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향촌
나리

 화평이 운전대를 움직일 방향에 맞춰 꺾는다. 겨우 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을 길을 제외한 길에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이제 고향은 도시와 다를 건 건물의 높이 뿐이다. 저 멀리 산에 있는 고향집에는 아직도 눈에 띄는 전봇대조차 없다.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 나왔는데 결국에는 다시 돌아오게 됐다니… 화평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머리를 한 손으로 털고 운전대에 머리로 세게 누른다. 차에서 경적소리가 크게 울린다. 깜짝 놀란 화평이 급하게 머리를 뗐다. 밖에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자 멀리에서 아마도 키우는 보리가 잘 자라나 확인하고 있었을 할아버지가 저 멀리서 걸어 왔다. 화평이 창문을 내린다. 마을 떠나가는 줄 알았다, 요 녀석아!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외친다. 할아버지를 본 화평이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다 들려! 소리 지르지 말어! 화평이 창문에서 머리를 조금 더 떼 놓았다. 아, 할아버지 아까는 실수야 실수! 화평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렸다. 할아버지 아직도 일하고 있던 거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 힘들게 일하지 말랬잖아… 이제 나이도 좀 생겼으니까 너무 심하게 일하면 큰일 난다니까! 화평이 말을 잇자 할아버지가 화평의 머리를 주먹으로 약하게 쳤다. 이 녀석아 그런 말 하지 마라! 다 적적해서 하는 거 아니냐… 뭣하면 너나 도와라. 아직 할 일이 산더미야!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그 육광인가 누군가… 그 사람 차 빌린 게냐? 이럴 줄 알았다! 그 사람도 차 타고 다녀야 하지 않겠냐, 여기까지 내려와서 뭣하는 거냐!"

"아이… 할아버지, 내가 여기 내려오려고 빌린 거 아니겠어? 괜찮다니까. 나 면허도 있고 나중에 형이 내려와서 차 가지고 가기로 했어."

"그렇다고 진짜 내려오면 어떡하냐! 학교는 다 어쩌고… 으이구. 너희 아버지가 나한테 너 온다고 전해줬다. 빨리 집에나 들어가! 계속 여기 있지 말고."

 

 응, 알았어. 대답하고 화평이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한다. 차 안에 꾸역꾸역 넣어둔 짐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전에 온 몸으로 막았다. 하나하나 옮기던 짐들을 보니 화평은 자신이 정말 예전 그 고향으로 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예전에 같이 놀던 그 샌님같은 애도 있겠지… 화평이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어 잡념을 떨궜다. 걔가 있던 말던 무슨 상관이겠어. 안 만난 지 얼마나 됐는데. 기억도 못할 걸? 그렇게 혼자서 생각하다가 화평은 괜히 울컥해졌다. 벌써 화평이 집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할머니와 부모님이 마중을 나왔다. 추운데 왜 나왔어! 그냥 들어가 있지. 어차피 후다닥 들어갈 건데! 화평이 투덜거리자 아부지가 등을 가볍게 때리며 잔소리를 랩처럼 뱉었다. 그러곤 화평의 차 안에 들어있던 짐들을 같이 들어주었다. 아버지가 들어준 덕에 한결 가벼워졌다. 화평은 오래 살았던 집 안에 들어갔다. 예전부터 맡아왔던 향이 났다. 도시에서 맡았던 그런 퀴퀴한 냄새들을 한번에 잊어버릴 만 했다. 화평이 따뜻하게 데워진 바닥에 누웠다. 내일은 꼭 허리 아픈 할아버지 돕고 그 동안 못 봤던 마을을 마음껏 돌아다닐 것이다. 화평이 드러누운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듯 잠을 잤다. 고이 자는 탓에 들어온 부모님도 깨우지 않고 이불만 살포시 덮어주었다. 화평을 방 안에 두고 오랜만에 가족이 전체 다 모였다.

화평은 오랫만에 마을을 돌아다녔다. 예전에 있던 정육점, 문구점 등은 아직 건재했으나 즐겨 먹던 떡볶이 집은 없어진 듯 했다. 이 곳도 변한 듯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화평의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려졌다. 저기 있던 떡볶이 집에서 걔랑 같이 맨날 떡볶이 먹었는데… 아니 왜 하필 걔 생각이 난담? 화평이 원래라면 떡볶이 집이 있었을 건물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리를 봐도 저리를 봐도 다 그 애와의 추억만 있었다. 화평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후회했다. 심지어 저 비포장 도로에 핀 들꽃마저 그 애와의 추억이었다. 치사했다. 추억만 더럽게 많이 남기고 떠나버린 걸 그냥 내버려둔 게 너무 후회됐다. 화평이 먼저 떠났지만 그래도 그냥 떠나게 내버려 둔 게 너무 서러웠다. 어차피 돌아올 거면 그냥 버틸 걸 그랬나 보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차분한 머리에 날씨와는 조금 맞지 않는 듯한 얇은 야구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를 손에 가볍게 쥐고 앞 뒤로 흔드는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모양새였다. 최 윤…? 윤화평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야구 배트만 이리 저리 흔들던 남자와 앞에 있던 최 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남자가 화평을 돌아보았다. 화평의 표정이 세게 일그러졌다. 일그러졌다기 보다는 겨울의 날씨에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화평이 최 윤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어릴 적 같이 지내던 하나뿐인 친구이자 윤화평을 처음으로 마주봐준 사람이었고 의도치 않게 깨진 사람이었다. 화평의 얼굴은 마치 당근처럼 붉어졌다. 화평이 제일 싫어하는 당근 말이다! 화평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깐만이라는 한 단어만 멀찍이에서 들려왔다. 누가 보면 화평을 죽이려 든 줄 알겠다. 화평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달리다가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잔인한 놈 아직도 여기 있었다니! 화평이 가볍게 씩씩거렸다. 계속 달려 흐트러진 목도리를 다시 제대로 감고 마을 한 바퀴를 더 돌았다. 물론 그 애가 있을 장소만 쏙쏙 골라서 다녔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이 정도도 모르면 세월이 아깝지! 화평이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절망을 겪었다. 최 윤이 마루에 앉아 어머니가 주는 단 감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야 최 윤! 너 집에 가!"

"너는 오랫만에 만난 친구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연락도 안 돼서 속상했던 모양인데. 넌 친구한테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해? 엄마 같아도 속상했겠어."

 아니 그게요 어머니, 어머니 지금 속고 계시는 거예요… 화평이 속으로 담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어벙벙한 상태로 주먹만 꽉 쥐었다. 최 윤이 뻔뻔하게 감 한 개를 들어 한 입 더 먹었을 때 화평은 참다참다 못해 최 윤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야, 너 잔말 말고 따라와! 화평이 이끈 손길에 최 윤은 놀란 눈치였으나 거부감을 내뿜지 않았다.

"야 누가 우리 집에 멋대로 찾아오래?"

"그럼 누가 멋대로 아무 말 없이 도시로 올라가랬어?"

 최윤의 당당한 태도에 화평은 이 세상에 모든 어이를 잃은 기분이었다. 최윤의 표정은 당당함과 동시에 대답해 보라는 듯이 추궁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화평이 이번에는 졌다. 말 할 거리도 없었다. 그 때 당시 화평에게는 최 윤이 너무 답답했고 이유도 너무 터무니 없어서 최 윤에게 말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 겨우 먹을 거 하나 안 챙겨줬다고 두고가지 말 걸 그랬나 봐… 화평이 마른 입술을 적시고 침을 삼킨 뒤에 말했다.

"알 거 없어… 왔으면 됐지! 그리고 누가 연 끊자고 했어? 그냥 오랜만에 봐서 어색해서 연락도 못한 거지!"

"야, 우리가 몇 년 지긴데… 그럼 너 왜 아까 도망갔어?"

"그, 그건 오랜만에 만나서…"

화평의 목소리가 기어가듯 울리자 최 윤이 피식하고 웃었다. 이 새끼가 지금 웃었냐? 화평이 노려보자 최 윤이 표정을 굳혔다. 화평이 다짐한 듯이 말을 이었다.

"야 우리 적어도 엄마한테는 우리 싸운 거 비밀로 하자… 너 옛날에 우리 집 곶감 열 개나 훔쳐 먹은 거 아직도 나 말 안 했어!"

"네가 여섯 개 먹었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됐어.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해. 우리 화해의 악수나 하자. 이런 거라도 해야 너 또 도망 안 가지."

"너나 나처럼 가지 마!"

​ 화평이 최윤의 손을 잡았다. 화평은 굳게 다짐했다. 언젠가 이 놈 굴복시킬 거라고!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