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대 국문학과에는 세 가지 전설이 있다
츄잉껌
상용대 국문과에는 세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 고봉상 9n학번설
신입생환영회 때부터 궁금했다. 분명히 3학년이라고 소개받았는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학부생, 조교, 졸업생 할 것 없이―모두가 그를 선배라 불렀다. 장난으로 다른 선배에게 고선배 설마 9n학번은 아니시죠? 했더니 어떻게 알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설마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다. 99학번이라던 교수님이 합석하시면서 고선배 대체 언제 졸업해요? 묻는 걸 보기 전까지. 정확한 학번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워 묻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가 적어도 20세기에 입학한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둘째 강길영 미모 봉인설
멀리서 봐도 포스가 줄줄 흐르는 길영 선배는 항상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다닌다. 18학번 신입생인 우리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지만 처음에는 머리를 묶지 않았었다고 한다. 단지 아침에 머리를 다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그 당시 국문과에 여신이 들어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지금도 심심찮게 여신 소리를 듣지만 그때와는 결이 달랐다고 할까. 물론 넌 꾸미면 더 예쁠 텐데 같은 소리를 하는 작자도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당연히 길영 선배는 들은 척도 안 했고. 그랬던 길영 선배가 너는 안 꾸미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너의 모습도 괜찮다 은근슬쩍 후려치면서 수작을 거는 선배 하나에 빡이 쳤다. 다음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빡세게 세팅하고 와서는 남들은 다 눈을 못 떼는데 지 혼자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그 선배한테 너는 좀 꾸며라 지금도 안 괜찮고 꾸며도 안 괜찮겠지만 하고 쏘아줬다고 한다. 참고로 그 선배는 영문과로 전과해서 영문과 학생들에게 길영 선배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려다가 되레 창피 당하고 자퇴했다. 그 일화를 우리에게 들려준 선배는 그 날 자신이 신의 영역을 엿본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사진을 보여줬는데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우리는 미모 봉인이 풀린 길영 선배를 실물로 영접하게 된다. 조교님 결혼식에서였다. 옅은 화장에 드라이한 머리, 세미정장에 롱코트 차림이었는데 사진으로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미모에 우리는 선배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사진은 그 미모의 10분의 1도 담지 못한 것이었다.
셋째 최윤화평 공개연애설
이 전설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신입생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그 진위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그에 대해 내가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전설을 듣게 된 계기가 수상쩍은데 그 얘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위의 두 전설과 마찬가지로 최윤화평 공개연애설의 전승 역시 신입생환영회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입학식을 겸해 일박이일로 기획된 행사였는데 그 선배들은 첫날 저녁에 합류했다. 원래 아예 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육교수님이 신입생들을 보고 싶어 해서 모시고 왔다고 했다.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육교수님은 구비문학 전공이신데 화평 선배가 그분 연구를 돕고 있다. 무보수로. 언젠가 우리가 그거 노동 착취 아니에요? 물었더니 내가 전생에 교수님 돈을 떼 먹었나보다, 하는 거지, 화평 선배는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최윤 선배가 나직하게 물었다. 선배, 교수님 차 수리비는 갚았어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늦은 시각에 거기까지 와서는 그 선배들은 신입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인 테이블에서 음료수만 마셨다. 다음날 새벽 일찍 운전해서 올라갈 거라 술을 못 마신다고 했다. 같은 테이블에도 안 앉았는데 어떻게 아느냐면 우리 모두 그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술을 마시던 고선배도 그걸 눈치 챘다.
잘생겼지? 불러줄까? 누구. 최윤? 윤화평?
둘 다요.
근데 너희 그건 알고 있어. 쟤네 둘이 사귄다.
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진짜야. 그것도 공개연애.
고선배가 풀어준 썰에 의하면 그들은 입학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고향이 바닷가인데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했다. 모종의 이유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화평 선배가 열아홉 살에 먼저 우리 학교에 들어왔고 그 다음 해에 최윤 선배도 입학했다. 그 해 신입생 환영회는 인문대와 예술대 공동 주관 행사였는데 그런 중에도 최윤 선배는 단연 눈에 띄었다. 키 크고, 날씬하고, 모델 같은 피지컬도 돋보일 수밖에 없었을 텐데 화평 선배와 거짓말 안 보태고 단 1초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잘생긴 애+잘생긴 애였으니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봤어? 국문과 신입생들?
그 모델 같은 애랑 키 좀 작고 잘생긴 애? 끼리끼리 놀더라.
거기 올해 진짜 대박이지 않냐? 예대 분발하자.
재작년에도 신입생 중에 여신 있지 않았냐. 진짜 국문과 뭐지?
한창 놀던 중에 복도만 나서도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신입생들이라 함은 최윤 선배와 화평 선배를 이르는 것이었는데 화평 선배가 입학 첫 해 학교 행사는커녕 수업도 잘 안 나왔기 때문에 모두 화평 선배를 신입생으로만 여긴 것이었다. 최윤 선배도 당시에는 화평 선배에게 반말을 하고 있어서, 국문과 다른 선배 중에서도 둘 다 신입생인 줄 아는 사람이 꽤 됐다. 고선배 역시 한참 나중에서야 그들이 다른 학번인 줄을 알았다. 사건은 밤이 무르익었을 때 화평 선배가 동기와 대화하는 걸 들은 고선배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됐다.
뭐야. 둘 다 신입생 아니었어?
그러게. 난 또 동기끼리 벌써 죽이 잘 맞나 했더니.
원래 알던 사이야? 그래도 그렇지 뭘 하루 종일 붙어 다녀. 둘이 사귀냐?
네.
뭐라는 거야. 니네 둘이 사귀냐고.
네. 사귑니다. 윤화평이랑 저랑.
취했나? 그렇게 보기에 최윤 선배는 너무나 꼿꼿했고 화평 선배는 고선배 못지않게 놀란 눈치였다. 야, 너 진짜 괜찮겠어? 왜, 니가 말해도 된댔잖아. 난 상관없는데 너는…. 난 뭐. 둘이 소곤대는 걸 보니 쟤네는 멀쩡해 보이는데 그럼 내가 취했나? 고선배는 얼이 빠져 말을 잃었고 주위 다른 선배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다.
뭐야. 요새는 후배가 선배 상대로 몰카 하냐.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 사귑니다.
그러나 장난치는 게 아니라며 화평 선배와 잡은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 최윤 선배의 표정이 너무나 뻔뻔하고 당당했다. 이목이 집중되자 귀까지 빨개져서 손을 빼려하는 화평 선배의 반응도 연기로는 안 보였다. 선배들은 혼란에 빠졌다. 진짠가? 진짜 같은데. 처음에 웃어넘기려던 선배들도 점점 긴가민가해 하기 시작했다. 키스도 했냐? 몰카면 얼른 끝내라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 장작이 됐다. 매일이요. 지금도 하고 싶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술자리가 아수라장이 됐다. 환호성, 휘파람, 야유가 뒤섞였다. 뒤늦게 화평 선배가 최윤 선배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 자리를 정리한 것은 뜻밖에도 길영 선배였다. 야. 윤화평. 최윤. 나와. 그렇게 둘을 데리고 나가서는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길영 선배가 먼저 돌아왔다. 고선배가 보기에 돌아온 길영 선배는 사람들이 방금 일을 잊었길 바라는 것 같았다고 했다. 어떻게 됐느냐 둘이 진짜 사귀냐고 묻는 성화에 길영 선배는 앉았던 자리에서 도로 일어나자마자 일단 한숨부터 쉬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길영 선배도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했다.
우선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최윤화평 이 ㅅ…, 얘들이 고집이 세서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요. 최윤만 그런 줄 알았는데 윤화평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짓말은 하기 싫다네요. 욕을 하셔도 할 수 없고 손가락질을 해도 감당하겠답니다. 조금 전에 들으신 그대로 최윤이랑 윤화평 사귑니다. 다른 거짓말로 해명은 안 하겠답니다. 걔들 시키면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제가 대신 전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길영 선배는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마치더니 꾸벅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길영 선배의 친구가 고생했다는 듯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때 누군가 말 잘 해서 봐준다, 외치며 박수를 쳤고 얼떨결에 모두 따라 쳤다. 누가 국문과 아니랄까봐. 반응 겁나 웃기네. 다른 과에서도 그제야 한두 마디씩 보탰고 술자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어졌다. 최윤 선배와 화평 선배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화제가 다른 데로 넘어가 있었다. 주위에 앉은 몇 사람이 장난을 섞어 예쁜 사랑하세요, 응원하며 술을 따라줬다. 그 날 일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고선배는 우리의 표정을 살폈다. 너희 내 말 안 믿지? 사실 좀 의심스럽지? 그 말대로 우리 신입생 전부가 그 얘기를 믿은 건 아니었다. 실패한 몰카 아니었을까요? 에이 그냥 선배가 지어낸 얘기 같은데? 몇몇 동기들의 의심에 고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들 중에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 이들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최윤화평(길영 선배의 저 연설(?) 이후 이 단어는 최윤 선배와 화평 선배를 묶어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은 그런 장난을 칠 만한 인물들이 못 되었고 길영 선배가 거기에 동참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깡길 걔가 얼마나 꽉 막혔는데. 그런 장난에 장단 맞춰줄 애는 아니지.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 말을 무시하고 최윤 선배나 화평 선배에게 고백을 했던 선배들이 들은 거절의 이유가 한결같았다. 저 화평 선배랑 사귀어요. 나 최윤이랑 사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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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꾸준히 공개연애설을 부정했다. 그들은 두 파로 나뉘었는데 그 일화가 실패한 몰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과 처음부터 끝까지 A선배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쪽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실패한 몰카파는 주장했다. 너희가 간과하는 게 있는데 그 선배들이 우리와 같은 센스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안 돼. 다들 무슨 그런 진지한 몰카가 다 있겠냐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최윤화평+길영 선배의 센스라면 가능할 법도 하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주장이었다. 그들과 대단한 친분 없이 점심을 한 끼라도 같이 해 본 이라면 누구든지 그들의 유머감각에 대해서만큼은 혀를 내둘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길영 선배는 연애 안 하세요? 물었더니 연애는 무슨 애가 둘이다, 하고 받아친다든지, 과탑 하는 비결을 물었더니 내가 이번 학기 장학금을 못 타면 다음 학기는 집에서 애나 봐야 한다는 절박감? 이라고 대답한다든지 하는 식. 농담은 농담 같은데 농담을 한 사람이 웃질 않으니 웃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농담 말이다. 최윤 선배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한교수님과 함께한 자리에서였는데, 교수님이 내가 첫사랑에 성공했으면 너 만한 손자가 있었을 거다, 하는 말에 첫사랑을 대체 몇 살에 하신 겁니까? 정색을 하고 묻질 않나, 왜 너희도 첫사랑은 어릴 때 하지 않았냐며 그럼 벌써 애가 다섯 살은 안 됐겠냐 하자 제 첫사랑은 어머니인데요, 대답해서 졸지에 교수님의 농담을 패드립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동기는 한참 나중에 육교수님과 한교수님의 제자 자랑 배틀을 보고 나서야 그 대화가 친근함의 표시였다는 걸 알고 안심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교수님과 최윤 선배가 무슨 철전지 원수라도 진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얼마나 좌불안석 했는지 모른다고. 그 동기의 오해를 종식시켰던 그 제자 자랑 배틀이란 것도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사실상 자랑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한: 교수님 요즘도 그 뺀질뺀질한 놈 데리고 다니십니까?
육: 뺀질이라뇨. 화평이 걔가 그래 봬도 어떤 놈이냐면요… 어… 그니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그래 세차! 세차 하나는 기가 막혀요.
한: 그 놈이 박살낸 그 차 말이죠?
육: 하아…. 할부도 안 끝났는데. 이게 아니지, 아니, 그러는 한 선생님 그 멀대같은 놈은 잘 합니까?
한: 윤이 그 애는 자기가 알아서 잘 합니다. 밥도 제 손으로 알아서 차려먹고 잠도 제 집 가서 자지요.
육: 연구도 즈이집에서 한다는 말이 있던데.
한: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칩니다. 집에 꿀단지라도 갖다놓은 모양인데 그 꿀단지 어디 치워버리든지 해야지.
육: 남의 물건 함부로 옮기시면 철창 갑니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복기해 본 게 이정도이니 어쩌면 최윤화평의 유머감각은 교수님들에게서 옮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혹시나 여기까지 읽고도 화평 선배의 유머감각은 정상인의 범주가 아닐까 헛된 희망을 품을까봐 몇 마디 덧붙이자면 화평 선배의 경우 워낙 학교에서 보이질 않으니 그와 대화를 나눠본 신입생이 거의 없어 일화가 없는 것 뿐 결코 길영 선배나 최윤 선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언제 한 번 길영 선배와 밥을 먹기로 했다가 최윤화평과 동석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 다들 계 탔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한 시간 내내 자기들끼리도 서로 안 웃어주는 아재 개그의 향연에 체할 뻔 했다는 후기를 전했다. 셋이 아주 똑같다고 아무리 세 사람이 밥 안 먹어도 배부를 비주얼의 소유자라 해도 다시는 셋을 동시에 보는 자리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그 시간을 끔찍한 기억으로 여겼다. 겪어보지 않은 이로써는 상상도 안 되는 발언이지만 그 애가 그렇게 말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무튼 실패한 몰카파의 요지는, 이들의 센스라면 그 사건이 선배들을 놀리기 위한 몰카였다는 설도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는 것이다.
똑같이 최윤화평 공개연애설을 부정하지만 실패한 몰카파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의 입장은 공개연애 선언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최윤화평+길영이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점은 팩트일지 몰라도 사귀냐는 말을 장난으로라도 들을 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원수라면 모를까. 그도 그럴 것이 최윤화평은 모든 면에서 반대였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으며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꾸준히 그들 스스로 서로 사귄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신입생들 사이에서 진짜 사귀는 거 맞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선 두 선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언뜻 보기에 목소리도 크고 몸짓도 커서 인싸일 줄 알았던 화평 선배는 신입생 환영회 이후 학교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간혹 과방이나 학과사무실에서 쪽잠을 자는 모습이 목격되곤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처음부터 원래 알던 사람인 양 툭툭 말을 걸어오기는 하는데 생각 외로 벽이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들 했다. 반면 최윤 선배는 후배들에게도 꼬박꼬박 말을 높이는 등 기본적으로 예의를 지키는 타입이기는 했으나, 다소 비뚤어진 유머감각을 지니기는 했어도 화평 선배에 비하면 후배들과 가벼운 농담도 곧잘 나누는 편이었다. 또 의외로 학과 행사나 과방에 자주 얼굴을 비쳤다. 급기야는 2학기 들어 학생회장이 갑자기 입대를 해버리자 임시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두 선배의 동선 또한 당연히 겹치지 않았고 둘이 같이 있는 모습도 보기가 어려웠다. 딱 한 과목 2학기 전공필수 강의가 겹쳤는데 그마저도 같이 강의실에 들어서고도 멀찍이 따로 앉는가 하면 나갈 때는 각각 동기들과 어울렸다. 이때만 해도 커플이라고 하루 종일 붙어 다니라는 법은 없으니 다들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들이 그전에도 서로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체육대회 예선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단체줄넘기, 짝피구, 줄다리기, 농구, 줄줄이 꼴등에 예선탈락을 하고 마지막 축구예선 날이었다. 신입생 환영회 이후 어떤 행사에도 코빼기도 안 보이던 화평 선배가 경기장에 유니폼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 뒤로는 최윤 선배가 화평 선배 뒤를 쫓아왔다. 드디어 강의실 밖에서 최윤화평 투샷을 보나 신입생들은 미어캣처럼 몸을 일으켰는데 이어지는 대화는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것이었다.
진짜 참가하려구요? 다시 생각해보시죠. 애들 놔두고 왜 선배가 직접 뛰어요.
이거라도 이겨야 대회 당일에 사람 모을 구실이 생길 거 아냐. 우리 과 경기 하나도 없는데 애들이 응원 셔틀하러 와주겠어?
그건 학생회가 알아서 합니다. 선배가 안 나서도 돼요.
학생회만 국문과야? 나도 국문과야.
선배는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뭐?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된다구요.
좀 전에는 그렇게 말 안 했잖아. 그리고 최윤 너 내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말랬지.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건 선배겠죠. 나는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충동적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여기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으니까 이따 집에서 얘기하자.
그러곤 화평 선배는 선수 무리로 합류해버렸다. 이 대화는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당시 우리의 의식의 흐름을 되짚자면, 화평 선배의 등장에 1차 놀람, 최윤화평 투샷에 1차 설렘, 화평 선배가 최윤 선배를 걱정하다니 2차 설렘, 까지는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최윤 선배가 학생회장이 되자마자 화평 선배가 학과 행사에 참여한 것을 두고, 봐라 진짜 사귀는 것 맞잖아 주장하는 이들이 생기기도 했고. 그러나 갑자기 분위기 국문과 하지마는 또 뭐고 집 가서 얘기해는 또 뭐란 말인가. 전자는 명백한 시비인데 후자는 그들이 최소한 같이 살 만큼 친밀한 사이라는 증거였다. 그렇게 신입생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는 그들은 경기 막바지에 다다라 또 다른 사건을 만들었다. 꼭 이겨주겠다던 말이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던지 화평 선배의 활약으로 경기가 무난하게 풀려가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선배를 따라가지 못해 이기지는 못하고 겨우 1:1로 비긴 상황이었다. 화평 선배가 볼을 잡아 드리블을 해 골대 바로 앞까지 달렸다. 모두 흥분해 소리를 지르며 딴짓을 하던 이들도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상대 수비수가 가까이 붙었다. 어어. 좀 위험해 보이는데. 가만 앉아 보던 학생들이 일어섰다. 최윤 선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화평 선배가 오른 다리를 들어 슛 자세를 취했다.
윤화평!
삐익―.
최윤 선배가 소리친 것과 거의 동시에 심판이 휘슬을 불었다. 몸싸움은 둘째 치고 뒤에서 걸린 태클이 화평 선배 발목을 꺾었다. 경기장에 엎어진 화평 선배는 발목을 붙잡고 일어나질 못했다. 최윤 선배가 경기장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우리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상대팀에 항의를 할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화평 선배 멱살을 잡았다.
아까부터 몸싸움 심해지는 거 몰랐어? 알았잖아. 태클 들어올 거 뻔히 알면서 슛은 왜 하려 그랬냐. 너 일부러 그랬지.
밑져야 본전이잖아. 슛을 하든. 파울을 먹든. 그래서 패널티킥 얻었음 됐잖아. 심판, 패널티킥 맞지?
등신 같은 새끼.
우리는 최윤 선배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그날 처음 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목청이 좋은 줄도. 경기장 건너편에서 하는 말이 이쪽 관객석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게다가 욕이라니. 마지막 그 욕설은 가까이 달려 나갔던 동기 남자애들에게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멀리서 봐도 그 입모양은 욕설임이 분명했다. 그들 역시 최윤 선배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대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워 했다. 솔직히 화를 낼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둘이 아주 사이가 나쁘거나, 다소 거친 표현방식을 쓰기는 했어도 그것이 최윤화평 나름의 애정표현이거나 둘 중 하나라면 설명이 될까. 우리 생각은 그랬다. 만약 그 후 최윤화평의 행보가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면 최윤화평 공개연애설은 증명 완료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뒤로도 일관된 행동을 보엿다.
결국 패널티킥이 성공하면서 그 날 경기는 국문과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화평 선배는 국문과의 영웅은 됐을지 몰라도 한동안 발목에 깁스를 해야 했는데 최윤 선배는 보는 우리가 섭섭할 만큼 화평 선배의 부상에 냉랭했다. 처음 깁스를 하고 등교하는 날 누군가 화평 선배가 강의실로 들어오면 박수를 쳐주자고 제안했다. 모두 동의해서 화평 선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강의실 뒷문이 열리고 최윤 선배가 들어왔다. 같이 산다더니 화평 선배가 뒤이어 들어오자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책상을 두드리는 이도 있었다. 선배 멋있었어요! 국문과 기 세워줘서 고맙습니다! 소란스러운 인사에 화평 선배가 쑥스럽게 웃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최윤 선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꼼짝도 안 했다. 골 아프다는 표정으로 손뼉 하나 안 치더니 그만하세요, 감정 없는 목소리가 불쑥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수 받을 일 아니에요. 몸 다치면서 이기느니 지는 게 낫습니다.
그 말에 화평 선배가 고개를 홱 돌려 최윤 선배를 쳐다봤다. 말로 대꾸는 안 했고 최윤 선배도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이미 몇 십 마디가 오가고 있었다. 내 너를 죽이겠다고. 설마 그랬을까 싶겠지만 최윤화평 공개연애 지지자들도 그 순간을 서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상 부드럽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화평 선배 바로 가까이 있던 동기는 화를 참느라 턱 근육이 씰룩이는 것까지 보였다고 증언했고, 최윤 선배 근처에 있던 동기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봤다고 했다. 결코 호의적인 눈빛 교환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좀 더 객관적인 표현으로는 ‘노려보았다.’ 강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윤이 너 화평 선배한테 또 왜 그러냐.
뒤늦게 강의실로 들어온 최윤 선배의 동기들이 눈치껏 최윤 선배를 말렸지만 싸늘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최윤 선배는 선배들에게 끌려 뒷걸음질 치면서도 화평 선배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그건 화평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최윤 선배의 동기 선배들이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안절부절 못하는 우리를 달래기 시작하자 화평 선배가 먼저 항상 앉던 구석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최윤 선배도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다음에도 계속 그런 식이었다. 수업 중이 아니면 언제든지 최윤 선배는 화평 선배 행동 하나하나를 비꼬았고 화평 선배는 대개는 무시했지만 그렇다고 화가 난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아예 즐기는 것 같았다. 먼저 도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화평 선배는 학과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참석해서는 선배 동기들이나 그마저도 없으면 길영 선배와 그 동기에 끼어 놀곤 했다. 그러다 최윤 선배와 눈이 마주치면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어보였고 최윤 선배는 미묘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했다. 가만 보면 화평 선배는 최윤 선배의 눈에 띄는 곳에 일부러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야. 니들 언제까지 이럴 건데. 집에서 좀 풀고 오지? 길영 선배가 아픈 머리를 꾹 누르며 말하면 화평 선배는, 선배도 최윤 고집 센 거 알잖아, 말하고 말았다. 그러면 길영 선배도 더 안 묻고 술을 따라줬다. 지켜보는 우리는 그저 분명히 둘 사이에 뭔가 있기는 있는데 좀처럼 가닥이 안 잡혀 답답해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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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가 줄곧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로 그 목격담 역시 그런 행동들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 2학기가 끝나갈 무렵 1박2일 워크샵이 개최됐다. 말이 워크샵이지 엠티와 다를 게 없었다. 각 분야의 선배를 강사로 모시고 형식적인 강의를 듣고 나면 술자리가 이어졌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자리였는데 평소 열의 없던 화평 선배가 그날만큼은 적극적으로 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화를 수집했다는 강사님의 경험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옆에 붙어 앉아서 한참을 열정적으로 대화하더니 번호도 주고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누군가는 강사님의 강의에 관심이 있어야 했고 그 역할을 화평 선배가 한 것이 놀라웠을 뿐이지. 게다가 아직 술 취한 사람도 없었고 교수님도 계셨고. 사건은 강사님이 내일 일정이 있다며 돌아간 다음에 일어났다.
감사함다. 선배님. 제가 꼭 연락드리겠슴다.
술이 좀 들어갔는지 눈도 풀리고 혀도 풀린 화평 선배는 강사님과 인사를 하고 도로 술자리로 돌아갔고, 강사님 섭외를 맡았던 내가 강사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좀 나누며 주차장까지 나와 무사히 출발하시는 것까지 보고 연수원으로 돌아가려고 보니 담배가 마려웠다. 한 대만 피우고 가야지. 늦게 돌아온다고 한 소리 들을까봐 사람 없는 곳을 찾았더니 근처에 풀숲이 보였다. 저기가 좋겠다. 꾸역꾸역 기어 들어가 겨우 한 모금이나 빨았을까,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식으로 피말려 죽이려는 겁니까.
너야말로 그 좆같은 높임말 언제까지 쓸 건데. 여기 사람 없어. 말 놔.
그래. 개새끼야. 됐냐. 이제 대답해. 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어쩌긴 뭘 어째. 국문과 안 같다길래 국문과처럼 굴어주잖아.
말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내 눈앞에서 멈췄다. 시발. 아깝게. 이게 웬 횡재지. 나는 급하게 담배를 비벼 껐다. 아깝긴 아까운데 뭔가 남들 모르는 비밀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윤화평 지옥의 말싸움을 가까이서 지켜본 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두 선배는 말 하는 내내 눈을 안 뗐다. 저러고 있으면 눈 안 아픈가 싶을 정도로 꿋꿋하게 서로 노려봤다. 코앞에서 보니 이건 결코 사랑싸움일 수가 없었다.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꼭 그렇게 사람 속을 긁어놔야 속이 시원해?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최윤 선배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싶더니 화평 선배가 눈을 피했다. 됐따, 그만하자, 그만해. 팔을 휘두르며 돌아서려는 걸 최윤 선배가 붙들었다. 말 안 끝났어. 돌려세워진 화평 선배는 다시 최윤 선배와 눈을 맞췄으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겠다는 눈빛. 화평 선배는 가볍게 말을 걸어주었지만 우리는 벽이 있다고 느꼈던 그 눈빛. 지켜보던 나도 알 정도니 당사자인 최윤 선배도 당연히 느꼈을 것이다. 최윤 선배가 심호흡을 했다. 아마도 숨을 골라서 화를 가라앉히려는 거겠지.
그런 식으로 말한 건 내가 잘못했어. 됐어?
화평 선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렇게 쉽게? 길영 선배한테 했던 말대로 최윤 선배가 고집이 세 보이긴 했다. 그런 선배가 사과를 하니 마음이 풀린 걸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려다 처지를 깨닫고 참았다. 진짜 잘못했어? 화평 선배가 눈썹을 움직이며 물었다.
어. 잘못했어. 나 때문에 무리 하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런 건데 그렇게 말 하지는 말 걸. 미안해.
…알고 있었어.
아는데 넌 왜 그랬어?
넌 양보해줬잖아. 내가 사람들 보는 데서 티내기 싫다 그래서.
대박. 소리 지를 뻔했다. 저거 지금 사귀는 티 말하는 거 맞지?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내 폰 녹음 시작할 때 소리가 났던가.
난 괜찮은데. 그 좆같은 높임말 쓰는 것도 재밌어.
재미는…. 그래 보여. 니가 재밌어서 하는 거잖아. 누가 티내지 말쟀지 높임말 쓰랬나.
반말 하면 친해 보이잖아. 난 친해 보이면서 사귀는 티 안 낼 자신 없어.
야. 누가 들어.
대박. 대박. 최윤 선배가 확실히 말했다. 사귀는 티라고. 나만큼이나 화평 선배도 놀랐는지 급하게 선배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나는 거의 바닥에 붙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여기 아무도 없어.
이제 최윤 선배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댔어.
너 정말 국문과 아닌가 보다.
반대야? 거 뜻만 통하면 됐지 되게 깐깐하게 구네.
아무도 없는데 뽀뽀해도 돼?
뭐?
이쯤 되니 화평 선배 반응=내 반응이었다. 최윤 선배 한 마디에 놀랐다가 설렜다가. 미쳤나보다. 카메라에는 못 담아도 내 눈에는 담아야 겠어서 몸을 일으켰더니 다행히 화평 선배가 이쪽과 살짝 등을 지도록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잘 됐다. 최윤 선배는 애초에 목격되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안심이었다. 쪽.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고 화평 선배가 떨어졌다. 발을 들었는지 키도 낮아지는 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이었다. 최윤 선배가 화평 선배를 다시 잡아당겼다. 어어. 가려서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윤 선배가 화평 선배 뒤통수를 감쌌다. 대박대박. 눈에라도 실컷 담으려 집중하는데 각도가 점점 변한다? 화평 선배의 등이 점점 옆으로 틀어지더니 완전히 둘의 측면을 정면으로 보게 됐다. 미쳤다. 동기들한테 뭐라고 자랑을 하지,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졌다.
최윤 선배가 눈을 뜨고 나를 봤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 나보고 일어나란 제스쳐를 하길래 가라는 뜻인 줄 알았더니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붙이고 살짝 구부려 뭔가를 쥐는 시늉을 했다. 응? 뭐지? 그 상태로 손바닥을 홱 뒤집어 이래저래 움직이더니 내가 계속 못 알아듣자 급기야 검지만 들어 자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그 제스쳐. 설마 동영상을 찍으란 말인가?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 이거 설마 체육대회부터 지금까지 최윤 선배의 큰 그림인가. 선배가 시키는 대로 동영상 촬영버튼을 누르자 소리가 났다. 화평 선배가 급하게 최윤 선배에게서 떨어졌다. 최윤 선배가 양손으로 화평 선배 얼굴을 감싸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순발력이었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났어?
안 났어. 여기 아무도 없다니까.
그러고는 다시 화평 선배 입을 막아버렸다. 입술로. 그러고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드는데 솔직히 소름이 돋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게다가 선배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자 나를 쫓아내는 걸 잊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보고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동기들한테 꼭 보여줘. 듣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돌아서서 워크샵 장소로 돌아가면서 나는 체육대회부터 지금까지 최윤화평에게 일어난 일들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 국문과 안 같다고 화를 돋우고, 이래저래 학과 행사에 나서게 하고, 사귀는 티 내지 말자고 한 거 미안하게 만들고, 계속 화난 척해서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는 장소에서 애정행각을 목격당하는 것까지가 최윤 선배의 계획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두 사람이 꾸준히 우리 사귄다고 말하는데 그걸 아니라고 의심하는 게 이상한 일인데 한쪽이 티 내는 걸 극도로 피해 왔다면 이해가 된다. 물론 몇 가지 궁금한 점이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우리만큼이나 동영상을 탐낼 최윤 선배와 대화의 시간을 나누어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나는 지금 고민중이다. 최윤화평 공개연애설의 진실여부를 떠나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화평 선배의 의사에 반해 내가 목격한 것을 퍼뜨리는 것이 맞는 일인가 아닌가. 그래서 우선 기록을 먼저 남겨두기로 한다. 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 동영상은… 말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화평 선배가 최윤 선배를 쓰러뜨리고 올라타는 장면까지 찍혔는데 이걸 공개해도 될는지 화평 선배의 인권을 위해 보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최소한 이렇게는 말하고 싶다. 최윤화평 공개연애설, 그것은 우리가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진실이라고. 최윤 선배가 그것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