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역성 기적
숫자
1.
꿈이구나. 아주 사랑스럽고 나쁜 꿈.
볕이 좋았다. 안 그래도 마루에 앉아 동네 고양이랑 꾸벅꾸벅 졸았다. 등이 따뜻하니 잠이 쏟아졌다. 게을러터졌다고 등짝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날이었다. 낮잠이 길어지니 별 꿈을 다 꾼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지만 화평은 길영과 최윤,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이번 생에는 해후할 리 없는 귀한 손님들이었다. 기어코 찾아왔단 느낌보다는 화평이 부른 것 같달까.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꿈에 좋은 게 나올 때가 다 있네. 별일이다. 삶의 의지를 북돋으려는 것 치곤 퍽 잔인하다. 다신 못 볼 사람들인데. 그래서 집짐승처럼 귀엽게 굴었다. 애교 좀 부려도 되잖아. 오랜만이니까. 일 년은 지났나. 허상이라 생각하면 못 할 게 없었다. 강 형사랑 최윤 몰랐지? 내가 이렇게 귀엽게 굴 때도 있어. 귀염받으려고 살갑게 굴면 끝도 없다? 가끔 둘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 있었다. 남을 안아주는 법을 모르는 나무토막들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열두 살부터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진 사람처럼 외따로 살았다. 죄인은 엄마를 목놓아 부를 자격이 없었다. 외로움은 사치였다. 그래서 누군가의 품이 항상 그리웠다. 사는 내내 사람의 체온 같은 건 모르고 살았다. 셋이 다니는 게 껄끄러우면서 좋았다. 아, 육광이 형이 들으면 서운할 이야기다. 또래랑 어울린 건 처음이니까. 형이 이해해야 해. 어른이잖아. 어른이 참아. 애들 일에 끼지 말구. 알았어? 혼잣말이 제법 많이 늘었다.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러면 진짜 영험한 무당인 줄 안다. 신내림을 아주 작살나게 받은 박수라 소문난 김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들 등 좀 처먹고 살지, 뭐.
“잘 왔어요.”
두 사람은 틀림없이 화평을 알아봤지만 부정했다. 정상 시력이면 저 멀리서부터 확신했지. 외눈박이 인간도 바로 눈치챘는데. 결국, 한쪽 눈을 잃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니 몸 고장 난 곳은 살필 새가 없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사연 많은 박수에겐 기괴한 생김새가 어울렸다. 돈이나 많이 벌려고. 그래야 할아버지한테 물건도 보내고 소고기도 사 먹는다. 이제 스스로 몸 좀 챙기며 살아야 할 나이다. 보약도 철마다 해 먹어야겠어.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막대기들에 가까이 다가갔다. 강 형사도 호리호리하게 말랐는데 도대체 그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란히 서 있을 때는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최윤은 여전히 다부진 맛이 없다. 태권도라도 가르쳤어야 했나. 신부님, 뭐라도 좀 해봐. 헬스 다닐래?
“…….”
“…….”
봐, 우리 되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껄끄러운 게 없다. 물론 윤화평이 일방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둘은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둘이 약속하고 왔어? 입 꾹 다물고 있기로? 나 없는 사이에 은근히 친해졌네?”
그래도 우리 동네에선 미남 총각이라고 하면 다 안다. 그렇게 찾아온 거 아니야? 수려한 미남? 물론 귀신 총각, 무당 총각 소리가 훨씬 잘 통하긴 한다. 이 동네에선 화평이 유일한 삼십 대였다. 젊은이 중의 젊은이가 됐다. 그래서 보통 총각 하면 화평이다. 할매들이 내가 제일 어리고 예쁘댔어. 어린 게 장땡이래. 뭐라도 긍정적인 게 좋으니 착각하고 살았는데 도시 사람들이 보기엔 영 아닌가. 눈앞의 화평 때문에 말을 잃은 게 분명했다. 사실 동네 사람들도 밤에 마주치면 가끔 기겁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 아니면 해 떨어지곤 집 밖으로 안 나갔다. 우습지. 야간 택시를 쌩쌩 몰았던 윤화평 발이 묶였다.
그래도 역시 화평의 꿈이니까 못 할 일도, 창피할 일도 없었다.
“왜요. 눈 하나 없는 무당 처음 봐요? 아니면 묵주 목에 건 시골 총각 처음 봐? 나 우리 동네 패셔니스타인데?”
다시 만나면 사과부터 하고 싶었다. 내가 바다에서 아프게 했죠. 미안해요. 많이 다쳤나. 강골인 강 형사님은 봐주면 안 돼요? 나 이제 맷집 안 세. 그대로 돌려주면 몇 달을 앓아누울지도 몰라. 그리고 최윤은, 최윤 너는 몇 대는 맞아. 씁. 혼나야 해. 상상도 못 해봤지만, 역시 성숙한 재회 따윈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 하긴 그 전에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두 사람 품으로 뛰어들어 안겼다. 어색하게 서 있는 둘 사이에서 엉엉 울었다. 다행이다. 둘 다 멀쩡히 살아 있는 거지? 두 발로 걷는 거 맞지? 얼굴은 괜찮아 보이는데. 멀끔한 차림새인 거 보니까 둘 다 복귀한 거지? 이제 평범하게 사는 거지? 나 다 잊었지? 태산처럼 쌓인 궁금증을 꾹꾹 눌러 내렸다. 아니라고 하면 못 버틸 거야. 길몽이 악몽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악몽 싫다. 모든 게 다 내 안에 있는 것이래두 싫어.
그런데 화평을 따라 두 사람이 아이처럼 우는 게 이상했다. 우리 강 형사님이? 내가 살아 있는 게 억울해서 우나. 시뻘겋게 변한 최윤의 눈가를 열심히 닦아줬다. 마늘 까던 손인데 괜찮나. 꿈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근데 꿈에서도 마늘을 까다니, 이제 진짜 이 동네 사람 다 됐다. 좀 억울했다. 최윤이 맵다고 짜증을 내기 전까지 화평은 재회를 꿈이라 믿었다. 나를, 어떻게 찾아? 죽은 사람이 된 나를 무슨 수로 찾아? 둘 다 나 죽었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어? 헛소리 말라고 길영에게 꿀밤을 맞으면서도 눈만 껌뻑였다. 내가 대한민국 형사를 너무 만만하게 봤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 진짜 못 찾을 줄 알았거든. 윤화평 신분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얼떨떨하게 꿈에서 깰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귀신이면 썩 물러나라고 복숭아 가지를 흔들지도 못했다. 이다지도 따뜻한 체온을 가진 령을 화평은 겪어본 적이 없다. 진짜 사람 냄새가 났다. 꿈에선 느껴보지 못했다. 귀신을 주야장천 보고 사니 귀신이 아닌 것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길영과 최윤이구나. 정말, 정말 둘이구나.
그제야 펄쩍 뛰었다. 펄쩍 뛰니 어디로 못 가게 꽁꽁 묶어버리는 두 사람 때문에 깨달았다. 우리는 또다시 만났다. 윤화평이 숨바꼭질에 재주가 있는 줄 알았다. 우리 생에 다신 마주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귀신 보다 독한 인간들이네. 그래, 제 친구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정상인은 아니었다.
윤화평.
화평도 잊고 살았던 이름을 새로 들었더니 반가웠다. 그간 무명(無名)으로 살았다. 성도 버렸다. 박 씨가 주웠으니 박 아무개, 박무명, 박무당 뭐 이런 식으로 불렸다. 화평이란 이름이 낯설어 놀라웠다. 아주 익숙하고 당연한 게 이 정도가 될 만큼 떨어져 살았다. 윤화평은 아주 괜찮게 살았다. 지난 일 년을 마땅히 잘 보냈다고 자평했다.
2.
과거의 화평은 최윤과의 재회가 이렇게 좋고 아릴 줄 꿈에도 몰랐다. 평생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헤어짐이 최윤을 지키는 일이라 굳게 믿었다. 확실할 수 없었다. 큰 귀신이 사라지긴 한 걸까. 우리가 무언가를 해내긴 했나. 나는, 윤화평은 온전한 윤화평인가. 최윤의 예언은 여전히 유효할까. 그렇다면 최윤은 윤화평을 만나면 죽는 건가. 화평을 지키고 최윤을 지킬 확신이 없어서 숨어 살았다. 그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악연이라면 단호하게 끊어내는 게 맞다. 이십 년 전에 최윤의 인생을 망친 거로 족했다. 하긴 일 년 전에도 최윤을 아예 망가트릴 뻔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살았다. 적어도 최윤의 위험은 감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야 그를 잊고 살았다.
이제야 겨우 사람 꼴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윤과 다시 만나자마자 실감했다. 그리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잊고 살리라 다짐했지만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다. 윤화평은 여전히 최윤을 사랑한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최윤 식의 표현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렇게 간지럽게. 나는 열렬히 너를 사랑해왔다. 꼭 함께해야 하는 사랑은 아니잖아. 나 혼자도 너끈했다. 정도가 넘쳤다. 윤화평을 다 태우고 재만 남은 사랑이었다. 도통해야 이 고난에서 벗어난다던데, 가장 원초적인 인간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인과를 끊고 우주 삼라만상을 깨닫겠어. 윤화평은 못 한다. 애초에 이번 생은 틀렸다.
“어쩐 일이야. 근처에 뭐 볼 일 있어서 왔어? 자고 가. 방에 불 넣어줄게.”
쟤는 신부라 그런가. 사복을 입어도 참 정갈하다. 신부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최윤을 보는 게 생경했다. 집에서 쉴 때나 입지 않나. 지 닮아서 옷도 다 시커먼 거 입었던 거 같은데. 밖에 나올 땐 사제 티 팍팍 내는 인간이 이상한 차림새로 나타났으니 귀신인가 싶어 몇 번을 거듭 확인했다. 근처에 바다가 있어서 가끔 물귀신들이 장난을 친다. 이제 저들도 알았겠지. 먹힐 만한 상대가 누군지를. 그래서 어둑해졌을 때 최윤이 나타나면 꼼꼼하게 살펴봤다. 시력이 떨어진 탓도 있었다. 멀리 있는 건 흐려서 잘 안 보인다. 사제복 바뀐 건가. 내가 잘 모르나. 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난 최윤이 꼭 살러 온 사람 같아 낯설었다. 그간 몇 번 오간 적, 아니 오간 적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내려왔었다. 도망가지 않을 테니 그만 와도 된다고 몇 번을 타일렀는지 모른다.
“저 여기 살러 왔는데요.”
“뭔 소리야. 신부님이 왜 무당집에서 살아.”
“이제 신부 아니라서. 관뒀거든요. 땅 파서 먹고 산다는 무당 피 빨아 먹고 살려고.”
화평은 일 년 사이 천년은 늙었다. 어깨에 앉아 있는 것들이 나이가-아이쿠, 심술-연세가 원체 많았다. 살아 있는 사람보다 이들과 어울릴 일이 많다 보니 확 삭았다. 신중이라고 하기엔 귀찮은 게 많아져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는 게 많아져서 하는 수 없었다. 예전에 불같았던 윤화평 성질 다 죽었다. 도로 태어났으니 성격이 바뀐 거라 믿기로 했다. 몸이 골골거려서가 아니다.
그러니 어린 사제의 방종이 믿기지 않았다. 미친 거 아니야? 일 년의 세월이 애를 망쳤다. 성당 잘만 다닌다며. 사제가 아주 천직처럼 방긋방긋 웃고 산다며. 친절한 신부님이라 인기가 많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저 뻣뻣한 대나무가 그럴 리가 없지. 당장 멱살을 잡고 상용시로 올라가야겠다. 누구한테 빌어야 하지. 아는 신부라곤 최윤 하나다. 얘가 미쳐서 앞뒤 안 가리고 날뛰었는데 후회 중이라고, 신부가 천직인 애가 잠깐 돌았었다. 정신 차렸으니 도로 성당에 밀어 넣으라고 해야지.
“미쳤어?”
“아니요. 제정신인데요.”
“귀신에 홀린 거면, 거, 번지수 잘못 찾았다.”
가진 거 없이 쫓겨나 자기한텐 이 몸뿐이라는 최윤을 어떻게, 어디로 쫓아내야 효과적일까.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야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윤의 신이 돌아온 탕아들에게 후하다고 한들 어린양의 방황이 오래되면 안 된다. 세속의 맛을 본 게 실수일까. 이따금 화평은 제 사랑을 후회했다. 최윤을 망치다 못 해 타락시킨 이 사사로운 감정을.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받아주지 않을 거라 쉽게 생각했다. 화평은 괴로웠고, 마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궁지에 몰린 윤화평이 콱 물었다고 물리기냐. 윤의 마음이 화평에게 닿을 거라곤 상상 한 번 못 했다. 평생 신에게 종속되기로 맹세한 신부가 별거 아닌 감정에 휩쓸리기야. 이거 다 열병이다. 한때야, 한때.
“윤화평씨한테 홀렸는데요?”
“미친 게 분명한데?”
“뽀뽀도 안 해주는데 그럼 안 미칩니까.”
얼굴이 또 반쪽이다. 반쪽 될 것도 없는 얼굴이 반쪽이 됐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해. 얼마나 고달팠으면 다 죽어가. 악몽 꿀 일은 없다는데 그래도 덜컥 겁이 났다. 윤은 예언을 다 잊고 산다는데, 화평은 하나도 잊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일을 말하는 어린 사제를 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밥 한 끼는 먹이고 쫓아내야겠다. 한국 사람은 밥심이다. 여기서 며칠만 있어도 도망치고 싶어질 테니, 완전히 질리기 전에 잘 먹일까. 마지막 대접이라 생각하고 살이나 포동포동 찌워서 보내자. 빠짝 마른 게 아직도 젓가락이다. 소고기는 머리 팔아서 사 왔나. 돈도 없는 개털이. 화평 모르는 제사상에 소고기 올렸다기에 기함을 했다. 그런 거 둘 다 안 할 캐릭터 아니었어? 내 사진 세워둔 건 아니지? 길영과 최윤이 대답을 못 했다. 화평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야. 적당히 해. 나 살았잖아.”
“이제 전력으로 살라면서요.”
그간 어떻게 살았냐는 질문에 화평은 어떤 표정을 했더라.
글쎄, 어떻게 살았지? 원래 살던 대로 산 거 같은데. 그냥저냥 살았다. 바다 마을의 하루는 생각보다 아주 바빴다. 해가 뜨기 전부터 일이 많았다. 부정 탄 몸은 배 타는 거 아니라고 안 데려가서 아쉬웠다. 낚시 왕이 되려고 했는데. 마도로스 이런 거 멋있잖아. 그리고 요새 낚시가 유행이다. 난 왜 못 해. 횟감이나 낚고 싶다고. 처음엔 배를 타겠다고 떼를 썼다. 돈도 안 받고 오래 누워 있었더니 민망했다. 밥값이나 해야지. 마을 사람 모두가 말렸다. 선주들이 횟감 던져줄 테니 배 근처엔 얼씬도 말랬다. 제트 스키조차 못 잡게 했다. 한 번씩 먼 바다에 나가고 싶었다. 이젠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오해를 해서 깊은 물 근처에도 못 갔다. 처음에 그물에 걸려서 발견 됐을 때 고약한 꼴이라 그런다. 피 칠갑한 반시체였으니 이해는 한다. 할매들이랑 이런저런 소일거리 나누고, 여기저기 둥둥 떠 있는 넋 좀 건져내면 하루가 뭐야,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뭐 하느라 어떻게 숨어 살았냐는 말에 지난 일 년이 아주 빨리 지나갔단 대답 말곤 할 게 없었다. 적응하니까 금방 갔다. 양파나 마늘 잘 못 깐다고 혼나고, 조개 분류 늦다고 혼나고?
처음엔 몸을 가누질 못해 누워만 있었다. 내가 대박이 아니라 애물단지를 건졌다고 한숨을 픽픽 내쉬는 박씨 아저씨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기꺼이 화평에게 방을 내주고 돌봐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화평에게 살기나 하랬다. 반시체가 그물에 걸렸을 때, 모르는 척하지. 바다에 도로 고기밥으로 줬어도 원망 안 했다. 스스로 고기밥이 되길 자처한 걸. 박씨가 조금만 꾸물거렸어도 화평은 죽었다. 어떻게든 끝났다. 차라리 이번 생은 이렇게 마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쳤다. 화평의 스무 해는 너무 지난했다. 원수 같은 귀신 놈의 악의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화평은 사랑하는 이를 차례대로 잃었다. 믿음의 대가는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 말도 안 되는 몸 하나 갖겠다고, 삼대를 말려 죽였다. 악은 그렇게 무심했다. 그래서 윤화평이 완전히 동화되지 못 했다. 차라리 협박을 하지. 사랑하는 이를 훨씬 많이 살려놓고 몸을 내놓으라 했어야 한다. 그랬으면 기꺼이 화평의 몸을 내어줬을 거다. 지키기 위해서. 남아 있는 건 악뿐이었다. 네 놈을 이 몸에 가두고, 나와 같이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겠다는 일념 말고는 남은 게 없었다.
- 숨 쉬어! 뱉어내! 죽으면 안 돼!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박씨 아저씨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는데. 다급해서 잊어버린 거 아닐까. 시키는 대로 숨을 크게 뱉어냈다. 끝이 없는 것처럼 기침했다. 바닷물을 전부 게워냈다. 그게 다였다. 윤화평은 모양 빠지게 살아났다. 바다에 빠진 지 딱 사흘 만에 구조됐다. 물론 그 뒤로 정신을 잃었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었으나 그물에 그 때 그렇게 걸렸다. 누구도 믿지 않을 기적이었다. 살아있다고 박수를 치며 엉엉 우는 낯선 남자의 얼굴에 최윤이 겹쳐졌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네가 자꾸 떠올랐다. 내가 살아난 것처럼 너도 살았겠지. 앞으로 최윤의 삶은 평탄해야 할 텐데. 우리가 꿈꾸던 평범한 삶이 네 인생엔 펼쳐졌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빌고 정신을 잃었다. 양쪽 눈으로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 최윤의 환상이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시퍼런 바닷물이 아닌 걸로 족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게 원망스럽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윤화평의 선택이었다.
“요령 있게 살란 말이지. 최윤.”
“잘 살아보고 싶어요.”
최윤은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덕택에 입이 달렸어도 장식이 됐다. 이럴 땐 모르는 척 넘기는 게 상책이다. 남은 비상금 다 털어 소고기 샀더니 진짜 거지 됐다며 웃는 게 어이가 없다. 한 대만 때려도 될까. 그래도 철없이 구는 최윤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진정 미웠던 적은 윤화평 생애 단 한 번도 없어서 최윤을 와락 껴안기나 했다. 사고치고 왔으면 거침없이 움직이기나 해봐. 사람이 뭐 그리 소심해. 이제 더는 서로의 체온이 어색하지 않았다. 최윤 품에 안겨 한참 숨을 골랐다. 서로의 숨결이나 확인하며 등이며 어깨며 손에 잡히는 곳을 계속 어루만지기만 했다. 따뜻하고 참 좋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지?
3.
아무리 어촌 생활이 바빴어도 여태까지의 삶보다는 느긋했다. 온갖 귀신 놈들 쫓아다니던 때에 비하면 마음이 편했다. 살이 오동통 올랐다. 꿈도 이만하면 버틸 만했다. 화평은 더 이상 죽음을 막지 못 하는 무능력자가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꿈만 꿨다. 그들의 죽음이 반복된다고 할지언정 이미 끝난 일이었다. 살아남은 자가 감당할 몫이었다. 적어도 새로운 죽음이, 새로운 감응이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했다. 반 무당이 된 지금, 감사하단 말이 입버릇이 됐다. 안 그러면 신들이 노한단 말을 일 년 내내 몸소 체득했다. 귀신은 귀신이다. 그들은 공명정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명감? 그런 게 있을 리가. 이기적이고 한없이 가벼웠다. 그래서 악귀가 그리 제멋대로였겠지. 몸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 한, 어깨 위의 주렁주렁들 덕에 많이 배운다.
“최윤.”
깨우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다. 네 이름을 말해야 진정이 되니까. 최윤이 없는 밤엔 참 많이도 찾았다. 새벽이 지나고 동이 틀 때까지 너만 불렀다. 박씨가 이럴 거면 최윤이란 아가씨한테 가랬다. 아, 그러네. 동네에 최윤이 예쁜 아가씨로 소문이 나 있는데 어쩌지. 다시금 신부님을 쫓아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해졌다.
“마태오, 잘 자고 있지?”
가만히 몸을 일으켜 최윤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일정한 숨결에 마음이 놓였다. 가끔 최윤이 숨을 좀 크게 쉬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코라도 골거나. 왜 이렇게 얌전하게 자서 사람 속을 뒤집어.
헛소리다. 최윤은 가만있는데 윤화평이 여전히 악몽에 갇혀 사는 못난이라 그렇다.
일 년 전 최윤은 바닷속에서 죽었다.
우리 둘을 삼킨-아니, 정확히 말하면 귀신 놈까지 셋이었다-깊은 물 속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다. 귀신을 가둔 화평을 구하겠다고 제 목숨을 걸고 구마 의식을 행했다. 말려야 했다. 이것의 소멸은 온전히 화평의 몫이었다. 나랑 같이 사라지면 돼. 나는 한이 없어서 괜찮아. 이만하면 됐다. 죽을 거다. 최윤, 네가 이 정도로 해줬으니 윤화평은 충분했다. 이 몸에 모든 원흉을 가두고 내가 죽으면 되니까 날 구하지 마. 너를 살려. 최윤, 제발. 귀신과 함께 죽어가며 화평은 간절히 빌었다. 최윤의 신에게 사정했다. 이 친구를 살려만 주시라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 테니, 최윤의 목숨만 건지게 해달라고 얼마나 애걸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잡니까. 내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데.”
윤화평이 까무룩 정신을 잃기 직전에 최윤이 세 번째 예언대로 더는 숨을 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긋기 전에 제가 믿는 신의 품에 안겼다. 최윤을 항상 지켜봤던 신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어린 사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그래, 아마 어딜 가도 환영받을 인사다. 꼬장꼬장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내놓고 보면 모자란 구석은 없다. 신이 가르치는 숭고한 헌신을 보였으니 천국에 갈까. 네 너덜너덜한 영혼이 천국행 급행열차를 타지 않으면 화가 날 거다. 그렇지만 윤화평은 최윤이 제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 이건 아니지. 네가 왜? 윤화평 하나 갖겠다고 이 염병을 떨었는데 어째서 최윤이?
간절함은 절망으로, 절망이 격노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윤화평이야말로 악마가 되고 싶었다. 차라리 악귀가 되어 최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리라. 미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죽어가는 주제에 세상 모든 신을 원망했다. 그 중 최윤의 신을 가장 많이 미워했다. 내가 이 멍청한 어린 사제 하나 챙겨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지. 최윤을 항상 방치했으면서. 이 애의 삶을 고통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으면서! 윤화평이야 뭐 미친놈이 미친 짓 했다고 쳐도! 어떻게!
그리고 그 순간 어이없게 화평은 각성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이게 윤화평이란 그릇을 깨보려고 난리를 친 이유였을까. 갇힌 악귀를 대신해서 악귀가 된 것도 아니고, 세상의 법칙을 깨달아 절대자가 됐다. 궁극적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닌데 신이 화평에게 갑자기 신성한 힘을 줬다. 이럴 거면 빨리나 주지. 윤화평의 서른 두 해의 생에, 아니, 적어도 이 바다에 빠지기 전에만 줬어도 원망하지 않았다. 하다 못 해 최윤이 죽기 전에 윤화평이 깨달은 자가 됐어도 이 어마무지하고 미친 힘 좋은 데 쓰려고 애썼을 거다. 우주의 힘? 그깟 게 무슨 소용이지? 마음 속 화를 억지로 없애버리는 절대적인 존재들에게 대항하고 싶었다. 본질로 돌아가면 무시무종(無始無終)이기에 불생불멸이란다. 어떻게 그럽니까. 최윤이 있었는데. 윤화평 곁에 멍청하고 어린 사제가 숨을 쉬고 말을 하며 지냈습니다. 걔가 인형이었나요? 아니잖아요. 차라리 화평의 모든 기억을 소거했다면 모르는 척이나 해봤을 거다. 어차피 전생이 의미가 없다니까, 기억에 없는 최윤을 잊고 살았겠지. 근데 모조리 다 그대로 둘 거면서 어떻게 극복하란 말이야.
최윤은 우주와 지구 사이에 존재하는 만휘군상의 생명체 중의 하나라고? 최윤 넋은 무사히 윤회를 겪을 테니 그 아이를 가엾게 여기지 말라고? 화평이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답이 들렸다. 열불이 더 터졌다. 아니요.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다. 윤화평이 원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이뤄지지 않는 게 아니란다. 이럴 거면 신은 왜 시키는 건데. 절대자가 되란 이유가 뭔데. 중생을 구제하라면서 중생을 죽여 없애고 미륵불이 되면 무얼 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 하는 신이, 어떻게 신이야?
애초에 숭고한 희생 같은 건 윤화평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극복한다고? 전부 헛소리였다. 화평이 짧은 평생 원했던 건 세계 평화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사태평한 삶이었다. 이 모든 걸 망가트린 게 우주의 법칙이란다. 모두 절대자의 안배란다. 이따위 게. 윤화평이 다시 태어나는 세계의 법칙은 최윤의 죽음으로 시작한단다. 최윤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세계라면 멸망하는 게 낫다. 참 더러운 운명이다. 악연을 훨씬 뛰어넘는다. 다음 생의 너는 행복할 거래. 이렇게 외롭지도 않고, 고달플 일도 없을 거라고. 네 신이, 아니 네 신을 뛰어넘는 우주의 주인이 너의 다음 생을 보장해주겠다고 윤화평을 꼬여냈다. 반쯤은 넘어갈 뻔했다. 네가 살아나면 어쩔 건데. 한평생 믿고 의지한 스승은 알고 보니 악마의 하수인이었고, 네 믿음의 터전인 교회는 네 자격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너는? 네 영혼이 벌써 반이나 귀신들에게 뜯겨 남은 생이 얼마나 고달플지 상상이나 해봤어? 내 미래도 그려보지 않는 내가, 이 윤화평이 눈을 감고 있는 최윤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살이 썩는 고통에 다 죽어가는 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기만 해서. 그러다 결국 부마자들의 예언대로 죽을까봐. 네가 불쌍해서 내 주제에 매일 밤 고통 속에 살았다.
윤화평에겐 최윤의 죽음이 세상 가장 두려운 일로 변했는데 어떻게 너를 잡아먹고 내가 신이 되겠니. 이깟 신 안 하고 만다. 윤회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이보다 훨씬 비참한 삶을 백만 번을 살아내야 한다고 해도, 이게 내 업이라면 씻겠다. 다 씻어내고 벌을 달게 받겠다. 신이 제 뜻을 거스른 괘씸죄로 새로 설계한 삶이 지금보다 훨씬 윤화평을 비참하게 만들어서 사는 내내 너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윤화평에게 최윤의 죽음보다 고난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최윤은 이 인과에서 벗어나야했다. 화평은 중생을 구제하라는 절대자의 의견을 참고해서 최윤을 살려냈다. 화평의 우주는 시작되지 못 하고 끝났다. 이대로 죽어도 원통하지 않았다. 만약 살아난다면 윤화평은 악신이 될 테다. 최윤이 없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윤화평도 반드시 죽어 사라질 테니 참고하라고 협박도 했다. 당연히 신이 되는 건 포기했다. 이 주제에? 에이. 세상이 불쌍하다. 세상을 걸고 최윤 하나 살려내라고 협박을 하잖아. 이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걸.
“잠귀가 이렇게 밝은 줄 몰랐네.”
“이제 서서히 알아 가면 되는 거죠. 그래서 같이 살자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동거부터 시작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신부님.”
온몸이 깨지는 줄 알았다. 바다에 갇혀 있는 내내 화평은 불길을 걸었다. 차디찬 바다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이런 고통을 겪지. 이러다 진짜 미치는 거 아닐까.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반복하는 동안 계속 최윤을 죽일 힘이 남아 있다는 환청이 들렸다. 미친 소리. 차라리 남은 힘을 짜내 윤화평을 죽이고 말지. 그래도 다행이었다. 최윤은 살아 있으니까. 세상을 구하겠다는 엄청난 목표는 애초에 없었다니까. 그럴 거였으면 양친부모 멀쩡히 살아 있는 집에서 키우지 그랬어. 가정교육이 틀려먹었다. 가족의 정이라곤 느껴보지도 못 하게 키워놓고 뭔 소리야. 심성이 곱질 못 해서. 지구 방위대 같은 거 못 해. 우주도 없앨 수 있다. 그럼 지구 멸망하나. 예쁜 별비가 내리며 망하면 좋겠다. 헛소리에 귀나 후비적거리고 싶었는데 그럴 힘이 없어 처음부터 지금까지처럼 죽여 달라 하소연 했고 그마저도 안 되면 최윤의 묵주나 만졌다. 그럼 희한하게 위로가 됐다. 그렇게 버티다 마지막의 마지막, 박씨의 그물에 걸렸을 땐 어이가 없었다. 환상인 줄 알았고, 바다 밖으로 끌어내질 땐 어떤 고통이 남아 있을까 상상이 안 됐다. 두렵긴 했다. 사랑이 참 대단하더라. 미친 사랑이 모든 걸 극복하게 하나. 아니면 오기일 지도 모르지. 그래, 차라리 오기라고 불러야겠다.
- 미련한 놈. 너는 찰나의 감정으로 영원을 망쳤다. 네가 지상의 영혼 있는 모든 것들을 구제할 기회를 네 발로 걷어찼다. 지옥보다 못 한 곳에서 살아라. 가장 비천하게 살아내라.
화평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나를 놓아주나? 세상만물 모든 것이 나를 버리는 걸까. 어차피 가진 복도 없었는데 내게 무엇을 잃게 할 수 있나요. 가족, 친구, 내가 가진 전부는 어차피 다 다 죽었잖아. 이제 남은 몸뚱이 하나, 그마저도 온전치 못 한 것 같은데. 기대감에 들떠 미친 듯이 웃고 싶었으나 망가진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뭐 얼마 없었다. 웃었겠지. 입술이라도 들어 올렸겠지.
그리고 여태까지 버텨온 일 년은, 말한 대로. 저 위의 세상 높은 분들과 어울려 비천하게 살았다. 그게 화평의 업보라 생각하며 묵묵하게 살아냈다. 한 번씩 자기들의 왕이 되자며 꼬여내는 걸 무시했다. 그러면 귀신들은 성을 냈고 화평은 앓아누웠다.
“그럼 연애부터 할래요?”
화평의 눈꺼풀에 입 맞추는 최윤을 내버려뒀다. 다시 만난 순간 앞머리로 가린 오른쪽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이제 이쪽 눈은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네가 그쪽에 서 있으면 잘 안 보인다고 했더니 왼쪽에 서서 절대 윤화평의 시야각 바깥에 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따금 간지러운 짓을 했다. 잘 밤에 이러면 위험한 거 아닐까. 밀어내면 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상한 짓 안 한다고 최윤 주제에 윤화평을 달랬다.
“난 모르겠다. 정말.”
매끈한 최윤의 피부에 이를 박아 흔적을 남기고 싶은 밤이 있었다. 어쩌면 최윤의 신에게 대항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그 빛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고야 말겠다고 선포하고 싶었다. 천명을 이기려 들다가 망한 게 아닐까. 내가 믿는 신이 너 하나라고 우기면 봐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다 망했지. 나더러 신이 되라고 하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뒤통수야.
귀신을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그들에게 목숨을 빚져놓고 윤화평이 참 뻔뻔하게 최윤을 원했다. 그래도 나는 삼라만상을 포기하고 절대신의 반열에 오르란 제의도 거절했잖아. 네 목숨을 구하려고 내가 가진 건 전부 포기했으니까, 그러니까 구차하게 매달려도 되는 게 아닐까. 네가 나를 찾아왔으니 모르는 척 하면 안 되나. 미련하고 멍청하단 소리를 들으며 이 생은, 네가 무난하고 평화롭게 지낼 거라는 이번 생은 곁에 머물러도 되는 게 아닐까. 물론 윤화평이 엄청난 재난이라 언제 다시 최윤을 위험하게 만들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러면 내가 또 떠나면 되잖아. 나한테 가장 최우선은 최윤 너다. 내가 널 없애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내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해봤잖아. 그러니 네 뜻에 모르는 척 굽혀도 되지 않을까. 불행하게 살아낼게. 사실 내겐 불행도 아니다. 견딜 수 있다.
“다 몰라도 돼. 내가 알면 되잖아요. 곁에 있을게요.”
이젠 아주 자연스레 최윤의 품에 안겼다. 무서운 꿈을 꿨냐며 토닥이는 윤 역시 익숙한 손길이었다. 다시 만난 후론 계속 이렇게 껴안고 잤다. 어디 가지 말란다. 갈 데도 없는데 자꾸 보챈다. 아껴주고 사랑하겠다는 어린 사제의 말에 한참 더 놀아보기로 결심했다. 윤화평만 화평한 날이라도, 모르는 척 해볼게. 네 곁에 있어보자.
아무 것도 무르지 않을 테니 이렇게만 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