. 모태구가 천천히 화평에게로 다가왔다. 오지마, 제발 오지마. 오지 말라고 모 사장!! 화평이 핏대를 세우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누군가가 화평의 입을 틀어막은 듯 했다.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는 태구에게로 전달되지 않았을 거다. 꿈이지만 생생했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제발, 깨어나게 해줘. 너무 괴로워. 몸부림을 치며 눈물을 흘려도 화평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화평아. 태구가 화평을 불렀다. 피를 흘리면서, 원망과 증오가 서린 눈빛으로. 네가 날 이렇게 했잖아. 왜 피하려고 해?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모태구, 알잖아···. 화평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화평의 행동이 가소로웠는지, 태구는 웃있다. 네 옆에 있으면 다 죽어, 윤화평. 저주와도 같은 말을 태구가 말한다. 화평의 앞에서, 광기 어린 웃음을 지은 채로. 네 옆에 있으면 다 죽어. 네 가족도, 신부도, 형사도, 나도. 모두 네가 죽인 거야, 윤화평. 그 뒷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화평이기에,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말 하지마, 제발. 그런 화평의 애원이 닿질 않았는지, 꿈 속에서의 태구는 입을 연다. 다 너 때문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화평은 눈을 떴다. 헉, 허억. 가쁜 숨을 내뱉은 화평은 식은땀이 장난 아니었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화평은 컥, 하고 갑작스러운 고통에 하염없이 기침했다. 숨이 막히는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죽을 것만 같았다. 연달아 기침하는 화평은, 흰 이불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도 그 큰 귀신은, 제 몸속에 존재해 판을 치고 있었다. 이젠 그릇인 화평 자신만 갉아먹는 것이 아닌, 제 주위의 사람들까지 갉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귀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평과 공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화평은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더는 잃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전부 온전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아무런 피해 없이, 아무런. 애당초 이어지면 안 되는 관계였다.

 

바닷속에 뛰어 들어갔을 때, 왜 죽질 못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답은 하나다. 제 몸속에 있는 귀신이 죽지 않아서. 귀신은 아직도 더 많은 영혼을 먹어치우길 원하는 거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은 화평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본능적인 감각은 언제나 맞았다. 여기에 더 있을 수 없다. 화평은 고개를 숙였다. 제 처지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태구와 연락을 하지 않은 지 3일은 지난 듯했다. 화평은 일부러 휴대폰을 꺼두고 확인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모태구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당장 집에 찾아와서 화평이 있는지 확인할 테지만, 이번에는 일이 정말로 바쁜지 집은 한동안 잠잠했다. 김 비서도 오지 않았다. 악몽만이 남아있는 이 집 안에서, 화평은 무심코 거울을 바라보았다. 혈기가 돌지 않는 창백한 얼굴이 화평은 제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껍데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 제가 생각해도 웃긴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웃음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거실에 있는 협죽도에 시선을 두었다. 화평은 싱그럽게 피어있는 협죽도를 살살 매만졌다. 오늘 물 줬으니까 당분간은 안 줘도 되겠지. 원래 독초는 오래 산다고 하잖아. 모 사장 올 때까지만 버텨줘. 쓰게 웃은 화평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거다. 시간은 오후 10시가 넘었다. 어둑하게 하늘이 내려앉아 길거리는 한산했다. 화평은 가방을 메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늘 떠날 것처럼 지냈던 삶이었다. 미련은 없다. 하지만 후회는 있다. 물론 이마저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은. 제 우울은 언젠간 더욱 독이 되어 모태구까지 해가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 운명과도 같은 굴레에 화평은 지긋지긋했다. 저로 인해 누군가가 또 다치게 되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삶이 무너지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은 충분히 쌓였다. 이곳을 떠나게 되면 화평은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모태구 가슴에 비수를 꽂게 될 거라는 것을 화평은 잘 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악을 선택할 수 없다. 비극을 막기 위해 최악 다음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굳게 결심한 화평은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쿨럭, 쿨럭. 젖은기침이 목을 뚫고 나왔다. 기침의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화평은 두어 번 기침을 하곤 이내 멎었다. 손바닥에는 붉은 선혈이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큰 귀신을 담은 그릇의 역할을 다 한 탓일까, 몸은 차분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화평의 영혼은 더 빠른 속도로 으스러지고 있었다. 육신이 무너지는 사나운 파도 소리가 귀를 울린다. 철썩거리는 소리는 재앙일까, 멸망일까.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살아서 나오면 안 되는 영혼은 제 갈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린다. 시야가 앞을 가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이제는 안녕이다.

 

태구는 일주일간의 지방 출장이 끝났다. 너무 바쁜 탓에 휴대폰도 보고 살지 못할 정도였다. 집으로 가는 차에 몸을 기대어 휴대폰을 확인하였다. 부재중 전화 1통, 윤화평에게서 온 거였다. 4일 전에 온 전화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태구는 발신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걸어 주….’ …. 태구는 얼굴이 굳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다시 발신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입….’ 쾅!! 듣기 싫은 기계음에 휴대폰을 던져버린 태구였다. 윤화평. 태구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이상할 때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였다. 억지로라도 끌고 와서 제 옆에 앉혀두는 거였다. 4일 전이 마지막, 아마 윤화평은 집에 없을 것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윤화평을, 태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구의 눈빛이 매서웠다. 아니, 매섭지 않았다. 공포와 불안으로 잠식한 눈빛이었다. 모태구가, 그 천하의 모태구가.

 

도착하자마자 온 집안을 샅샅이 살핀 태구였다. 화평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옷가지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정말 홀연 듯 사라진 것이다. 마치,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하, 태구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조적인 웃음과 분노가 섞였다. 신경질적으로 눈동자를 움직이다 불현듯 협죽도가 눈에 들어왔다. 태구는 협죽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치게 피어있던 식물은 바싹 말라 다 시들고 죽어버렸다. 독초는 오래 산다며. 죽어버린 협죽도의 모습이 너무나도 윤화평과 비슷해, 태구는 화분을 깨트려버렸다. 제가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윤화평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구는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모태구, 넌 날 사랑하면 안 돼.’

‘왜.’

‘그냥 그런 게 있어.’

 

떠나기 전 화평이 한 말이었다. 나는 언젠간 너를 해칠 사람이 될 거야, 모 사장. 이젠 누군가를 헤치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진심 어린 말이었다. 헛소리하지마, 윤화평. 넌 날 못 해쳐. 인상을 쓰며 화평의 말에 대답한 저였다. 그런 태구를 보고 화평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쓰게 웃었던가, 장난이라고 했던가. 슬픈 표정을 지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윤화평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너무나도 없었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미 늦어버렸는데도. 화평의 말을 무시한 것이 이리 큰 화살로 돌아온 것일까. 산산조각이나 흙과 식물이 바닥에 놔 뒹굴어졌다. 태구는 구둣발로 화분 조각을 밟았다. 대리석과 문질러지는 조각 소리가 칼자루처럼 서슬 퍼렜다. 아, 널 어떻게 하면 좋겠니. 화평아.

 

화평은 계양진으로 돌아와 바닷가로 갔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 바닷물결이 어여뻤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나는 바다는 잔잔한 파도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퍼졌다. 꿈속에서 본 바닷물은 언제나 검고 어두웠다. 동쪽 바다엔 전설이 있어. 너무나도 위험한 전설이.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말이 떠오르는 화평은 바닷가 앞에 앉아 파도 소리만 들었다. 마을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저주 때문이었다. 아, 내가 저주 그 자체지. 이제 지긋지긋한 운명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살고 행복해지니까. 모태구가 보고 싶었다. 꿈속에 나와 저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구원이라고 믿었던 존재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은 화평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온전한 죄는 전부 저한테 있지 않은가. 두 손에 붉게 퍼진 반점은 점점 푸르게 변했다.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제 몸속에 품은 독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녹여들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화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찰랑거리며 저를 반기는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찰랑, 바닷물이 화평의 발목을 적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니 무릎까지 올라왔다. 악몽이 눈앞에 선연히 보였다. 검은 기운이 화평의 사지를 옭아맨다. 화평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나와 함께 가자. 점점 앞으로 나아가면서 화평은 눈을 감았다. 물소리는 비명으로 바뀌고 있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다 죽였어. 그래, 내가 다 죽였어. 그러니, 내가 끝낼게. 길고 긴 악몽은 영원히 화평의 꿈속에 남아있을 거다. 당신만은 내 꿈속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눈을 감은 화평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바닷물 맛이 났다. 화평은 꿈속으로 빠졌다. 속죄와도 같은 꿈속에서. 다시는 깨어나질 못하는 꿈속에서. 구원의 빛이 꺼져가는 꿈속에서. 목을 조여왔던 악몽속으로.

 

날 사랑하지마, 모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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