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계절
윤화평은 살아있었다.
어느 해안 마을에 작은 터를 이루고, 아무 일도 없던 양, 박일도와의 악연도 자신과 길영과의 얽힘도 없던 양 그렇게, 조용히 살아있었다.
그런 그를 마주한 첫날을 비롯해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 세 번째, 네 번째로 찾아갔을 때에도. 멀쩡히 숨이 붙어있음을 숨긴 화평에게로의 화와 이유 모를 슬픔 따위가 주체되질 않아 화평과 차분히 마주하는 것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화평이 자신들을 찾지 않았던 이유를 받아들이는 데, 화평이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했던 지난 일 년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린 걸 테지만.
삼 주 정도 되었을까. 이제는 보다 덤덤히 화평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난도질 된 팔목이나 하얀 의안을 볼 때면 바다에 빠진 그날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오곤 했으나, 화평이 살아있는 기쁨에 비할 것은 못되었으니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다만,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면 화평이 사라져버릴까 불안감에 휩싸이기를 수십, 수백 번. 그런 날이면 제 일을 마치자마자 화평이 사는 곳으로 부리나케 향해야만 했다. 직접 보고, 듣고, 만져 그가 존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죽었으니까.
먹을 것 따윌 사들고 화평의 집에 도착하자 마당에선 화평이 누군가와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났다.
"총각!"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분주한 걸음을 한 동네 주민에 화평은 화분에 물을 주던 손을 놓고 마중을 나간다. 이웃의 방문이 그리 낯설지도 않은 듯 익숙한 얼굴이다.
"아니, 이건 또 뭐에요."
박스를 옮겨 받으며 보니 제법 묵직한 귤 박스다.
"손주가 대학에 잘 붙었대. 듣자마자 고마워서 뭐라도 주지 않곤 못 배기겠더라고."
"아이. 참. 그거 손주가 잘해서 들어간 거래도 그러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화평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있다.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에 젖기도 하고,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한 탓이겠지. 지금 마당에 널려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마을 사람들이 준 것들이었다. 얼굴에 웃음이 만연하여 연신 고맙다 하는 할머니를 보다 결국 자신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암만, 좋고말고.
"윤화평 씨."
또 다른 방문객이 온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고 있는 화평을 가만히 기다린 윤이 목소리를 냈다. 나쁘지 않은 기다림이었다. 화평의 편안한 얼굴, 웃음소리가 햇빛처럼 널려있는 마당을 바라보는 일이었으니까. 일부러 대화가 끝나갈 무렵에야 화평을 불렀다.
"최윤?"
"안녕하세요."
윤이 고개를 숙여 마을 어르신에게 먼저 인사드렸다. 이 마을서 젊은 총각을 또 다 보네, 하며 웃으신 할머니가 맛있는 귤이라며 꼭 나눠먹으라 신신당부한 뒤 걸음을 뗐다. 화평의 품에 들린 박스를 보다 보니 평상 위에 널린 굴비나 곶감까지 눈에 들어온다. 말없이 그것들을 보다 침묵한 채 화평을 본다.
"안 바빠? 요즘 자주 오네."
읏차. 화평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말도 없이 시선으로만 저를 좇는 윤을 불렀다.
"뭐 해?"
옆에 있는 소쿠리에서 칼을 꺼내 상자의 테이프를 뜯어내고는 노란 귤 하나를 꺼냈다. 꼭지부터 껍질을 까면 특유의 상큼한 향이 금세 공기 중에 퍼진다. 하나를 뜯어 입에 넣고 씹다 고개를 끄덕인다. 맛있네.
이렇게 지내왔던 건가. 제가 모르는 그의 일 년을 가만 생각하며 바라보다, 불현듯 일 년 전 경찰서에서나 그의 능청스러운 거짓말들이 떠올라 조심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노파심에 묻는 건데요. 마을 어르신들께 뭔가를 하고 있는 겁니까?"
화평은 그 말에 윤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귤 하나를 입에 넣는다. 살다 살다 육광이 형한테 하던 말을 내가 들을 줄은 몰랐네. 묘한 기분으로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육광의 생각이 밀려들어서, 윤을 앞에 세워둔 채 감상에나 잠길 뻔한 것을 참아냈다.
"조언해주는 거야, 조언. 어르신들한테 내가 뭘 한다고."
화평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여유가 생긴 탓일까. 늘 불같이 달려들던 화평과 보다 예민했던 자신은 시간의 틈새를 달려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모든 것을 함께한 길영 또한 마찬가지로.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 삶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다만 화평의 그 초연함과 여유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첫 만남 이후 화평을 몇 번이고 찾아간 뒤에야 차츰 짐작할 수 있었다. 화평은 박일도가 사라지지 않고 제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심할 수 없으면서도 안심할 수 있는 거겠지.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이전과 달리, 박일도의 그릇인 자신만 죽으면 단번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할 테니.
어디까지나 윤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화평의 평온한 모습은 그것에서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화평에 대한 제 불안함은, 그 추측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럼 다행이네요. 의심해서 물은 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들고 온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저녁으로 드세요."
"저녁 안 먹고 가? 먹고 가지."
당연히 먹고 갈 줄 알았는데, 하는 표정으로 윤을 바라보는 화평이다. 저녁거리만 주고 곧장 돌아가려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되묻는 자신에 순간 아차, 싶어 내밀어진 봉투나 얼른 받아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뭐야, 소고기야? 하며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데.
화평은 길영과 윤과의 재회를 기적처럼 여겼다. 그렇게 끊어내고 돌아서도 결국 이어지고 만나고 마는 인연. 마을 사람들의 호의와 시골 특유의 평화가 자신의 삶을 조촐하지 않게 했지만, 떠나온 곳으로의 향수와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늘 발목을 붙들었다. 길영과 윤과 다시 연락을 하고 왕래를 하게 된 것만으로 늘 모자라던 삶의 결핍이 순식간에 채워질 만큼. 그들이 소중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화평은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어쩌면, 사치였다. 진정으로 그들을 아끼고 걱정했다면 그는 첫 결심 그대로 이곳에서 철저히 홀로여야 했다. 그러나 상용시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는 것으로만 이야기를 갈무리한 건, 사실은,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웠으니까. 생과 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그들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애틋한 그들이.
그러니 이 정도로 거리를 유지해야 했는데. 최윤이 돌아가는 것에 너무 쉽게 아쉬움을 드러낸 것이었다. 화평이 어떻게 말을 물리나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제안을 거절한 것은 최윤이었다.
"됐습니다. 그냥 생각나서,"
하지만 최윤에게도 이제 윤화평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아니라, 늘 생각하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지난 일 년간의 그리움과 후회같은 것들이 윤을 종용했던 탓이다.
그러니까 방금 뱉은 말은 거짓말이고.
"이거 주려고 온 거니까."
음식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당신이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순전히 내가 안심하기 위한 핑계.
"맞아. 바쁘지? 내일 일 없으면 자고 가라고 하려 했는데."
자신이 말을 무르기 전에 윤이 단호히 거절한 것이 다행이었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가 어려웠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괜히 바다로 고개를 돌리는 화평이다. 어떤 미련이 남거나, 마음이 약해지곤 할 때마다 바다를 보게 된 것은 지난 1년간의 습관이었다. 바다만 보면 그때가 당장 조금 전 일처럼 생생해져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윤을 마주 봤다. 입꼬리만 가볍게 끌어올려 웃고는 봉지를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둔다.
'끝나고 할아버지 집으로 와.'
'생각 좀 해볼게요.'
'안 돼. 꼭 와. 온 김에 자고 가.'
'시간 봐서요. 바쁘니까 끊어요.'
오래전의 통화 내용이 어렴풋이 겹쳐왔다. 윤의 머릿속에서. 화평은 제게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태연한 모습. 그 모습이 또다시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그날 서둘러 마치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걸. 그랬으면 당신이 산 채로 박일도의 관이 되려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곁에 있었다면, 바다에서 그 손을 놓지 않았다면, 당신이 살 수 있었을까.
지난 일 년간 자리 잡은 익숙한 후회, 지독한 상념. 거의 습관처럼 배겨버린 그것. 눈앞에 화평이 있는 지금까지도 윤은 여전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이 일 년이고, 당신과 재회한 시간이 겨우 스무 날 남짓이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화평의 움직임에 현실로 시선을 돌리는 윤이다. 화평은 살아있다. 숨을 쉬고, 목소리를 낸다. 그럼에도 일 년을 함께한 지독한 후회가 마음을 짓누르고 사고를 틀어막는 악귀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윤화평 씨, 나는 여전히 그날을 살아요. 아직까지도.'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시선으로만 대체한다. 아직도 그날을 사는 자신은 그 말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자고 가라는 말. 당신 곁을 비운 동안 또다시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그럴게요. 그런데 이불은 있는 겁니까?"
그런 격정은 예나 지금이나 꾹 눌러 삼킨 채 그렇게 물었다. 예전의 대화가 생각날 만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였다. 비록 자신이 여전히 그날의 바다에 살고 있을지라도, 겨우 잔잔해진 듯 보이는 화평의 세상을 흔들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건재했기에.
"이불이야 어르신들이 남는 거 줘서 많지. ……어? 자고 가? 내일 일 없어?"
체념하고 돌려보내려던 것이,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윤은 자고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화색이 도는 얼굴을 애써 무표정으로 감추며 조금 반색하는 정도만 티를 내는 화평이다. 거리를 둔다거나 하는 결심이 무너지는 속도도 참 빨랐다. 휴, 내일부터. 다음부터 다시 해. 오늘은 자고 간다잖아. 마음에 남는 불편함을 애써 밀어낸 화평이 고개를 털며 말했다.
"그럼 술 먹자. 맨날 혼자 술 마시니까 이젠 심심해."
이 소고기 구워서 술이랑 먹으면 딱이네. 조금 전까지 가라앉히던 마음이, 결심들이 무색하게 들뜬다. 언제나 윤은 화평을 결심하게도 하고 무너트리기도 하는 존재였다. 일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일 없냐는 말에 곧이곧대로 있어요, 하고 답하려다 멈췄다. 아. 괜찮아요. 하고 대충 둘러대며 답을 미뤘더니 저녁과 함께 술 얘기를 한다. 화평의 표정에 드물게 반색의 감정이 뜬 채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재회 후 지난 삼 주간 제가 화평을 어지간히 밀어내기는 했는지, 어색해 하기는 했는지. 첫날 이후 몇 번 더 찾아오기는 했지만 집에도 들어서지 않고 몇 번의 대화 끝에 상용으로 돌아간 것이 다였으니까.
"술을 그렇게 자주 마셨어요? 혹시 지금도 밤에 잘 못잡니까. 그래서 계속 마셔요?"
"가끔? 사람이 쉽게 변하진 않잖아."
"당신의 가끔이 타인의 자주라는 게 문제겠죠."
윤도, 화평도 노력하고 있었다. 못다한 얘기 끝에 어색하게 자리 잡아버린 공기를 밀어내려고. 조금씩 대화를 하다 보니 제 안의 서먹함이 풀어지는 듯했다. 밀려드는 여러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던 동안에도 꾸준히 화평에게 들렀던 것이 도움이 됐던지.
"제가 있어도 못 잘 것 같습니까?"
"글쎄."
"예전엔 같이 자면 당신 잘 잤잖아요."
"오늘 같이 자보면 알겠지."
예전에. 1년 전 일이 바로 어제 같으면서도, 이럴 땐 아득한 옛날 같다. 이 미묘한 시간 감각에 화평은 새삼스럽게 곁에 앉은 윤을 바라본다. 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고. 아, 머리 길이가 달라졌나?
"너는…, 너는 괜찮았어?"
"네."
"또 아프거나 그런 거 없었어?"
"네. 밥도 잘 먹었고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아프지 않냐는 게 저주를 비롯한 육체적 잔병치레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걸 테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고 삼켰다. 시선 끝에 닿는 바다 너머 하늘에 슬슬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화평과의 저녁 식사는 참 오랜만이었다.
"다행이네. 어디 아프면 꼭 말하고."
"당신이나 먼저 말해요. 늘 삼키잖아요."
"지도 똑같으면서. 아, 몰라. 들어가자. 저녁 해줄게."
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옆에 있던 봉지를 집어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화평이다. 여기저기서 받거나 모은 생활 집기들이 정리된 듯 아닌 듯 널려있었다. 대부분이 마을 사람들이 복채 대신이나, 손자 생각이 난다며 쥐여준 것이거나, 일손을 돕고 돈 대신 얻어온 것들이었다. 좁고 평범한 집 한 채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난방이 잘 되고 나름 깨끗해 살만하다는 것이 화평의 평가였다.
무엇보다 곧장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점이 화평이 머무는 이유였지만.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 안에 숨죽여 있을지 모를 박일도가 다시 눈을 뜬다면, 기어코 관이 되어주기 위해.
화평을 따라 들어선 윤은 조용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좀 전에 윤이 화평에게 했던 말대로 상용시 집보다도 더 사람 사는 집의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가구도 물건도 없이 텅 비었던 화평의 집. 언제 떠나도, 사라져도 미련이라고 남길 것도 없을 만치 쓸쓸하게 비어있던 공간. 집주인이나 집이나 닮은 모양새여서, 당신의 집을 정리하며 쓰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예전엔 밥을 먹자고 하면 둘 다 집에 먹을 게 없어 당연하다는 듯 식당으로 향하곤 했는데 이제는 화평이 밥상을 내놓는 모습도 다 본다. 화평이 금세 내어온 상 앞에 앉아 짧은 식전 기도를 드렸다.
"끝났어요. 잘 먹을게요."
화평이나 길영과 어울리며 소주도 제법 입에 자주 댔던 게 이제는 익숙하게 먼저 병을 여는 정도다. 두 개의 빈 잔을 채우고, 반주 삼아 저녁거리와 함께 가볍게 술을 넘겼다. 화평과 제대로 마주하고, 대화를 길게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몇 주간 화평을 보면서도 제대로 된 말도 못 하던 윤이었으니까.
"어이구, 우리 신부님. 이제 술도 잘 마시네. 전에는 맥주만 마시더니?"
시간이 무섭긴 한가 봐, 하며 소주 한 잔. 잔이 비자마자 다시 잔을 채우는 화평이다. 급하게 털어 넣듯 술을 삼키다 일순 멈칫하며 윤을 바라본다. 오래도록 혼자 마셔대던 버릇이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다.
"너무 나만 마셨나?"
그 말에 윤의 시선이 차분히 화평에게 닿는다. 물 마시듯 가볍게 술을 넘기는 버릇도 여전하다. 당신,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사사로운 버릇이나 저 말투까지도 모든 게 그대로라 그동안의 일 년이 붕 떠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만에 불안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윤화평은 살아있다. 제 앞에 이렇게 버젓하게. 화평이 내어온 밥상의 온기와 함께 천천히 모든 긴장을 내려놓는 윤이다. 굳어있던 표정이나 행동과 목소리 전부, 작은 안정감을 따라 녹아들고 있었다.
"알면 같이 좀 마셔요. 누가 쫓아 옵니까?"
가볍게 그를 핀잔하고는 그제야 피식, 화평이 보는 눈앞에서 웃음 짓는다. 길영이나 다른 사람들과 보냈던 일 년간의 최윤 그대로 화평을 마주한다. 조금은 날이 죽고 여유로운 듯 보이던 모습. 아마 화평에게는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지만.
윤이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끝이 간질거리는 화평이다. 이걸 어떤 감정으로 설명해야 할까. 안도? 기쁨? 무엇이든 부정적인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제야 윤이 아프지 않다는 걸 진심으로 믿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얼굴 많이 피었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지난 안부를 묻는 말에 윤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그간 많이 부드러워졌고 또 평범한 일상에 물들어 살아왔지만, 극복하지 못한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 화평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주의를 돌리듯 소주를 털어 넣고 화평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구마사제직을 그만뒀습니다. 다른 분들과 다를 것 없는 사제로서 지내고 있어요. 아이들이 저를 잘 따라요. 강 형사님과도 종종 뵙고, 계양진에도 꾸준히 오갔고요. 몇 주 전엔 강 형사님이 윤화평 씨 제사도 지냈는데……."
"잘됐네. 안 그래도 아직도 하고 있나 걱정했는데. 위험하잖아."
꽤 신경을 기울여 윤의 이야기를 들었다. 차분한 음성으로 지난 1년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꿈이나 환청이 아닌지, 눈을 치뜨고 유심히 살펴 보기도 했다. 눈앞의 최윤은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바란 대로여서. 잘 지내고 있는 윤과 길영의 소식에 자신의 목숨 값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자신이 망칠 뻔한 일상들. 그래서 마지막 자신의 제사 이야기를 할 때엔 은은하게 미소까지 띠었다.
"고마워. 잊지 않고 제사도 지내줘서."
두 사람을 봐서 좋았다. 자신이 매일같이 빌고 빌던 일상을 얻은 두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둘이 자신을 이대로 묻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잇따랐다.
확실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확실하지를 않아서. 그 생각 하나가 자신의 발 한쪽을 바다에 매어두었고, 그 매인 줄을 따라 박일도가 다시 기어 올까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묵주를 두 손에 쥐고 그렇게 빌던 그들의 일상을 또 망치게 될까 봐.
그런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도 두려운 순간이고, 너무나도 원해왔던 순간이었다.
"너 강 형사님이랑 좀 친해진 것 같더라. 전에 형사님이랑 얘기했었거든."
'잘 됐네. 안 그래도 아직도 하고 있나 걱정했는데.' 그렇게 답했던 화평의 말에 윤은 조금 쓰게 웃고 있는 채였다. 구마사제직을 자의로 관뒀다기보다는 당시의 제 상태가, 더는 악령과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었으니까. 제가 몸담은 신앙과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꽤 긴 시간에 걸쳐 나아졌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화평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모든 걸 놓아버렸던 수개월. 가만히 생각하다 술잔을 몇 번 더 비우는 것으로 불필요한 생각을 갈무리했다.
화평의 빈 잔에도 몇 번을 더 술을 채웠고, 그가 넘길 때 함께 잔을 비웠다. 곧잘 티가 나는 편은 아니었으나 술기운이 오를수록 말이 조금은 많아졌다.
"네. 친구잖아요. 당신을 만난 처음부터 당신의 마지막까지, 그 전부를 나와 함께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맞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나 때문에 힘들었는데도 군말 않고. 최윤 너도 그렇고."
'나 때문에' 힘들었다고 당연하게 따라붙는 그 수식어 또한 화평의 변함없는 것 중 하나였다. 걸고넘어지려 했던 윤은 화평이 술병을 다 비우고, 잔을 내려두는 걸 보고 저도 마지막 잔을 털며 쓴맛이 감도는 입안을 축이기만 했다. 누워요, 제가 치울게요. 하며 상을 먼저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일어나니 눈앞이 조금 어지럽다.
자정도 안 된 밤이었으나 해안가 마을의 저녁은 유독 짧았다. 부엌을 빠져나온 윤이 어둑한 바다 너머를 바라보다 발을 돌린다. 씻는 동안 아무리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도 술기운이 가시진 않는다. 애초에 술을 깰 목적이 아니라 술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음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라, 어지러움에 안심한 모양새였다.
이르게 자고 아침 일찍 상용으로 가면 되겠지. 약간의 취기가 오른 채로도 착실히 내일 일정을 정리하며 방에 들어선다. 마을 어르신들께 받은 이불과 베개는 각각 색이 다른 데다 옛스럽게 알록달록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윤이 잘 펴진 이불 위에 앉으며 말했다.
"윤화평 씨 취향이 이런 줄 몰랐는데."
"거, 내가 산 거 아니라니까."
자고 있어, 씻고 올게. 방을 나와 간단히 씻은 화평이 벽 거울을 들여다본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 풀린 눈의 자신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다. 목에서 흔들리는 묵주를 습관처럼 꽉 틀어쥐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괜찮겠지. 조심스럽게 손에 힘을 풀며 방으로 돌아와서는, 이불 위에 윤이 앉아있는 걸 보며 되돌려주듯 한마디 했다.
"이제 보니 그런 이불이랑 잘 어울리네. 딱이야."
그리고는 이불 위에 들어가 눕는 화평이다.
"전 깔끔한 게 좋은데요."
윤은 제 몫의 이불 위에 길게 누우며 단호하게 답했다. 시선이나 발음도 정확하고 호불호도 확실한 게 아무리 봐도 취한 걸로 보이진 않았지만. 막상 자리에 누우니 눈앞이 좀 더 흐릿해졌고, 졸음이 몰려오기도 해서 취기에 기대 나직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윤화평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네요. 무슨 색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화평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대부분 혼잣말인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중얼대는 윤이다. 감긴 눈에 내려앉은 잠이 무겁다. 갑자기 웬 취향 이야기. 화평이 눈을 멀뚱히 뜨며 윤에게로 답했다.
"난 딱히 좋아하는 거 없어. 소고기?"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기다리면, 들려와야 할 윤의 대답이 없다.
"뭐야, 자?"
묵묵부답.
"안 취한 척은 다 하더니."
조용한 숨소리만 들려오는 것에 픽 웃은 화평이 옆으로 돌아눕는다. 어둠 속에서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완전히 감는다. 술기운 탓일까. 옆에 누운 윤의 온기 탓일까. 밤마다 자리잡는 상념 없이 머릿속이 제법 깔끔하다. 그래. 어느 쪽이든 고마운 밤이다. 오늘은 잠이 들기를. 부디 푹, 잠들기를.
사실 윤은 일 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다. 어릴 적 그때처럼 눈앞에서 소중한 이를 잃은 것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서. 그때와는 달리 자신은 이제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자라있었는데도. 그랬음에도 결국 윤화평을 지켜내지 못해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도, 양 신부와 끝내 윤화평까지도.
삶을 살아내는 동안 소중한 이 그 누구도 제 손으로 지켜내지 못한 채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희미해진 줄 알았던 끔찍한 기억 위에 또 다른 끔찍함이 깊게 배어서, 한동안 뿌리치지 못한 절망과 비참함에 짓눌려 살았다. 그럼에도 신앙생활을 했던 영향에 기대고, 이런 증상을 겪는 것이 살며 처음은 아니었음에 기대어 가까스로 이겨내왔다. 구마 사제를 그만둔 것을 기점으로 증세는 차츰 좋아졌고 말하지 않으면 주변의 누구도 모를 만큼 묵묵하게 남은 삶을 살았다.
사실은 화평을 잃은 그날 밤바다에 살고 있었으면서.
그러나 화평을 다시 만나면서 스멀스멀 불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화평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자 기쁨이었던 만큼 또다시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이 윤에게 엄습한 것이었다. 오늘처럼, 술에 기대어 잠들면 아침까지 평온한 밤을 보낼 거라 생각했지만 또 한 번 악몽은 저를 그날의 밤바다로 이끌었다.
'하느님, 저는 오늘, 제 친구를 구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적은 너무나 강합니다. 간교하고 강력하여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제가 목숨을 다하여, 그를 위해 싸우는 동안 당신의 자비로 제 친구를 보호해주소서.'
그 지독하고 음울한 악몽 속에서 간곡한 기도를 반복해도,
'주님의 세력을 우리 발아래로 섬멸하여 더는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교회가 사탄을 해치지 못하도록 간구하여 주소서. 마귀와 사탄이 늙은 용과 뱀을 풀어 인간을 묶어, 피 흘리게 하고, 때리고, 유혹하고.'
세 사람의 삶을 파헤쳐 먹고 자란 악귀를 이길 수 없었고,
'이제 나 혼자 할게.'
'윤화평.'
멀어지는 화평을 향해 처절히 손을 뻗고, 무겁게 팔다릴 짓누르는 물속에서 발버둥을 쳐도,
'……그동안, 고마웠다.'
'윤화평!!!'
저 멀리 몸을 내던지고 바다 아래로 저물어가는 화평을 건져낼 수 없었다.
"헉, 허억……."
잘게 몸부림을 치던 윤이 희번뜩 눈을 떴다. 불안정한 호흡을 채 고르지 못한 도중에 귓가에 스며드는 숨소리가 있었다. 제 옆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화평의 숨이었다. 미친 듯 뛰어대던 심장박동이 순간적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화평이 몸을 뒤척이며 숨소리가 줄어들자 다시 한 번 심장이 쿵, 쿵,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온 정신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순간 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화평에게로 가까이 붙었다. 고개를 숙여 화평에게 다가간다.
화평은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있다.
그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환인 과각성 증상이었다. 신경계가 극도로 예민해졌고 머릿속엔 갖은 나쁜 기억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지금 이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화평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용히 잠든 화평의 호흡은 너무나 미약했고, 그건 구원이 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당신이 살아있음을 새기고 싶었다.
화평이 숨을 뱉고 삼킬 때마다 목울대와 가슴팍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풀어진 눈과 떨어진 고개가 화평의 목덜미로 향한다. 가지런한 목덜미에 코끝을 누르고 곧이어 느릿하게 입술이 닿았다. 목선을 따라 이어진 동맥의 박동이 입술 표피 위로 나직이 울린다. 그대로 잠든 화평의 목덜미에 몇 번이고 입술을 눌러댔다. 작은 자극 때문이었던지 화평의 호흡이 어렴풋이 선명해졌다.
조금 더. 조금만. 조금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머릿속엔 깊은 트라우마가 단단히 활개를 치며 상황을 재단해갔다. 악몽에 시달리다 한껏 땀에 젖은 손이 화평의 상의 아래로 밀려들어간다. 왼쪽 가슴을 쓸면 따뜻한 체온이, 세찬 심장박동이, 윤에게 안정을 선사했다.
꿈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마치 내가 그 인생을 살아오고 있었던 것처럼, 그 순간의 나로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할아버지 안의 박일도가 내게로 손을 뻗었고, 그 손을 되려 붙잡은 채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질러도 입 밖으로 목소리는 나오지를 않고. 박일도가 웃었다.
찢어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너는 내가 끝낼 거야.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죽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그 저주를 오롯하게 받아내고 있는 건 제 손에 목이 졸린 최윤인 것이다. 목 졸린 최윤의 질린 얼굴에 숨이 턱 막혀 팔의 힘을 풀어내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발, 제발 그만해. 차게 식은 최윤의 손이 제 팔을 붙든다.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에 소름이 끼쳐 몸부림을 쳐서야 최윤의 목에서 손이 떨어진다. 그대로 자신에게 쓰러지는 최윤의 몸이 축축하고 차갑다. 바닷물에 젖은 몸처럼 축축하다.
안 돼. 안 돼! 퍼뜩 놀라 눈을 뜨면 어둠뿐이다. 그러나 화평의 몸을 감싼 무언가는 사라지질 않았다. 귓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제 몸을 감싼 손길.
헉, 하고 숨을 멈춘 화평이다. 여기에 최윤이 자고 있었는데. 급하게 고개를 돌린다. 어둠에 적응된 눈이 한 인영을 잡아낸다. 손끝을 쥐락펴락했을 때 제가 붙들고 있는 건 없다. 화평은 그제야 멈추고 있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구나. 그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저도 모르게 제 몸에 붙은 것을 더듬는다. 손… 같은데. 순간적으로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깬 건 아니었던지, 사고 판단이 느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최윤?"
윤은 화평의 위에 올라탄 채 그의 몸을 멋대로 헤집는 중이었다. 화평의 호흡이, 심장박동이 크게 귓가를 때려올 때까지. 화평이 잠에서 깨자 숨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무엇에 놀란 건지 몰라도 화평의 심장이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화평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살아있음을, 그 심장박동을 탐하기 위해 입술을 목에 좀 더 깊게 묻는다. 윤의 입술이 화평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생경한 감각에 놀란 듯 움직이려 드는 화평의 몸을 억지로 눌렀다. 화평이 당황스러움에 윤을 밀어내자 몇 배의 힘으로 억압해온다. 그건 마치 부마자를 제압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화평의 호흡과 박동을 충분히 느끼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비이상적인 사고는 화평을 더 원할 뿐이었다. 허연 목덜미를 얼마나 빨아댔는지, 살결을 얼마나 물어대며 피부 아래 열 오른 혈관을 찾아댔는지, 화평의 목덜미 곳곳이 붉다.
화평의 상의 아래 머무르던 손을 움직여 왼쪽 가슴을 가만히 쓸어본다. 그 숨이 더, 더 짙어지길 바랐다. 고개를 들어 화평과 시선을 맞물린 채 가슴에서부터 복부, 복부에서 허리선을 따라 마른 몸을 움켜쥔다.
윤화평……. 나직히 부름과 동시에 윤의 고개가 떨어졌다.
이게 무슨.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음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 본능적으로 심장이 빨리 뛰면서 온몸이 뜨거워지는데, 되려 머리는 차게 식고 있었다. 어떤 오싹함과 함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잠자는 도중에 자신이 무언가라도 한 건지. 너무 많은 가능성에 불안함이 커져갔다. 최윤이 억센 힘으로 눌러와도 움직여야 했다. 화평이 떨리는 팔을 움직여 윤을 붙들고 흔들었다.
"최윤. 정신 차려."
"……."
"나 봐, 나 보라고!"
"……."
"혹시 내가 무슨 짓 했어?"
그날 밤, 그날의 바다에 갇혀 있던 윤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목소리. 화평의 힘 있는 음성에 넋이 나가있던 윤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헉. 여전히 급하게 몰아치는 숨을 내뱉으며 제 아래 깔린 화평을 내려다본다. 불안함에 깊게 잠긴 얼굴, 흔들리는 눈빛으로 피하지 않고 저를 마주 보는 윤화평. 오래전 그날들처럼. 두려움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처연한 그 눈으로. 강인한 그 눈으로. 저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윤화평이다.
윤화평. 윤화평이다.
화평의 몸에 올라탄 그대로, 윤의 고개가 푹 떨어져내려 화평의 어깨에 닿는다. 귓가에는 여전히 화평의 호흡이 머무른다. 가파른 심장박동이 차츰 잦아드는 동안 되뇌인 말이라고는 화평의 이름 석 자뿐이다.
모든 것을 잃은 저를 살게 했던 이름.
살고 싶게 했던 이름.
"윤화평."
"……."
"화평아……."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저 엉거주춤한 자세로 윤을 받아내고 있기를 잠시, 전에 없이 절절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윤을 보며 낮고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최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문득 그 땀이 차갑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열기도 순식간에 식어갔다. 화평은, 무너지듯 제 어깨에 기대는 윤에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했을뿐더러,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내가 자면서 무슨 짓을 했기에. 최윤은 왜. 무엇 때문에. 일파만파 꼬여가는 추론 과정에 머리에 두통이 일었을 때 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떨어졌다.
"……미안합니다."
윤을 그저 그렇게 말했다. 그 어떤 말도 아닌 사과 한 마디. 그 말을 끝으로 가만히 숨죽인 채 그저 화평을 끌어안았다. 내려앉는 정적 속에서 한참을 그렇게 멈춰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당신이 걱정하는 일 어떤 것도 없이, 조용히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조용해서…… 그래서, 당신이 살아 숨 쉬는 게 맞는지…… 판단이 흐려져서……."
차분하던 목소리에 흔들림이 일고, 설명하려 했던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나오기 시작한다. 차마 제 행동을 전부 설명할 길이 없어서. 열렸던 입은 금세 닫혀버렸다. 윤의 눈빛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윤이 말하기를 기다리던 화평은 어설프게 세워둔 상체를 완전히 세우고, 그대로 윤을 끌어안았다. 두 팔로 가득 품고 느리게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최윤."
"……."
"……다 괜찮아."
마자와 싸우면서 몸도 영혼도 갉아 먹혔는데, 그게 쉽게 나아질 리가 없었다. 박일도는 사라졌으나 그때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의 곁에 남아있는 것이다.
윤아. 너도 아직 그때에 머물러있구나. 아직 상처가 낫지 못했구나. 괜찮은 것 같더니, 괜찮지 못했구나.
화평이 살아있음을 알고 난 후에도 제 안의 불안과 싸우느라 곧장 다가가지도 못했던 윤이었다. 그날의 악몽에 시달릴 때면 화평이 사는 곳으로 달려가 발치에서 몇 번인가 당신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내일은 인사해야지, 내일은 대화를 해야지, 내일은 안아줘야지. 그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혼자 얼마나 무서웠느냐고. 곁에 그 누구도 남지 않은 일 년을 혼자 살아내며 얼마나 외로웠느냐고. 다정히 물어줘야지.
그렇게 공기 중에 쉽게도 바스라진 다짐을 반복하길 몇 주. 이제야 살아있는 당신 앞에 버젓이 섰으나 다짐과는 달리 먼저 안아 주지 못한 것이 한없이 미안했다.
결국 저를 먼저 안은 것은 화평이었고, 저를 위로하는 것도 화평이었다. 작고 평온한 당신의 품속에서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생각했다. 다시는 놓지 않겠노라고. 저린 손을 뻗어 화평의 손을 쥔다.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를 얽어 넣고 힘주어 움켜쥐며 되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겠노라고.
*
일 년 전, 당신을 향한 감정을 깨닫고도 입에 올린 적이나 있었던가.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도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지. 하지만 욕심낼 수 없는 사람이었고, 상황이었고, 위치에 있었다. 발목을 붙드는 여러 가지 것들을 핑계 삼아 마음을 모른 체했고, 끝내 눌렀으며, 그것이 괴로울 즘에는 그저 당신의 가는 길을 지켜보고 격려하는 위치에 서는 것으로 벅찬 사랑을 달래보았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라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자 부단히도 애를 썼다.
다만, 새벽마다 절뚝이는 마음을 가누지 못했고 짙은 허무에 목이 감긴 채 살았다. 갖은 속앓이 끝에 단 하나 바라는 것이 있노라면, 당신의 머리맡을 있는 듯 없는 듯 맴돌다 어둠마저 고요해질 때, 당신과 함께 숙연히 잠드는 것이라고.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라 생각했지만, 당신을 잃은 후에야 스스로 세뇌하듯 믿어왔던 것들이 자기 기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신을 잃은 후에야, 그렇게 너무 늦어버리고 난 후에야. 이 사랑은 끝내 누를 수 없는 형태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죄로 네 계절이 피고 지는 내내 화평의 생각에 잠겨 살았다. 벗어날 수 없는 단 하나의 지옥이었으나, 동시에 천국이었고, 그것이 구원인 것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일 년은 이렇게나 처절하고 아팠지만 뱉어낸 처절함은 여전히 모자랐다. 화평에게 마음껏 피어 내지 못한 감정이 끝내 아쉬웠고, 사랑이라 읊조리기엔 부끄러운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익숙한 사제관, 창밖 너머로 불빛을 채운 성당의 전경. 불이 꺼진 방 안. 벽에 걸린 십자가 앞에 느릿하게 몸을 낮춰 앉은 윤이 가지런히 손을 모으면, 이윽고 차분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오래전 당신께서 맞잡아 주신 손이 나를 일으켰습니다. 나를 살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그에 대한 감사와 답례로 당신이 주신 사랑과 복음을 전해야 했으나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의 끔찍한 악몽이 저를 옥죄는 탓이요, 저의 마음이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비하신 당신의 사랑 아래 살아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 스무 해가 넘도록 사람을 미워하고, 불신하고,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저는, 사제가 되고도 오롯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고해였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반쪽짜리 사제로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씁쓸하고 담담한 고해.
"하지만 이제는 당신께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진심을 다해 나누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삶을 살아내는 내내 마음 편히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주었을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사람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이래, 자신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곁에 있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불행과 비탄을 가져왔다 믿는 가여운 사람입니다. 삶의 고난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던 저와는 다르게,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고, 끝내 깊은 바다 아래 제 몸을 내던진 사람입니다. 한평생을 악마에게 쫓기며 참 많이도 아팠던 사람입니다. 높으신 주님. 저는 당신의 계획 아래 서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뜻임을 의심치 않음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았고, 그것을 온전히 깨우친 지금, 당신께서 주신 이름과 옷을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응당한 행동을 보이듯, 목 언저리에 채워둔 로만 칼라를 떼어내 책상 위에 올렸다. 느릿하고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듯. 조용한 걸음으로 십자가 아래 그것을 내려둔 윤이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가만히 감았다 뜨며 고백을 이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 당신께 사랑받았던 시간 동안 제가 배우고 느낀 평안을, 다른 이에게 나눌 기회를 주소서. 나는 이제 당신의 날개를 떠나지만 평생토록 당신을 향한 감사와 경외를 거두지 않겠나이다. 당신께서 주신 사랑이 나의 이유가 되었듯, 나의 사랑이 누군가의 이유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손이 이마와 가슴을 오가며 십자 성호를 긋는다. 호흡을 하듯 익숙한 손의 움직임, 한평생을 함께 해 왔던 성경과 매일을 단정히 입었던 사제복까지. 밤늦은 시간까지 불빛을 밝힌 성당의 건물이 창 너머로 흔들린다. 제 시야가 초점을 놓친 것인지, 바깥의 풍경에 일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 모를 시큰거림이 눈가에 차올랐다.
생애 처음으로 제 갈 길에 대한 주체성을 쥐었다. 이토록 강렬한 욕구를 느껴본 적이 있던가. 스스로 품은 신념에 이렇게나 올곧았던 적이 있던가. 이제는 어떠한 것에도 망설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살고 싶다.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와 위해, 누군가와 함께 남은 생을 살아내고 싶다. 삶에 대한 욕구에만 전념해본 적이 있던가. 이제는 누군가의 손을 먼저 잡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시는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윤이, 조금 축축한 눈으로 웃었다.
이후, 완전한 환속까지는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교구에 정식으로 서류를 올려야 했고, 심사 과정을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으며, 많은 사람들과 저마다의 작별 인사 같은 것을 나누어야 했다. 사제를 그만둔다고 해서 더 이상 하느님 아래 속한 사람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전과는 많은 게 달라질 것이었다. 준비 시간이 길어질수록 화평과 왕래할 시간은 자연히 줄어들었다.
화평에게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미뤄둔 채였다. 그저 교회 일이 바쁘다는 말로 일관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제 마음을 전함과 함께 화평에게 차근차근 내뱉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또 그가 부담이나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도록. 말과 마음을 무던히도 다듬어둬야만 했다. 환속을 위해 걸린 시간보다는 화평에게로 모든 것을 고백할 준비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하고 나면 화평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해본 적 없던 생각과 노파심들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다.
사제복 대신 사복을 입은 윤이 버스에 올랐다. 비포장도로를 내달리는 버스가 흔들린다. 창가 좌석에 자리 잡고 앉은 윤의 머리칼이 느릿하게 흔들림을 따랐다. 화평과 재회한 초겨울을 지나, 어느덧 완연한 봄이다. 따스한 햇살이 창 너머로부터 쏟아지고, 길게 펼쳐진 도로를 따라 이름 모를 들꽃과 나무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윤이 한결 산뜻한 기분으로 창문을 열었다. 계절을 따라 공기 중에 묻어나는 냄새가 달라지기 마련이라던데, 봄을 머금은 바람이 귓불을 스친다.
저 지평선 너머 바다 끝이 시선 끝에 걸리면, 담담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다. 넓고 푸른 바다. 화평을 앗아간 악몽의 장소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바다. 1초도 채 가지 않은 그 생각은 곧바로 그날 밤의 바다가 되었지만. 목이 텁텁해진 윤이 창문을 닫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윤도, 화평도, 길영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세 사람이 재회했고, 평온한 듯 사소한 일상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들은 남 모를 것에 지독하게 시달리고 앓을 것이었다.
윤이 앓는 후유증도, 악몽과 두려움과 불안도 여전했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그날의 바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는 삶을 살기로 했다. 아직도 무섭고, 두렵고, 끔찍하지만. 셋 중 그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날처럼, 그때처럼, 세 사람이 함께이면 될 일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평범한 일생을 보내는 것은 궁극적인 목표였고, 화평에게로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두 달 만에 찾는 화평의 집은 제법 화사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겨울이 지나자마자 득달같이 화분이나 마당 어귀에 꽃과 식물을 심은 화평의 부지런함 탓이다. 전화 통화를 하며 나 원예나 할까 봐, 하고 너스레를 떨던 화평에게 꽃한테 이상한 이름이나 붙이지 마세요. 전에 제 이름 붙인 식물, 얼어 죽었다면서요? 단호하게 키우지 않을 것을 종용했던 윤이었는데. 역시 고집하면 윤화평이라고. 마당 곳곳에 새롭게 피어난 생명이 한가득이다. 하얀 들꽃 무더기 주변에 서 있던 화평이 윤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어, 최윤! 이젠 숨기지도 않는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흔드는 화평이다. 오늘 가면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렇게 미리 운을 뗐던 탓일까. 유난히 반기는 것도 같고. 윤이 화답하듯 웃으며 화평에게로 다가선다. 그 언젠가 보다도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정말, 봄이었다.
윤화평 씨. 당신을 떠올리면 늘 겨울이 뒤따르곤 했어요. 모든 게 얼어붙는 계절. 지독하게 시린 계절. 그러나 태동하는 강한 생명력을 품은 계절. 그게 꼭 당신을 닮았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좋아서, 나도 당신을 따라 당신의 계절에 살기로 했던 걸 알까요. 당신과 함께 언제까지나 겨울에 머물기로 했던 걸 알까요.
이제 여긴 겨울이 아니에요. 우리는 봄을 지나고 있어요. 언젠가는 여름도, 가을도, 천천히 찾아오겠죠. 그러니 당신의 계절은 더 이상 겨울이 아니에요.
새 계절이 몇 번을 피고 저물어도 난 당신과 함께일 거고, 앞으로는 매 순간이 당신의 계절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