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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한테만 그래?
아따

“16학번 최 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건조하고 딱딱한 신입생의 인사. 윤과 화평의 첫 만남은 그렇게도 평범했다. 와, 쟤 진짜 잘생겼네. 윤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곳곳에서 윤의 칭찬이 이어졌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 이마를 살짝 덮은 깔끔한 스타일의 앞머리까지 윤은 그 해 신입생 중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꼭 저 잘생긴 후배와 친해지겠노라 다짐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엔 화평도 포함이었다. 15학번 공식 인싸 윤화평이 독보적인 후배를 놓칠 리 없었다.

 

 

오티의 형식적인 절차들은 대충 흘려보내고, 윤과 화평의 학과는 2차로 향했다. 이것 역시 화평의 제안이었다.

 

 

“다들 갈 거지? 술 못하거나 이런 자리 싫어하는 사람은 중간에 몰래 가도 신경 안 쓰니까 첫 잔만 같이 건배하자. 응?”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해서는 해맑게 웃으며 술자리를 제안하는 화평의 모습에 다들 못 이기는 척 화평을 따라 근처 고기 집으로 향했다. 아, 윤화평 너 또 거기 가지? 신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화평에게 동기들이 투정을 늘어놓았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화평은 과 회식만 했다하면 이 식당을 고집했다. 그래서 잠깐 이 식당이 사실 윤화평네 가족이 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 식당에 가는 이유는 대부분의 가격을 화평이 지불하기 때문이었다. 야, 16학번 니네 저 선배 잘 보여. 쟤 갑부야. 맨날 밥 사줘. 제 뒤에서 들려오는 동기들의 장난에 화평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받아쳤다.

 

 

“갑부 같은 소리하네. 내 별명 알바몬인거 모르냐?”

 

 

화평의 장난에 금방 띄워진 분위기는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15학번, 16학번 할 것 없이 뒤섞여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했고, 그 분위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화평이었다. 야야야, 너 취해써. 저 쪽 가서 좀 앉아이써. 자기가 더 취해놓고 취한 사람들 챙기기. 화평의 술버릇은 참 독특했다. 테이블 여러곳을 왔다 갔다 거리며 취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거나 눈이 풀려 있는 신입생들을 구석 테이블에 앉혀 놓은 화평은 다시 제 자리로 가 술을 마셨다. 취했다며 그만 마시라는 동기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여튼 윤화평 고집을 누가 이겨.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하며 제 앞에 놓인 소주를 원샷 하는 화평을 보며 동기들은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때, 화평의 레이더에 윤이 들어왔다. 화평은 망설임 없이 윤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어! 아까 그 잘생긴 후배. 맞지? 이름이 머였더라. 최, 최,”

 

“최윤이요.”

 

“어어 마져. 이름도 잘생겼네. 씨잉 키도 크고. 하나님 뭐 이렇게 불공평해.”

 

 

어디선가 나타나서는 제 할 말만 쫑알쫑알 떠들고 있는 화평을 윤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평은 여전히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하나님 너무하다느니, 넌 어떻게 없는 게 없냐느니 투덜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윤과 화평의 시선이 맞닿았다. 후에 윤이 회상하기로는 이 순간에 자신이 화평을 좋아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동그란 얼굴에 강아지 같은 눈망울, 알코올 때문에 붉어진 양 볼을 한 화평에 제 마음을 다 줘버린 것이 분명했다.

 


“선배는 귀여우시잖아요.”

 

“나아? 귀엽긴 무슨. 우리 잘생긴 후배님 술 적당히 마시구, 취하면 쩌어기 테이블 가서 자.”

 

 

화평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의 얼굴에 또 한 번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평이 살짝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탓에 윤은 자신도 모르게 화평의 팔을 잡았다. 아이구, 미안해. 내가 쫌 취했나봐. 화평은 괜찮다는 듯 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다들 잘 놀다가. 나 먼저 가께.”

 

 

아까 그렇게 그만 마시라고 할 땐 듣지도 않더니 혼자 쏙 빠진다고 투덜대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화평은 식당을 나갔다. 그리고 윤은 그런 화평의 뒷모습을 진득이 쫓았다. 맘 같아선 화평의 집까지 화평을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둘 사이가 아직 멀었다. 그래서 윤은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하면 화평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른 16학번들 보다 더 화평의 눈에 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끝에 뜻밖의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어찌 보면 실패 위험성도 높은 도박 같은 방법이었다.

 

 

 

 

 

 

 

 

 

 

 

*

“안녕하세요. 윤화평 선배님.”

 

 

또 존댓말이야 또. 잘생겼지만 까칠해 보일 것 같다는 첫인상과 달리 최윤은 금방 동기들과 어울렸다. 많이 친해졌는지 웃기도 잘 웃었고, 가끔씩 먼저 장난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언제 말을 놨는지 내 친구들 이랑도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근데 왜 나한테만 이러냔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최윤은 꼭 나한테만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화평이 형이 아니라 윤화평 선배님. 다른 애들한텐 형, 같이 점심 먹을래? 하면서 내가 밥 먹자고 하면 언제나 선약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장난치듯 최윤 에게 물어 봤었다.

 

 

‘야, 최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 내가 밥사주께.’

 

‘아니요. 선배님이 저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선약이 있어서..죄송합니다.’

 

 

이 씨..하마타면 욕할 뻔 했다. 차라리 이유라도 알면 해결을 할 텐데 이유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주변 동기들한테 얘기해 봐도 에이 윤이가 얼마나 친화력 좋은데. 너 때문에 낯가리는 거겠지. 하는 반응 밖에 없었다. 내 잘못 아니라구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기분은 금방 축 쳐졌고, 소주 생각이 났다. 이런 날엔 소고기에 소주지. 휴대폰을 꺼내 바빠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애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은근슬쩍 최윤도 데리고 오라고 넌지시 얘기했다. 혹시 아나. 술 마시면 나한테도 장난 쳐줄지.

 

 

남자 놈들 열 명 정도가 모이다보니 술자리는 금방 뜨거워졌다.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소주의 개수도 계속 늘어났고, 목소리의 크기도 점점 커졌다. 평소 같았다면 15학번 인싸 윤화평답게 여기 저기 다니며 술을 마셨겠지만 오늘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마 저 쪽에 앉아서 나한텐 눈길 한 번 안 주고 있는 최윤 때문이겠지. 아까부터 몰래 최윤을 쳐다봤는데 정말 나 빼고 모든 애들이랑 다 잘 놀았다. 지가 먼저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남들이 물어보는 말에 능청스럽게 대답도 잘했다. 쟨 진짜 나한테만 왜 그러지. 술을 마셔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섭섭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혼자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내 주량을 넘어버렸고, 바람이나 조금 쐬면 취기가 조금 가실까 싶어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어디 가세요?”

 

 

네 목소리였다. 내게 말 한마디 아니 눈길 한 번조차 던지지 않던 너였기에 내 움직임을 눈치 채고 심지어 물음까지 던진 네가 조금은 신기했다. 어? 아 그냥 바람 좀 쐬려고. 둘러댈 만한 적당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아 대충 아무 말이나 던진 나는 서둘러 문밖으로 나갔다. 물론 닫힌 문 뒤에서 또 다른 발자국 소리가 따라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같은 대학생 무리들도 있었고, 심야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도 있었다. 조금 달아올라 붉어진 볼에 찬 공기가 살짝 스치자 방금 전 들었던 서운한 마음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네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선배. 괜찮으세요? 갑자기 나가시길래.”

 

 

얘가 왜 나왔지? 웬일인지 평소와 달리 다정함이 살짝 섞인 네 존댓말에 머릿속에 수 십 개의 물음표가 그려졌다. 평소엔 뭐 하나만 물어봐도 아니요. 괜찮아요. 없어요. 만 달고 살던 최윤이 먼저 질문을 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어?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왜 나왔어.”

 

“선배 걱정돼서 나왔죠. 오늘 계속 혼자 술 드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울컥했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혼자 잘 놀더니 이제와서 무슨 걱정? 그래서 따지듯 최윤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진 말투였다.

 

 

“걱정은 무슨. 혼자 잘만 놀더니. 너 나한테 관심 없잖아. 근데, 왜 나한테만 그래?”

 

 

최윤이 웃었다. 물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미소였지만 내 앞에서 웃은 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지금 내 앞에 있는 최윤은 평소의 최윤 같지 않았다. 근데 왜 웃어. 내 말이 웃겨? 나는 여전히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최윤을 쳐다봤다. 그 때, 갑자기 최윤이 표정을 굳혔다. 평소보다 더 냉해진 표정이었다.

 

 

“제가 왜 그러는 것 같으신데요?”

 

“뭐? 야,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너 맨날 나한테만 존댓말 쓰지 나한텐 먼저 말도 안 걸고 밥 먹으러 가자고도 안 하고 술자리에서도 다른 애들이랑은 건배도 하면서 나하고만 안 하고. 진짜 짜증나 최윤.”

 

 

여태까지 쌓였던 속상함, 억울함,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래서 취중이라는 핑계로 평소라면 못 했을 말을 최윤 에게 쏟아냈다. 내가 얼마나 신경 쓰였는데. 근데 최윤은 내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안 했다. 웃지도 않았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마음에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는데 그제야 최윤이 입을 열었다.

 

 

“선배는 왜 그것 때문에 서운하신데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순간 짜증나서 한 대 칠 뻔했다. 내 질문엔 하나도 대답 안 해놓고 자꾸 되묻는 꼴이라니. 그런데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최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장난으로, 날 놀리려고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해봤다. 내가 왜 섭섭하고, 서운한지. 최윤은 가만히 서서 대답을 생각하는 나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문의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나한테만 거리를 두는 후배 때문에 섭섭하다기엔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생각해 보니 이게 그렇게 서운할 일이었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최윤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왜 서운한지 나도 몰라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최윤은 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말했다.

 

 

“잘 생각해보세요. 선배가 왜 저한테 서운했고, 자꾸 제가 신경 쓰였는지. 그리고 그거 알게 되면 대답해주세요. 그럼 저도 제가 왜 선배한테만 그랬는지 대답해드릴게요.”

 

 

최윤은 그 말만 남기고는 뒤돌아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쟤 그냥 집에 가는 거야?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2학년으로 올라오며 끊었던 담배가 절실하게 땡기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담배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야, 깡. 할 말 있어. 잠깐 나와봐.”

 

“아 씨, 이 시간에 갑자기 나오래. 죽을래?”

 

 

 

강 길영. 나랑 같은 15학번. 나랑은 중학교 때부터 알았다. 어쩌다보니 같은 학교에 들어왔고, 고민 상담 해달라고 찡찡 댈 때마다 잔뜩 짜증을 내면서도 한 번도 안 나온 적 없는 그런 친구다. 얘라면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언제나 내가 했던 고민들에 가장 멋진 해답을 줬던 사람이니까.

 

 

 

 

 

 

 

 

 

 

*

 

 

“또 뭔데 또. 친구? 애인? 아니면 바닥을 치고 있는 니 학점?”

 

“아니. 이번엔 후배.”

 

“뭐? 후배? 가지가지 한다. 이번엔 대체 뭐가 문제냐?”

 

“야, 내 말 잘 듣고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해봐.”

 

“미쳤나 이게. 듣기 평가냐? 진짜 별 말도 안 되는.. 아, 알았어. 얘기해봐.”

 

 

처음 최윤을 만났을 때 얘기부터 어제 그 일까지. 모든 일을 길영에게 털어놨다. 처음엔 나름 흥미로운 듯 -흥미로운 척인지도 모르겠지만- 듣던 길영의 표정이 점점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중간 중간 안 들리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리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 마디 했다.

 

 

“너 걔 좋아하냐?”

 

“뭐????”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내가. 좋아해? 최윤을? 이건 정말 단 0.1%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있었는지 여전히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한 길영은 내 머리를 한 대 툭 쳤다.

 

 

“아, 왜 때려!”

 

“윤화평아..넌 이걸 진짜 몰라서 물어 보는 거야?”

 

“어. 내가 알면 진작가서 최윤이랑 얘기했지.”

 

“너 고등학교 2학년 때 기억나? 그 네가 엄청 좋아했던 니네 반 반장. 머리 길고, 피부 하얗고 예뻤던 애.”

 

“기억나지. 걔 진짜 좋아했었는데. 근데 걘 갑자기 왜.”

 

“걔가 지 생일파티인지 뭔지 한다고 했을 때 너만 안 불렀었잖아. 그래서 너 막 술 마신다고 난리 치고.”

 

“아, 그 얘기를 왜 해. 쪽팔려.”

 

“너 그 때 걔 좋아해서 서운해 했던 거잖아. 걔가 다른 애들 다 불러놓고 너만 안 불러서. 이번에도 똑같은 거 아니야? 최윤이 네 동기들한텐 잘 해주는데 너한테만 딱딱해서.”

 

 

저렇게 말하니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길영의 말대로라면 내가 최윤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 윤화평이 최윤을 좋아해서 섭섭해 한 거였다. 길영의 대답을 듣기 전보다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윤화평 21년 인생 동안 남자를 좋아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상상해봤다. 최윤 이랑 연애하는 상상. 같이 데이트 하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는 뭐 그런 평범한 연애? 어, 뭐야. 섰다. 미쳤어 윤화평. 지금 최윤이랑 섹스 하는 상상 하면서. 머리보다 빠른 몸의 반응에 당황스러워 들고 있던 소주잔도 놓쳤다. 강길영은 어떻게 알았는지 옆에서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과 아랫도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아 쪽팔려.

 

 

“야, 니가 계산해. 나 먼저 가께.”

 

“저게 맨날 이런 식으로 도망가고. 죽는다 윤화평.”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아까 충격이 커서 그런가. 충동적으로 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말 그대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뭘 하고 있었는지 최윤은 신호음이 3번도 채 끝나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내 전화 기다리고 있었나.

 

 

“야, 최윤. 너 지금 나올 수 있어?”

 

“네. 선배 어디신데요? 갈게요.”

 

 

위치를 얘기하니 금방 온다는 최윤의 대답에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최윤을 기다렸다.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윤화평 진짜 최윤 좋아하는구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에 괜히 신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조금씩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셨다. 얘 언제 와. 기다리다가 피 말라 죽겠네.

 

 

“선배, 저 왔어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최윤이 앞에 와 섰다. 새삼 키 진짜 크구나. 고개를 들고 빤히 쳐다보니 최윤은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대답 하려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대답 하려고 불렀어. 근데 너 듣고 나서 놀라면 안 돼. 나 진짜 진지하게 고민한 거야.”

 

“알았어요. 말 해주세요.”

 

 

막상 말하려고 하니 또 입이 안 떨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최윤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서 최윤이 나를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기가. 애꿎은 후드끈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최윤이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선배, 저 선배가 무슨 얘기 하려고 하는지 알아요. 괜찮으니까 얘기 해주세요.”

 

“윤아,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랬나봐. 내가 너 좋아해서 그렇게 섭섭하고 서러웠나봐.”

 

“그럼 이제 제가 대답할 차례죠. 왜 선배한테만 그랬는지.”

 

 

잠시만. 잠깐만 있다가 얘기해. 숨 쉬는 방법이 뭐였더라 할 정도로 떨린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다. 좋아한다는 한마디가 너무 어려워서, 내 대답을 들은 최윤의 반응이 무서워서.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있으니까 최윤이 등을 토닥거려줬다. 얘가 이렇게 따뜻한 애였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최윤의 손이 오늘따라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선배, 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세요?”

 

“언제 였더라. 우리 오티 때?”

 

“그 때 선배 취하셔서 저한테 잘생긴 후배라고, 없는 거 하나도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아 갑자기 그 얘길 왜 해! 사람 민망하게..그 때는 취해서.”

 

“그 때부터 좋아했어요. 저랑 마주친 선배 눈이 너무 예뻐서, 강아지 같이 웃는 선배가 귀여워서. 그래서 그랬어요. 정 많은 선배라면 분명 제가 그렇게 대했을 때 신경 쓸 것 같았고, 제 생각 할 것 같아서요.”

 

“야, 너, 그러니까 네 말은.”

 

“좋아해요 선배.”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려 터져버리기 직전이었다. 최윤이 나를 좋아한댄다. 그것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문득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 진짜 짜증나 최윤..내가 혼자 얼마나 걱정 했는줄 알아? 다른 사람한텐 다 잘해주는 애가 나한테만 맨날 네. 아니요. 기껏 용기 내서 밥 먹으러 가자고 해도 선약 있다고 하고.”

 

“미안. 진짜 미안해요 선배.”

 

 

최윤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행복함이 동시에 쏟아졌다. 용기 내어 뱉은 고백이 상처가 되어 돌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윤은 여전히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아온 정적이었다. 아까 전 찾아왔던 정적보다 조금 더 설레고, 따뜻한 공기가 물씬 느껴졌다. 그때,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던 네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한 번 맞닿은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고, 너는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우리의 첫 키스는 첫만남 만큼이나 평범했다. 하지만, 평범함에서 나온 특별함은 더 눈부시고, 아름답다. 그래서 최윤과 나의 시작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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