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랑
공원
오, 사랑.
written by. 공원
동이 텄다. 하늘 끝을 연 해가 천천히 세상에 물감을 부었다. 선연한 붓질 한 자락이 상용시 어느 단독 작고 아담한 거실을 찾아가 칠한다. 바야흐로 아침이다.
윤은 깨끗한 냇물 같은 첫 아침빛을 사랑했다. 내딛는 발끝으로 느껴지는 밤새 식어버린 방바닥의 온도와. 그 가붓한 사늘함이 성모상 앞 꿇어앉는 무릎을 경건하게 찌르는 순간 또한.
하루의 시작. 새벽기도다.
얇은 면바지. 갈색 니트, 맨발.
최윤 마테오이기에 낯선 편안한 기도 복장.
묵주를 감은 왼 손이 익숙하게 다른 편 손을 맞잡았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빈 거실을 채우는 윤의 기도는 언제나 그렇듯 장엄하고 단정하다.
그리고 천천히 윤의 옆으로 걸어오는 발소리.
천주의-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의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윤은 소리로 시작한 기도를 마음으로 돌려 외웠다. 감은 눈을 뜨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익숙한 얼굴이 제 옆에 꿇어앉고 이어 성모송을 독송하기 때문이다. 찻물같이 은은한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기도문을 흐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멘.
자연스럽게 영광송까지 잇는 것은 윤의 기도방식이다. 분명하고 바른 발음. 낮고 진지한 화평의 아멘으로 새벽 첫 기도를 드리는 시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롭고 잔잔한 시간. 이 순간이 최윤과 윤화평에게 오롯이 허락되었다는 게, 윤은 자주 벅찼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일지어니. 자비의 모후 성모 마리아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부 성자와 성령께서도. 화평의 신도, 육광의 신도.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다. 정의로운 마음으로 가장 앞서 매 맞고, 자처하여 가시관을 쓴 그를 분명 사랑하시는 것일 테다. 그 모든 축복을 입고 그리하여 화평은 돌아왔다. 윤의 곁으로. 갑작스런 행운을 맞이한 모든 사람이 그렇듯, 윤은 굳이 화평의 생환이라는 불가사의를 논리의 잣대를 대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오늘도 윤의 진심어린 감사기도가 끝없이 바쳐질 뿐이다.
감사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당신의 사랑스런 아들을 제게 허락하여 주셔서. 윤의 맞잡은 손은 풀릴 기미가 없다. 감사합니다. 그를 돌려준 모든 것에. 그 밤 깊은 바다의 그물에게, 그의 폐 안에 남아있던 한 방울의 산소까지도. 감사합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바닷속 귀신에게서 뭍으로, 내 옆으로 와준 이 사람을 온 생명을 다하여 지키겠습니다.
윤의 이어지는 기도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선 화평이 스토브에 주전자를 올렸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따뜻한 훈기가 방 안을 채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끝낸 윤이 식탁에 앉았다.
“무슨 차에요.”
“보리차.”
“으음.”
구수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나른한 아침을 시작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한 잔이다.
“윤화평씨, 성모송. 잘 낭독하던데요.”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어. 사제 애인 반년이면 성모송정돈 달달 외는 거지.”
“본인이 강아지이자 사제 애인인 것을 인정하는 거군요. 드디어 받아들였습니까?”
물론 이제 전, 정식 사제는 아니지만. 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네 삶이 정식 사제랑 뭐가 달라. 새벽 4시 기상이 사람이야?”
“사람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싫어요?”
화평이 툭 던지는 말에 부리를 삐죽 내미는 윤이다.
아니, 아주 사랑해.
나도요.
윤은 맑게 웃는 화평의 입꼬리에 입을 맞췄다.
이전까지의 평생을 주님께, 앞으로의 평생을 이 사람에게.
이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나의 임마누엘, 사랑합니다.
그렇다. 윤은 환속했다.
이제 너네 뭐 먹고 사냐는 길영에게, 윤은 어차피 사제도 두 사람 먹고 살 길은 없어요. 라고 딱 잘라 말했다. 화평은 한 술 더 떴다. 최윤 얼굴 뜯어먹고 살려구. 안 먹어도 배부르겠지? 애처럼 구는 윤과 화평을 두고 길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 놈은 본 투 종교인, 한 놈은 본 투 무속인. 이놈이나 저놈이나 현실감각은 더럽게도 없어라.
“..돈 급하면 말해. 어줍잖은 사채 끌어다 쓰지 말고. 그놈들 지독한 놈들이니까.”
무뚝뚝하게 다정한 길영. 표내지 않는 친절함이 더 따뜻하다. 알겠어. 알겠어요. 윤과 화평은 착하게 대답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처음 윤이 사제를 그만 두겠다 했을 때, 화평은 쓰게 후회했다. 내가 늦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한다. 화평은 더 이상 윤에게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일 년 반을 돌아 만난 이유, 신에게 삶을 봉헌한 사제가 쉽게 인정치 못할 범속한 감정. 같은 성별과의 사랑. 재회 이후, 함께 잠자리를 하면서도, 윤의 곤란한 입장 윤의 단정한 사제복 윤의 손때 탄 성경책 윤의 혼란한 머릿속을 몰랐을 화평일리 없다. 화평은 윤의 십자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매번 이별을 담고 달싹인 입술이 차마 문장을 만들지 못했을 뿐.
하지만 지금 또 다른 의미로 기억되는 그 밤은, 그래. 행복했다.
윤은 돌아선 등에 입술을 묻었다. 오늘은 말해야겠다.
“윤화평씨.”
“응?”
“나 그만두려고요. 사제.”
“뭐?”
화평이 휙 소리나게 뒤를 돌아봤다
“왜, 나 때문이라면.”
화평의 눈빛이 진해진다. 죄책감을 담을 때마다 화평은 쉽게 말을 뱉는 대신 시선의 농도를 높였다. 오랜 버릇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꺼내놓지 않는 것. 등 뒤에 후회를 남길 시간조차 없던 사람이었으므로.
“당신 때문은 맞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그게 뭔, 사실 벌써 냈어요. 환속계. 화평이 묻기도 전에 윤이 선수를 쳤다.
“뭐?”
놀라움에 상체를 발딱 세운 화평. 자연스레 윤의 시선이 탄탄한 앞판을 꽉 채운 흉터로 향했다.
화평이 황급하게 엎드렸다. 또, 최윤. 덫에 걸린 동물같이 가련한 눈. 최윤이 낸 상처도 아닌데, 최윤이 지은 죄도 아닌데. 윤은 이 상처를 볼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뼈가 불거진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감정을 추스린 윤이 화평을 따라 자리에 엎드린다. 다 큰 성인남자 둘이 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나란히 누웠다. 윤에게는 상현과 함께한 추억이, 평에게는 어린시절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글을 쓰려고 해요. 당신과 내 이야기를.”
윤의 잔잔한 목소리. 우리가 만나왔던 추억들을 제대로 남기고, 잃고 잊은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일종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어둔 이불 속, 윤의 손짓이 커졌다. 눈은 생기를 담고 반짝반짝 빛났다.
“진심이야?”
화평은 되물었다. 그리고 똑바로 윤의 눈을 바라다봤다.
“지금까지 이룬 것들을 다 놓아버릴 만큼, 충분히 진심이야?”
두 번을 묻는다.
“네.”
망설이지 않는 대답. 맞닿아오는 정직한 시선.
화평의 눈을 피하지 않는 윤의 바른 눈동자. 진심이구나, 최 윤 마테오.
그리고요,
“뭣보다 우리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정말이다. 최윤이 사제를 그만두게 된 첫째 이유는, 누가 뭐래도 시간이다. 소돔의 죄를 주님 코 앞에서 짓고 있다는 부담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윤은, 화평과 함께인 시간이 필요했다.
환속 전의 최윤 마테오의 삶이란 정말, 정말 바빴다. 어디든 윤을 불렀으므로. 어디든 부름이 있는 곳이면 달려갔으므로. 윤화평이 돌아오기 전, 화평의 빈자리를 멍하니 느끼는 것은 최윤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존재를 가찹게 느끼는 것은 윤에게 자꾸만 과거의 트라우마를 되씹게 했다. 자살, 나쁜 생각만 가득한 비는 시간들. 그래서 차라리 바쁘길 바랐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쳐서, 매일이 죽음처럼 스러지기를 바랐다. 겨우겨우 버티다 보면 주님께서 부르시겠지. 그때 응답하면 되리라. 제자는 절망적으로 신을 섬겼다.
그때 쉬운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맡았던 일들이 지금의 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젠 놓아버리고 싶다. 이 사람과 항상 함께이고 싶다. 윤화평과, 오직 하루 종일 붙어있기를 바란다. 걸음을 멀리해 떨어져있는 시간은 고통스럽게 살을 짓눌렀다. 나가는 윤을 배웅하는 서운한 외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며칠 전 교구장 주교님께 환속을 말하러 가는 최윤의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윤과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이 더 오래 같은 공기 마시기.
얼굴 여기저기를 매만지는 손길과 따뜻한 눈빛을 더 많이 받는 것.
화평이 싫을 리 없다.
잃어본 사람만이 아는 한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감정.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는 윤의 눈동자.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알겠어. 난, 너 믿어.”
화평의 입이 어렵게 떨어졌다. 믿음을 약속하면서.
아직도 온 눈에 가득한 걱정을 떨구지 못하면서도.
“글로 쓴다.. 난 좋아. 근데, 길영 누나 허락은 받았어?”
“비밀입니다.”
헙. 화평이 눈을 동글동글 굴렸다.
“들키면 큰일날건데.”
“삥땅친 출연료는 축의금조로 받죠.”
“축의금?”
뭔 축의금? 최 윤 너 결혼해? 누구랑?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당연히 너랑, 나. 둘이 하는 거죠.
....
“지금 프로포즈하는 겁니다. 제가 아무것도 없는 개털 예수제자긴 한데.
윤화평씨만 괜찮다면, 저와 평생을 약속해주십시오.”
어버버, 어버버. 평의 아래턱이 뚝 떨어졌다.
좀 망설여지시나요? 더 많은 장점들 말해줘?
“매일 축복기도도 해 줄 수 있고, 매일 당신만을 위한 미사집전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면. 긴 기도문, 성인들 축일도 빼먹지 않고 다 외우니까 이 좋은 머리로 함께하는 기념일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 노래도 곧잘 합니다. 제 18번인 성가 57번 우리는 목장의 백성이로세 도 맞춤개사해서 불러줄게요. 또, 열 살 때부터 사제를 지망해서 과거 연애사도 깨끗합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날 받아줄 건가요? 환속한 사제, 매력이 느껴집니까?”
평은 아직도 벌린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윤은 저 멀리 벗어놓은 사제복 바지주머니를 뒤적였다.
“혹시 윤화평씨가 안 받아줄 까봐. 뇌물도 준비했습니다.”
전 속세로 돌아가는 속물이니까요.
손 안에 빛나는 것은 에메랄드 반지. 화평의 큰 눈이 더 떠졌다. 이어, 아련하게 초점을 흐리며 과거를 추억한다. 윤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알아요. 당신과 나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이죠.
뜻이 좋은 보석이더군요. 녹음. 청순. 윤은 화평의 작은 손을 조심히 잡았다. 긴장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반지를 집어든 검지와 엄지가 형편없이 떨었다. 슬픔은 뒤로 하고, 기쁜 날들만 맞아요. 이제 화평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한. 은색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영원의 상징.
당신의 정원이 되어줄게요.
지친 발걸음을 나로서 쉬어가세요.
“...윤화평, 결혼합시다.”
벗은 몸으로 무릎 꿇은 윤 앞에서 평은 끝내 눈물을 쏟았다.
손. 최윤과 윤화평의 혼수가 되어버린 책. 그 책은 보란 듯이 잘 됐다. 얼마나 잘 됐냐면, 길영이 읽을 정도로 잘 됐다. 물리구마? 물리구마아? 길영은 윤의 등을 퍽퍽 때렸다. 이 사제가 악마가 들린 모양인데? 사람을 그렇게 폭력적으로 묘사를 해? 아야야, 김영수씨 사건 윤화평씨가 검토해줬습니다. 하나 틀린 데가 없다고 과장 없이 아주 잘 썼다고 했다고요. 윤화펴엉. 길영의 세모꼴 눈이 화평을 향했다. 누나, 누나 진정해. 솔직히 거짓은 없잖아. 나 아직도 누나가 초크로 목 졸랐던 기억이 생생... 아아악. 길영이 결국 건방진 동생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그래. 우리의 좋았던 추억을 떠올려보자. 윤화평. 최윤. 최유운 화평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윤을 부른다. 경찰 불러어 경찰. 내가 경찰인데 누굴 불러! 악악대는 화평과 꽥꽥대는 길영과 아직도 2G인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윤이다.
“황소곱창!”
화평을 괴롭히며 시원하게 땀을 뺀 길영이 허리에 손을 척 두르고 오늘의 메뉴를 골랐다.
“최 작가가 사는 걸로!”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가득한 곱창집 안, 화로를 가운데 두고 가게를 울리는 길영의 화통한 주문 속 곱이 가득 든 소내장이 쉼없이 내어져왔다.
“그래, 최 작가. 다음 작품계획은?”
길영이 잘 익은 양념막창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윤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은 이 작품을 봐야할 것 같아요.”
웹툰도 할 것 같구요. 출판사 쪽 얘기 나오는 걸로 봐선 드라마화도 아마 되지 않을까.. 잘 하면 영화도요. 길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네 잘 먹고 잘 살게 생겼구나.”
“그렇죠.”
“하느님이 허락하신 연금복권이네. 안 그래? 정말이지 받을 만 했어.”
길영은 씩 웃었다.
“그 개고생이 돈이 되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
김영수, 최민상, 김륜희, 한미진, 정서윤.... 세 사람의 머릿속엔 박일도 때문에 엮인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잃은 사람, 또 구한 사람. 사람. 눈앞에서 맴맴 맴을 도는 수많은 얼굴들.
으하하하하하. 야. 이새끼야 너어느은,
저 먼 테이블에서 시작된 왁자한 웃음소리가 곱창집을 채웠다.
동해바다 깊은 곳에서 온 귀신에게서 저도 모르게 구해진 사람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바닷가가 있었다.
뭐, 괜찮겠지. 뭐니뭐니해도 침대 밑 귀신이야기는, 철모르는 어린아이 시절 이후로 잊어버리는 편이,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서는 더 낫지 않은가.
길영이 곱창을 뒤적이며, 한 번 더 웃었다.
“보려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사람들은 우리 얘기가 재밌나봐.”
“그러게요.”
“.....”
묵묵히 잔을 비우는 세 사람. 화평의 손에서 찬 소주가 다시 한 순배 돌았다.
잔을 부딪치는 길영의 손에 남은 붉은 칼자국에, 화평의 시선이 머물렀다.
“야, 신경 쓰지 마.”
“미...”
“미안하다고 하면 죽는다.”
니가 한 짓 아냐. 사과 받을 일도 없어.
한 번에 두 개의 곱창을 집은 길영의 젓가락이 화평의 코앞까지 쑥 내밀어졌다.
“이거 먹고 입 닫아.”
길영누나, 평은 울먹한 눈을 하고 쪼깐한 입을 아기새부리처럼 잠깐 열었다 닫았다.
이번엔 길영이 잔을 채웠다.
다시 맑은 소리를 내며 잔이 부딪쳤다.
소주잔을 마주 댄 채 길영이 한 마디 얹었다.
“임마 윤화평 넌, 좀 뻔뻔하게 살 필요가 있어. 인세 비롯 입 싹 닫은 싸가지 최윤이랑 결혼한 주제에, 너무 순둥한 거 아니냐.”
“!!”
“아, 그래서 잘 사나? 서로 달라서?”
윤과 화평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 서로를 쳐다봤다.
말했어? 아니요. 윤화평씨가 말했습니까?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길영의 앞, 친한 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묻는다.
“누굴 바보로 알고?”
길영이 고갯짓으로 세 개의 손이 모인 자리를 가리켰다.
그 중 두 손에 각각 끼워진 같은 디자인의 반지.
아..
“말 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반지를 낀 윤의 왼손이 화평의 왼손을 찾았다. 최 윤 손에 쏙 숨은 화평의 작은 손.
혹 서운하게 했을까, 길영의 눈치를 보는 두 쌍의 눈.
“됐다 그래.”
아예 모른 것도 아니고.
자고로 상처 많은 것들이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니까.
또 한잔, 길영이 홧홧한 기운을 목 뒤로 넘겼다. 크으, 좋다.
너나 윤화평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가진 거 하나 없고, 재미없고, 쓸쓸하고.
외로움은 냄새가 나거든. 오래된 상처에서 나는 쾌쾌하고, 서러운 냄새가.
인생 가는 대로 살아온 애들은 그 냄새를 못 맡아, 관심이 없지.
등에 긴 흔이 남은 하얀 손이 과장된 손짓으로 곱창 연기를 흩트린다.
헌데 우리 같은 인간은. 내 아픈 자리를 알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열이 올라오고 부어오를 때, 상처를 따고 피고름을 쏟지 않으면 죽는다고.
아파죽겠을 때, 딱지가 툭툭 터질 때.
바로 옆에서 이마 짚고, 손 붙잡고. 호 불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너넨 근데 그 상처라는 게..
화평의 벗은 팔뚝에, 잠시 길영의 시선이 머물렀다. 팔문진경의 흔적들.
지 손으로 새긴 독하고 독한 구속의 문장들.
잘 만났다. 절박한 놈들끼리.
세상에 누구를 갖다 대도, 너희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없겠지.
그러니 하고 싶은 만큼 하고, 핥고, 물고, 빨고 살아. 니들 곯고 터진데 다 나을 때까지.
머리털 나고 쥔 거 없는 빈손에, 지금처럼 서로의 손이라도 꼭 쥐고 살란 말이다.
이게 내 주례사다.
윤과 화평은 나란히 고개를 푹 숙였다. 비로소 결혼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무도 몰라줘도, 가족같은 한 사람에게 인정받음으로 인해.
길영이 소주병을 들었다. 이모! 여기 두 병 더요!
“마쎠~~ 오늘 끝까지 달릴 거니까.”
길영은 정말로 끝까지 달렸다.
“행복만 해라. 알겠냐아아아아! 이 불행한 놈들아아.”
새빨간 얼굴이 출발하는 택시의 창문을 내리고 영 흘러내리는 목소리로 소리소리를 지른다.
형사님 조심히 들어가요.
가서 연락해요 꼭!
길영은 차 뒷 창을 연해 바라보았다.
택시를 배웅하고. 나란히 한 집으로 향하는 둘을. 큰 그림자, 작은 그림자.
으이구, 귀여운 것들.
취기뿐만이 아닌 기분 좋음이, 길영의 온 얼굴을 달구었다.
윤이 집에만 있게 되자 화평은 어땠냐면, 많이 잤다. 정말 많이. 윤이 놀랄 정도로, 자기도 놀랄 정도로. 이유를 묻는 윤에게 화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옛날엔, 못 자서 문제였는데. 요즘엔,
“잠이 잘 와, 망 봐주는 사람 있어서?”
“우리가 수렵채집을 합니까.”
“최윤, 이 저주받을 조동아리.”
“윤화평씨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신기 있어서 무섭습니다.”
으으
윤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화평이 별안간 앓는 소리를 했다. 목을 울리는 진동이 윤의 허벅지를 타고 전해진다. 눈이 아파요? 응, 찌릿해. 윤은 더 이상 저에게 아픔을 숨기지 않는 화평이 고마웠다. 걱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줘서. 진통제 먹을까? 아니, 괜찮아. 잘래...
편하게 자세를 바꿔 누운 평의 한쪽 눈이 다시 감겼다.
다른 한쪽은 감긴 것도, 떠진 것도 아닌, 그저 무생물인 채로.
화평은 종종 머리카락을 당겨 의안을 가렸지만, 윤은 그보다 더 자주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최윤, 놔둬. 보기 싫잖아. 징그럽고. 아니요, 전혀 안 그렇습니다.
달빛 아래 당신의 오른 눈이 희게 빛나던 날.
그날이 우리 둘의 첫 잠자리였으니까요.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절, 윤이 종종, 길영과 같이 또 따로 화평의 집으로 내려가던 때.
당시 윤에게 아직도 익숙지 않았던 화평의 마구잡이로 자란 더벅머리.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하얀 의안.
나란히 앉아 달을 보며, 윤은 계양진의 조용한 밤을 문득 느꼈다.
둘 밖에 없다는 것과, 화평과 저의 사이 묘하게 자리 잡은 침묵을.
달빛 속에 빛나는 오른 눈은 핑계였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당신에게 닿고 싶었을 뿐.
툭, 화평의 작은 얼굴 반쪽을, 윤의 손이 가렸다.
“이 눈은 차갑습니까. 뜨겁습니까.”
무심한 듯, 들뜬 최윤의 목소리. 흰 술 같은 달빛 때문인지.
“뜨거워, 네 손.”
달빛에 취한 또 한사람, 화평은 살며시 윤의 손을 잡고, 손바닥 가운데 입을 맞췄다.
손금 사이로 더운 숨이 뱉어졌다. 손가락 사이로 타는 듯한 시선이 마주했다.
심장 주인의 긴 부재 동안 깊어진 감정. 둘 중 누구도 겁이나 쉬이 명명하지 못했던 그것은 화평의 원색적인 애정 표현 하나로, 제 이름을 찾았다. 사랑이다.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니었던 적, 없다. 미친 돌풍은 순식간에 둘을 휘감았다. 떨리는 입맞춤, 바닥을 하나 둘 구르는 옷가지. 맨살에 닿는 서로의 체온은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당신 무슨, 무슨 마음으로, 이 묵주를 목에 걸었나요. 네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살아버려서. 미안한 마음. 아, 아으. 한 번도, 두 가지가, 나에게, 함께 허락된 적은 없, 어서, 네가 살았다면,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에. 흐윽, 흐으윽. 어깨를 잘게 떠는 절망은, 윤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윤화평씨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있어서, 내가 살아 네가 죽었다. 산자에게 당연한 살아있다는 감정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죄악으로 차올랐던 많은 밤들.
“나 여기 있어요. 윤화평씨.”
하지만 오늘 밤은. 우리 둘, 다. 살아있네요. 볼을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살아있어서. 내가 살아있어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내 삶에 그저 살아있음 이상의 의미가 되어주는 이 사람 없이, 어떤 생이 의미가 있을까.
거실 소파에서, 화평은 눈을 떴다. 고개를 팔걸이에 편안하게 고이고, 작은 담요가 덮여있는 자신. 그리고 대낮의 찬란함 정 가운데 앉아있는 윤이 보였다. 집중한 얼굴.
어디서 성당 모양 레고를 사왔어, 최윤.
잠기운 가득한 평의 목소리가, 꾸역꾸역 윤을 놀렸다.
“지하철역에서요. 팔던데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의외로, 가톨릭은 우리네 생활 속 깊숙이 침투해 있다 구요.”
마룻바닥엔 여러 가지 모양의 브릭이, 동물 피규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주춧돌을 겨우 놓은 성당이 반석같은 교회를 지어내라 시위하고 있다.
화평은 끔뻑 눈을 감았다 떴다. 순식간에 검어지는 눈 앞. 그리고 다시 들이치는 빛 안에.
최윤, 그대로 있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평은 다시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윤화평씨, 점심 안 먹어요?”
으응. 응... 안먹어...
화평의 어렵게 뜬 눈앞에 뒤집개를 들고 서있는 윤. 어느새 블록으로 만들어진 교회는 아치모양의 정문을 올렸다. 첨탑이 반절 쯤 위용을 드러낸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은 다시 감긴다.
성당, 잘 지어주라... 귀신 다 도망가게...
일어나세요.
일어나, 윤화평.
점심은 굶었어도. 저녁은 먹고 자야지.
흔드는 손. 또 한번 떠진 화평의 시야에 윤이 가득 들어온다.
“으응, 알겠어.”
평이 스르르 웃으며 다시 눈을 감는다.
어휴.
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
윤화평씨. 대답만 잘하면 뭐 합니까. 에후. 또다시 작은 한숨.
“바라는 게 이건가요?”
평의 겨드랑이로 무릎 뒤로 들어오는 체온.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자동으로 윤의 목을 바투 끌어안는 화평이다. 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식탁의자까지 안아 옮긴다.
기껏 앉혀놨는데, 안즉 꼬빡꼬빡 조는 화평의 입 앞에 숟가락이 들이밀어진다.
찌개 새로 했어요. 먹어봐요. 어어, 화평이 겨우 입을 벌려 수저를 문다. 그리고,
뿅
화평의 눈이 드디어 떠진다. 맛있어! 최윤, 이거 뭐야! 주인집 아주머님이 갖다 준 묵은지입니다. 새 김치를 해서 많이 남으셨다 길래. 냉큼 받아왔죠.
“제 찌개가, 드디어. 수마 구마 성공입니까?”
“어!”
와, 진짜 맛있어.
와, 우와. 귀여워. 동물 모양.
이제야 윤의 필살기, 문어 소세지를 발견한 화평이다.
케찹을 푹 찍은 소세지에 계속 손이 가는 화평이 더 귀여운 윤이다.
“맛있습니까? 얼른 열심히 먹어요 그럼.”
웃는 윤에, 응. 알겠어. 평은 마주 웃으며 착하게 대답을 한다.
그리곤 수저로 푹푹 떠먹는 밥.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온 화평이, 그럴듯한 성당을 마주했다. 세 개의 첨탑, 형형색색 표현된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려진 성서 속 인물들은, 레고의 인물상을 따 우스꽝스러웠다.
와 이거, 다 만들었구나.
우와. 최윤 손 진짜 빠르네.
별 거 아닙니다.
머쓱하니 빨개진 볼을 긁는 긴 손가락.
“대단하다. 사제 애인. 신앙심이 취미생활까지 아주 제대로야.”
허리를 끌어안는 화평.
“임마누엘이랑 살아서 그런가봐요.”
“그렇구나. 마테오야.”
꾸며낸 근엄한 목소리. 내가 친히 불렀느니라 퍼뜩 답을 하거라.
예, 주님. 거실에 은은하게 퍼지는 웃음소리 사이로 쪽쪽대는 입맞춤이 작은 왈츠를 추었다.
한 집 사는 사람들의 두 취향. 로맨틱 코미디와 다큐멘터리 파. 홀수날과 짝수날로 갈라, 영화를 본다. 오늘은 홀수날이다. 그러니 화평이 보고 싶어 하는 로맨틱 코미디를 틀 차례라는 거다. 울긋불긋한 오프닝. 뚱땅대는 우스운 사운드. 허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갈등 한 번 겪기도 전에, 금방 윤의 어깨로 느껴지는 작은 무게.
윤이 비스듬히 고개를 내렸다. 역시나, 고른 숨을 내뱉는 화평이다.
“윤화평씨, 또 자요?”
“으응, 너무 많이 먹었나. 식곤증.”
윤은 흥미도 없는 티비의 화면을 꺼버린다.
대신 화평을 끌어안는다. 하루 종일 코 자서일까, 화평은 어린아이처럼 체온이 높다.
윤은 화평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다.
“어디 아픈 덴, 없죠.”
“또 또, 쓸데없는 걱정한다. 바보야.”
이마를 맞댄 거리에서 하는 모든 말들은 귀로 들리는 뜻보다도
입술에 끼치는 공기의 진동으로 더 많은 감정이 느껴진다. 걱정, 위로가 섞인 호흡의 잔떨림.
“아니면 됐습니다. 그래도 같이 건강검진은 받으러 가죠.”
윤은 화평의 손을 꼭 잡는다. 끄덕끄덕, 화평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잘 건가요? 아니.
“심심했어? 나 자는 동안.” “네.”
“너무 자서 싫은가.” “아니요.”
“하루 종일 당신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자는 모습 좋아해요. 강아지 같아요. 귀엽고.
나 혼자 있을 땐 잘 안자. 안자버릇해서. 근데 너랑 있어버리니까,
“안심이 된다?”
승리한 장수 마냥 의기양양해 하는 투의 윤 목소리. 화평은 웃었다. 응, 편하고. 눈 떠도 네가 항상 있고. 화평은 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배에 얼굴을 부볐다.
“최윤 강아지로 살래. 맨날 먹고, 맨날 자고, 논다고 미워하지 말아. 내가 좀 귀엽잖어.”
“누가 미워합니까.”
우리 강아지르을, 평의 양 볼을 쭈욱 당기며 윤이 목소리를 긁었다. 까르르. 화평이 웃는소리.
할아버지 이후로 처음이다, 나한테 강아지라고 하는 사람. 평이 더 가까이 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최윤 주인 나는 너무 맘에 드네.”
“그렇습니까?”
“밥도 잘 주고, 많이 예뻐해 주고.”
“그렇네요.”
정말 그렇네요. 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능청스런 윤의 인정에 턱밑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꽃봉오리같은 입모양으로 웃는 작은 얼굴이 있다.
“어렵지 않죠. 난 당신이 참 예뻐요. 항상, 언제나.”
윤의 손끝이 화평의 눈썹 모양을 덧그린다.
“팔불출.”
한참을 작은 대화로 채우는 순간들, 로맨틱 코미디를 볼 것도 없다. 둘의 일상이 서로에게 가장 달달하고 재미가 있었다. 윤의 허벅지를 베고 장난을 하던 화평은 등을 달구는 보일러의 따스함에 잠깐잠깐 눈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비날개처럼 깜빡이던 눈이 시선을 닫는 시간이 길어지고, 미안함에 파드득 깨어, 응, 안 잤어. 라고 부정하는 힘도 쪼르르 사라진다.
기어이 눈이 감기고, 숨이 편안해지는 화평을 말리지 않고 바라보는 윤이다.
윤화평 씨. 혼자면 잠을 깊게 못 자는 사람. 매번 불안했을 사람. 나쁜 장면을 많이도 보았던 사람. 꿈도 꾸지 않고 잔다는 화평에, 윤은 차라리 안도했다.
오늘만 두 번째, 화평을 안아든 윤이 침대로 향했다. 이번에도, 깨지도 않고 자는 화평이 윤은 참 신기하다. 이러니까, 저랑 같이 새벽 네 시에 일어나주는 거겠죠. 베게를 고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윤이 화평의 옆에 누웠다. 한 이불, 함께 데우는 침대. 윤은 화평과 같이인 하나 또는 함께라는 말이 붙는 모든 것에 감사를 올릴 뿐이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기다릴까, 기대하며 윤은 방을 비추는 전등갓 오렌지 빛 조명을 낮췄다. 잊은 것 없겠지. 보일러, 가스.
아, 잠깐만.
헛, 중요한 일이 떠오른 윤은 화평이 깨지 않게 살며시 이불을 들추고 나간다.
살금살금, 깨금발로 걸어 나간 긴 인영이 찬장을 뒤진다. 분명 여기 놨는데..
화평이 보지 못하게 저 위에 올려둔 참이다. 찾았다. 윤의 키로도 진녹빛 모서리가 사부작 보이는, 평에게 맞춤인 완전 범죄.
바스락. 윤이 꺼내든 것은, 미역이다. 정갈히 찬 물을 뜬다. 먼지를 털고 씻고 불린다.
기분 좋은 웃음이 입가에 맴돈다.
챙겨주고 싶은 날들이 있다. 그 중 제일은 바로 내일이다. 태어나길 잘 했다고 말하는 화평을 볼 때까지, 생일을 챙겨줄 것이다. 이 날을 기필코 행복하게 해 주리라. 고맙게도 이 세상에 온 당신. 당신의 존재만으로 숨소리로도 내가 얼마나 위로받는지에 대해 늘어놓을 날들이 우리 앞에 셀 수 없이 기다리고 있다.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윤의 뒷모습이 바쁘게 움직였다.
[상용시 경찰청 형사과]
“안녕하씹니까. 좋은 아침”
우렁찬 인사.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제 자리로 향한 길영이
툭, 책상에 선물꾸러미를 올렸다.
“오오 이건 뭐야아 깡. 역시 수고하는 내 선물?”
“아뇨. 윤화평이 오늘 생일이라.”
봉상은 눈썹을 씰룩였다. 이거이거, 이거이거. 깡 이거.
“너 아직도 그 동생들 만나냐. 그 잘생긴 사제 환속했다매? 혹시 너 때문..”
허헛. 길영은 기가 차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선배, 업무 적성 괜찮아요?”
“뭐?”
“그 관찰력으로 형사 하겠어? 제가 선배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 알죠. 나중에 걔들 볼 일 있으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유심히 좀 봐 봐요. 헛소리 말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윤화평 유부였냐? 말을 해, 어?”
이 좀 닦고 올게요. 봉상의 궁금함을 뒤로하고 치약을 칫솔에 묻혀 민트만큼 쿨하게 화장실로 향하는 길영이다. 뭐 그렇지. 이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오늘을 위해 준비한 길영의 선물은 커플 잠옷이다. 신혼부부용으로 나온 걸, 길영은 그냥 샀다. 윤화평 쪼끄맣잖아. 프리사이즈니까. 맞겠지 뭐. 마네킹에 입혀진 대로, 수면양말과 웃기지도 않은 동물모자도 함께였다. 고양이 귀 강아지 귀 깔맞춤한 털 슬리퍼도 세트로 귀엽게도 나와 있었다. 꽤나 돈이 들었지만, 길영은 으쓱, 심상히 카드를 긁었다. 내가 돈 쓰는 사람이 몇 된다고.
잘 살아라. 최윤, 그리고 윤화평.
남들 챙기는 거 다 챙기면서, 간지럽게 잘들 살라고.
자리에 돌아온 길영은 모니터를 보면서 골치를 딱딱 썩힌다. 이거 다 끝내야 윤화평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안 늦는데. 오후의 업무에 치이는 길영의 핸드폰으로,
띠링. 문자가 왔다.
[형사님 올 때 생크림 케이크 좀 부탁드립니다. 제일 큰 거로요.]
[신한 강길영 110-559-123794 5만원.]
재빠르게 계좌를 찍어보내고, 길영은 큭큭 웃었다. 허파가 간질거린다. 최윤과 윤화평이 일상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다닌다. 문득 기적같은 푸른 하늘, 한낮의 햇빛이 형사과를 따스하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