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른쪽 눈에 키스를
개
"윤화평 씨. 그것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뭐를?"
"그, 칼 위에 올라서는 거 말입니다."
"아, 작두?"
윤화평은 아무렇지 않게 흰 쌀밥을 한 술 떠먹으며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깨작대는 윤을 쳐다봤다. 굿판이 벌어졌던 날이면 화평은 꼭 윤과 신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굳이 나가서 먹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같이 사는 집의 냉장고는 사람 사는 집 같지 않게 휑하고, 나가서 먹으면 돈만 드니 굿 덕에 찬거리가 잔뜩인 신당에서 저녁을 먹는 게 훨씬 나았다.
"그걸 안 하면 굿을 어떻게 하냐?"
"볼 때마다 조마조마하단 말이에요. 그것만 좀 어떻게 안 하면 안 됩니까?"
화평이 무당이 된 건 이제 겨우 햇수로 1년의 일이었다. 바다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화평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눈을 뜬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신병에 시달렸다. 보여서는 안 될 오른쪽 눈으로 자꾸 이승의 존재가 아닌 것들이 휘몰아쳤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냥 이대로 살아볼까 하기도 했지만 오른쪽 눈에서 느껴지는 잠들지 못할 정도의 통증은 화평을 기어이 내림굿으로 이끌었다. 내림굿을 받으러 간 용한 무당이 이야기 하길 '동해의 용왕신이 오셨다'고 했다. 하필이면 동쪽 바다를 지키는 신이라니, 혹시나 그녀가 본 것이 박일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내림굿을 받기 전,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지만 여자의 말에 의하면 그것과 박일도가 같은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박일도가 아직도 제 몸에 남아있는지, 그 용왕신인지 뭔지 하는 것의 기에 눌려 숨어 있는지, 아니면 정말 동쪽 바다 어딘가로 영영 떠내려가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평은 그녀의 밑에서 내림굿을 받고 무당의 삶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가끔 혀를 찼다. 남자가 음기가 강해서 그런 거야. 팔자가 사내 놈의 팔자가 아니구만. 남자한테는 잘 들지 않는 아주 큰 신이 오셨어. 그래서 인생이 그리 꼬이고 꼬인 게야. 화평이 여자에게서 독립해 홀로 신당을 차린 건 윤과 길영에게서 멀어지고 난 지 1년이 되던 즈음이었다. 그리고 초짜 무당 화평의 집에 거짓말처럼 검은 사제복을 입은 최윤과 녹색 셔츠를 입고 머리를 묶은 강길영이 나타났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셔. 내가 복채를 꽁으로 받아먹는 줄 아냐 넌? 그리고, 사제라는 놈이 할 일도 없어? 남의 굿판에는 왜 매번 와서 훼방이야?"
"훼방이라뇨. 꼭 말을 그렇게 밉게 해야겠습니까? 걱정 돼서 오는 거잖아요."
"거, 진짜. 너나 강형사님이나 안 보는 사이에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가지구."
화평은 잘 익은 동그랑땡을 뒤적였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음식인데 어쩐지 오늘은 잘 넘어가지 않았다. 화평은 밥을 반절이나 남겼다. 왜 더 안 먹습니까? 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제 몫의 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렸다. 배불러. 화평이 중얼거리자 윤의 총알 같은 잔소리가 또 화평의 발치에 쌓인다. 제가 밥은 꼭꼭 잘 챙겨먹으랬죠. 안 그래도 작고 마른 사람이. 요즘 살 더 빠진 거 아닙니까? 소고기 사올까요? 사와도 또 잘 안 먹고 그럴 거면서. 밥투정 합니까? 이 나이에? 화평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귓구멍을 파냈다. 아우, 귀 따가워! 몸서리를 치며 흘겨보자 그제야 윤의 잔소리가 멎는다.
"그래도 좀만 더 먹어요."
그 잔소리가 영 밉지 않다는 게 요즘 윤화평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 * *
"야, 윤화평 안 되겠어. 너 최윤이랑 살림 합쳐."
"에?"
기어이 최윤은 일요일마다 화평의 신당으로 찾아오는 길영에게 '요즘 윤화평 씨가 살이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로 전화의 서두를 꺼낸 게 분명하다. 아니, 형사 월급이 요즘 그렇게 잘 나와? 이 소고기는 다 뭐야? 화평이 됐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길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길영이 누구에게 꿈쩍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윤이 부루스타를 꺼내왔고 길영은 신당의 제기들을 꺼냈다. 형사님! 그게 무슨 어? 사람 먹는 접신 줄 알어? 먹기 싫다고 떼를 쓰던 화평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산 사람이 제기에 먹을 순 없잖아. 결국 윤화평은 비척비척 일어나 윤과 신당에서 밥을 먹을 때에나 쓰는 식기들을 꺼내왔다. 윤은 이미 부루스타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고집들도 참. 윤과 길영은 못 보는 사이 더 고집스러워졌고, 더 정 많은 인간들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림을 합치라는 소리까지 나올 줄이야. 윤화평은 길영의 말에 하마터면 집고 있던 소고기 한 점을 툭 떨어뜨릴 뻔 했다. 아까운 고기 버릴 뻔 했네! 그게 무슨 말이야, 강형사님? 심지어 언어 선택도 묘하게 요상했다. 살림을 합치라니. 그게 꼭 결혼하라는 소리처럼 들렸는데. 박수 무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윤화평과 최신부에게 결혼이란 되도 않는 소리였다.
"야, 최윤. 넌 왜 가만히 있냐?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안 그래도 이 쪽 교구로 옮겨달라고 말씀드린 참이었습니다. 이 쪽 교구 신부님 중 한 분이 얼마 전에 선교를 하겠다고 가셔서 마침 자리도 비어 있어서, 아마 금방 윤화평 씨랑 같이 살 수 있을 겁니다."
"얼레? 이게 뭔 소리래?"
고집 센 길영은 윤화평의 말을 절대 들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윤의 말이라면 또 모르지. 화평은 마지막 동앗줄이라도 붙잡듯 고기를 척척 뒤집는 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윤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치 이미 길영과 윤은 이야기를 마친 상태인 것 같았다. 살림을 합치라는 아주 중요한 사안을 윤화평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 정한다는 게 말이 돼? 윤화평은 결국 소고기 한 점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이씨, 아깝게. 길영이 빠른 속도로 상에 떨어진 소고기를 주워 입에 밀어넣었다.
"안 그래도 윤화평 씨를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줄곧 생각해온 일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어떻게 일이 잘 맞아떨어져서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아니, 최윤. 나는 한 번도 그러자고 동의한 적 없다니까?"
"싫다고 하실 거 어차피 다 알고 있었습니다. 동의를 구한 적 없습니다."
윤은 여전히 무던한 표정으로 윤화평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잘 익은 소고기를 윤화평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윤화평은 너무도 뻔뻔한 윤의 대답에 실소만 터뜨릴 뿐이었다. 내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니. 날이 갈수록 길영과 윤은 점점 더 윤화평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세 살배기 애야?"
"어. 삼십이개월 애기지. 우리 화평이."
"아, 징그럽게 왜 이래?"
"집도 생각보다 넓던데요. 방도 한 칸 더 있는 것 같고. 정 뭐하면 제가 거실에서 지내면 됩니다."
윤화평은 길영과 윤이 왜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았다.
"난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 너네가 나 걱정한다고 하면 우리 용왕님이 코웃음 쳐! 지들 앞가림도 못하는 게 나 걱정한다고."
"코웃음 치든 말든. 거 용왕님도 웃겨. 어? 용왕이 박일도 하나 못 없애가지고, 애를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어 놓고는 이제야 너를 살리네 마네. 됐다 그래! 용왕이고 뭐고. 이젠 나랑 최윤이 지킬 거야."
길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갑자기 밥덩이를 푹푹 떠 제 입에 꾸역꾸역 밀어넣기 시작했다. 아이, 참 형사님도. 우리 용왕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그러네. '네 이놈!' 하고 호령해야 할 용왕님도 어쩐지 잠잠했다. 고기 굽는 소리와 길영의 숟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에 연기처럼 가득했다. 죄책감. 그 단어가 화평의 혀 끝에 쓰게 맴돌았다.
"여튼, 최윤이랑 얘기해서 빨리 날 잡어. 알겠어?"
"아우, 됐다니까! 형사님 몸 관리나 잘 해요. 어? 우리 용왕님이 그러는데 올해에는 차 좀 조심하랍니다. 어? 운전대는 되도록이면 고형사님한테 맡기고. 특히 급하게 출동할 때는 더! 알았죠?"
"됐다 인마! 내가 무사고 10년이야."
해가 저물었다. 윤이 설거지를 마치는 동안 길영은 떠날 채비를 했다. 채비랄 것도 없었다. 화평의 좁은 신당 안을 한 번 휘둘러보고, 꺼진 초에 불 한 번 붙여 놓는 게 끝이었다. 길영은 신발을 꺾어 신으며 길을 나섰다. 자고 가라니까! 화평은 좁은 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길영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목이 빠져라 쳐다봤다. 됐어! 내일도 출근이야! 멀리서 메아리치는 화평의 목소리를 또 어떻게 들었는지 길영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화평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흘겼다. 옷도 새까매가지고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같아. 화평은 신발을 툭툭 털어 벗고는 신당으로 다시 들어섰다.
"아, 잘 곳도 없는데 왜 자고 가래?"
"그럼 아까는 왜 강형사님한테 자고 가라 그랬습니까?"
"하여튼 말은."
들고 온 가방이 구마용품인 줄 알았더니 갈아입을 옷이었는지. 윤은 신당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주섬주섬 짐을 풀었다. 화평은 제기를 닦고 이불을 꺼냈다. 집에서는 잠이 오지 않을 때가 많아 종종 신당에서 쪽잠을 쓸 때나 깔고 자는 솜이불이었다. 깔고 자는 것도, 덮고 자는 것도 한 채뿐이라 저 길쭉하고 거대한 최신부를 눕히면 제 몫의 자리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좀 씻고 오겠습니다. 정적 속에 툭 던져진 최윤의 한마디가 무척이나 묘했다. 무슨 씻는다는 말을 저렇게 부끄러워하면서 해? 화평은 생각 없이 뒷목을 벅벅 긁었다가 손을 내렸다. 화평은 제 양손을 서로 맞물려 잡았다. 몸이 간지러울 때면 긁지 않기 위해 제가 제 손을 묶곤 했다. 맥주 캔 하나 따기 힘들 정도로 뭉툭하게 짧은 손톱도 그 때문이었다. 화평은 애꿎은 이불만 발로 슥슥 밀어 폈다. 어쩐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건 아무래도 윤이 남기고 간 그 어색한 말들의 모서리가 이제는 많이 동그랗게 무뎌져 있기 때문일지.
"윤화평 씨는 안 씻습니까?"
"씻어야지. 옷도 갈아입고."
"제가, 등 밀어주겠습니다."
"...갑자기?"
"혼자 살면서 등은 제대로 못 씻었을 거 아닙니까. 이럴 때 닦아야죠. 사우나도 못 다니면서."
"아우, 됐어. 오늘 진짜 왜 이러실까?"
씻고 나온 윤은 편한 옷차림이었다. 늘어진 회색 긴팔 무지티를 입은 모습을 보니 화평은 데자뷔를 느꼈다. 박일도를 찾아다니겠다고 함께 뛰어다녔던 그 시절, 연락도 없이 문득 윤의 집을 찾아갔을 때 윤은 종종 그런 모습을 하고, 젖은 머리를 하고 화평을 반기곤 했었다. 흰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터는 윤이 화평에게 화장실로 들어가라는 듯 눈짓했다. 하평도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 문을 닫고 잠그려는데 문 틈 새로 허여멀건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툭 튀어나왔다. 귀신인 줄 알았잖아! 그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민 건 밍밍한 표정의 최윤이었다. 도대체 왜 문을 도로 열었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뭐? 등을 밀어줘? 윗옷을 끌어올려 벗으려던 화평의 손이 허공으로 툭 떨어졌다.
"왜 갑자기 내외하고 그러십니까? 사우나 가서 등 밀어주고 이러는 거, 한두 번쯤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 그럴 수 있는 일이지. 근데 너와 내가 그런 적이 있었냐?"
"없었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해보자 이겁니다."
"이게, 이게. 강형사 옆에 붙어다니더니 고집만 세지고 뻔뻔함만 늘어가지고는. 거짓말도 못 하던 최윤 어디갔어? 이제는 아주 농담도 능구렁이처럼 잘 쳐?"
"빨리 벗으세요."
어떻게든 넘어가려던 상황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진 건 세상 진지한 표정을 한 최윤 때문이었다. 문을 닫은 최윤의 손이 다칠까 힘을 쓸 수도 없었다. 물론 힘을 쓸 생각도 없었다. 아, 됐어! 안 씻고 자지 뭐. 하루 안 씻는다고 안 죽어. 화평은 결국 화장실에서 나와 이불로 기어 들어갔다. 문을 잡고 있던 윤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등을 보여주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깟 등 한 번 보여주면 어때서. 하지만 화평이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윤화평 씨."
"아, 왜! 얼른 들어와, 잠이나 자."
"벗으세요."
"뭘 벗어, 벗기를."
"대체 왜 숨기는 겁니까? 예? 내가 모를 게 뭐가 있다고."
윤이 몰라서 보여주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왜 부러 머리를 길러 오른쪽 눈을 가리고 다녔을까. 여름에도 꿋꿋이 긴 팔 옷을 입고 다녔을까. 꼭 얇은 겉옷이라도 하나씩 걸쳐 입고 다녔을까. 남들이 다 알아도 보여주기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초등학교 친구를 굿하는 집에는 들이기 싫어 한 번도 데려오지 못했던 초등학생 윤화평처럼. 친척 집에 얹혀 사는 걸 뻔히 다 아는 담임 선생에게 이번 상담 때 아버지가 일이 바쁘시대요 라고 둘러댔던 중학생의 윤화평처럼. 대학 같은 건 관심도 없다는 걸 뻔히 아는 할아버지에게 아우, 할아버지. 요즘은 옛날이랑 달라서 대학 안 가도 다 먹고 살어, 라고 둘러대던 고등학생의 윤화평처럼.
하지만 최윤은 정말 강길영과 붙어다니며 고집을 배웠는지. 끝끝내 이불을 둘둘 말아 누워 있던 화평의 위에 올라타 화평을 감싸고 있던 솜이불 한 채를 걷어냈다. 야, 최윤! 최사제! 너 왜 이래? 바득바득 발버둥을 치고 팔을 휘젓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제 손에 맞아 윤의 몸에 생채기라도 날까 싶어 버둥거리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분명 뛰는 것도 종이인형 같았던 놈이 1년 새 운동이라도 했나. 화평은 제 손목 두 짝을 하나로 겹쳐잡아 누르는 윤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입고 있던 긴팔 옷이 기어이 가슴팍까지 딸려 올라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화평이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보다 더 심하네요."
"그러니까 내가 보지 말라고 했잖아."
"긁지 좀 마세요. 이게 뭡니까, 이게."
윤의 손가락이 천천히 화평의 몸을 쓸었다. 산 채로 부적이 되어버린 인간 윤화평의 흔적들이다. 찢어졌던 흉터들은 아물었지만 그 모양이 선연하게 부풀어 못나게 들쭉날쭉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손톱으로 잔뜩 할퀸듯한 생채기도 여럿이었다. 피가 멎고, 딱지가 앉고, 새 살이 돋을 때의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밤낮 없이 긁어대던 윤화평이 남긴 또 다른 상흔이었다. 윤은 이내 제가 잡고 있던 화평의 손목을 놓고 이번에는 화평의 작달만하고 통통한 손을 확인했다. 너무 바투 깎아 아플 것만 같은 뭉툭한 손톱을 토르륵 윤의 손이 문지르고 지나갔다. 화평이 탄식을 내뱉으며 잔뜩 힘을 싣고 있던 몸을 편하게 내려놓고나서야 윤은 천천히 화평의 몸을 감상하듯 손으로 한 자 한 자 짚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서 안 벗는다고 했잖아."
"내가 이래서 벗으라고 한 건데."
"대체 안 본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강형사님한테 고집 부리기 특훈이라도 받았어 최윤?"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당신이 그렇게 눈앞에서 죽어버리고 난 후에.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유하게 농담으로 분위기를 틀어보려던 화평의 단어가 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갑자기 신당에 찬바람이 불었다. 얼음이 얼어 핀 성에꽃 같은 공기가 따갑게 화평의 피부를 찔렀다.윤의 손가락이 쉼없이 점자처럼 부풀어오른 화평의 흉터들을 읽어내려갔다. 윤화평은 숨을 참았다. 최윤의 지문 하나하나가 온몸에 새겨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작은 주름들 하나 하나까지.
"처음엔 아니라고 부정했을까요? 어딘가에 눈 뜨고 살아있겠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겠지. 시체는 찾아도 나오질 않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벗 삼아 꾸역꾸역 살았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 당신이 죽었구나 했을 거야. 그게 언제였을 것 같아요? 구마 의식을 하다가 문득 박일도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양신부님의 기일이 다가왔을 때? 정말 그런 순간이었을까요?"
"야, 최윤."
"비어 있는 냉장고를 마주했을 때. 그 냉장고에 물 대신 가득 찬 소주병을 만났을 때. 길을 지나다가 달리는 택시를 눈에 담았을 떄. 강형사님과 술을 먹다가 아주 많이 취했던 어느 날에."
윤화평 씨는 꼭 그런 때에 생각이 났어요. 오늘 당신이 생각나면 꾹꾹 눌러 참아야지, 하고 미리 준비했던 그 어느 날이 아니라, 준비도 예상도 하지 못하고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정말 완벽히 고통스러운 그 어느 때에만 생각이 났다구요. 윤은 화평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야 당신 집에서 자고 가네요."
그 날도 저 가방을 들고 왔었어요. 칫솔을 챙겨넣고,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최윤의 떨리는 손끝이 화평의 길어진 머리카락을 사이를 헤집고 화평의 머리카락을 들춰올렸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고, 그린 듯한 눈썹 아래로 화평의 오른쪽 눈이 드러났다. 눈꺼풀과 눈 아래에 길게 찔린 자상, 빛을 잃어 탁해진 초점 없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최윤은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을 뚝 떨구고야 말았다. 화평은 윤의 얼굴이 흐릿해 보이지 않았다. 최윤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너무 가까이 있는 물건에는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한쪽 눈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아직도 일 년은 족히 더 필요할 듯 싶었다.
"왜 울어."
"당신이 날 울게 만들잖아요."
우는 법을 잊어버렸던 최윤이 다시 울기 시작한 건 윤화평을 만나고 나서였다. 우울함이 윤을 잠식하고 나서부터 윤은 한 번도 쉬이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윤화평을 만나고 나서는, 눈물이 많던 어렸을 적의 그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울 때면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리곤 했다. 하지만 화평을 잃고 나서 윤은 다시 울음을 잊은 사람처럼 살았다. 몸을 바삐 움직이고, 무던한 표정을 한결같이 지니고, 종종 어설프게라도 배워서 써먹어야만 했다. 울지 않으니 속을 모르는 누군가는 '신부님 많이 밝아지셨네요'라고 어설픈 인사치레를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윤은 알았다. 울지 못하고 짠내나는 눈물을 속에 쌓아둔 탓에 소금 친 상처들이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것을.
"내가 미안해."
"그 말 좀 그만해요."
"그럼 이 상황에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 따라해봐요."
기다려줘서. 울음기 섞인 윤의 말을 화평이 어설프게 따라했다. 어쩐지 윤의 말이 물 속에서 듣는 목소리처럼 메아리쳐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화평은 겨우 한 글자 한 글자씩, 마치 말을 배우는 어린 아이처럼 입을 열었다.
"기다려줘서."
"기, 다려줘서."
"......고마워요."
윤의 입술이 화평의 오른쪽 눈두덩이에 쏟아져 내렸다. 그것이 최윤의 인생이었다. 잃은 눈 대신 한 사람의 생이 그 곳에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