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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
졸피
Somehow - O3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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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률 시인의 「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라는 시에서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모든 영혼들을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며, 특히 당신의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영혼들을 돌보소서.

 

어항에 배를 까뒤집은 금붕어 한 마리가 둥둥 떠다녔다. 새벽 기도를 끝마치고 십자가에 친구하던 최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안을 살폈다. 시야 아래서 배가 부풀어 오른 송장의 눈알이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지느러미마냥 기괴했다. 언제 죽은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냉담자로 기록된 신자가 두고 간 물고기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몇 주를 버티던 녀석이었다. 의아함에 한참 동안 유리 수조 안을 살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절명을 관찰하는 행위의 의미는 이처럼 그저 그랬다. 죽은 금붕어를 관찰하는 취미는 없던 윤이 손으로 시체를 처리하려다 멈칫한다. 물고기는 사람의 체온에 화상을 입는다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죽음마저 평화롭지 못할 금붕어가 그제야 안쓰러웠다. 처음이자 마지막 호의로 시체를 명주천 한 조각으로 건져 올렸다. 보통의 존재에게 내미는 보잘것없는 호의에 불과했다. 헤진 모서리 끝에 스며들어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의 파편이 수면에 닿아 잘게 일렁였다.

 

비린내의 뒤처리를 끝내고는 시간을 확인하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답지 않게 아무런 경계도 없이 전화기의 폴더를 열었다가 그 자리에 못처럼 박혀 굳었다. 부재중 전화 1통. 윤화평. 익숙한 전화번호와 지우지 못한 이름을 보자마자 온몸의 핏기가 가신다. 다시는 보지도 만나지도 말자던 사람이 누군지 잊었나. 그렇게 사람을 내칠 땐 언제면서, 멀쩡하게 전화를 거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라고. 당신과 내가, 도대체 무슨 사이여서. 자기 불리할 땐 실컷 사람 흔들어 놓기만 하고. 웃기는 건 단 한 번도 빠짐없이 흔들리며 제 자리를 잃는 스스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에는 상처가 너무도 컸다. 기반이 한 번 무너졌던 건물은 무자비하게 불균형해지는 법이다. 윤화평과 공유하지 못할 시간을 놓으려던 다짐을 게워내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시간 동안 폴더 밑에서 웅크려 있던 부재중 전화에 수신했다. 긴장과 서운함에 마른침을 연신 삼키는 목울대가 쉼 없이 울렁였다. 윤의 귓바퀴에서부터 진득하게 뇌리로 타고 들어오던 신호음은 몇 초 채 지나지 않아 끊겼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윤화평의 홧홧하게 흐트러진 숨소리만 들려온다. 참 별것 아닌 일이다. 무슨 일이에요? 볼품없이 떨리는 말끝이 듣기 싫어 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깜깜한 세상에 술에 잔뜩 꼴아 비틀어진 화평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퍼졌다. 최윤의 세계에 윤화평이 번진다. 오로지 윤화평으로 가득한 세상. 윤과 화평만으로 구성된 집합. 윤화평. 최와 윤. 최윤. 신부님, 야, 최 사제. 최윤. 연이어 불리던 호칭을 빼곡하게 나열한다. 몇 번 겨우 얻어냈던 웃음을 떠올린다. 윤은 전파 너머 가쁘게 호흡하는 화평을 걱정한다. 온통 윤화평뿐이다. 문드러져 진물이 맺힌 가슴팍만 자꾸 헤집힌다. 신경질적으로 오른쪽 손목 주위를 긁었다. 가죽으로 된 시곗줄이 올가미처럼 살점을 죄는 바람에 토할 것 같네. 착잡함에 따라 윤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눈을 과녁 삼아 빛이 빗발치듯 시야를 꿰찼다. 이제 남은 건 적막밖에 없다. 용건이 뭡니까?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전화를 걸었으면 뭐라도 말해야 할 거 아니에요.

 

연거푸 숨소리만 들려주는 화평이 괘씸했던 나머지 전화를 끊으려 했다. 정확하게는 시늉만 내려고 했다. 윤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놓으려 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화평이 막혔던 말문을 텄다. 그리웠지만 제일 역겨웠던 경박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빗장뼈를 쥐어뜯는다. 악랄하고 기괴해진 속내로 화평에 모든 신경을 기울인다. 야, 최윤. 나는 있지. 그래…, 나는 말이야. 최윤, 나는 그러니까.

 

“내 불행이 전염될 거라 생각했어.”

 

내 주위 인간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도 알잖아. 너도 봤잖아. 부정적인 감정은 나약해진 인간들 머릿속에 파고드는 거 알잖아. 난 항상 미안했고 전부 다 내 잘못이란 걸 알았고 특히 너는 좀 더 나았으면 했어. 내 마지막을 네가 보지 않았으면 했고 내 마지막이 네가 아니길 바랐고. 그래도 너는, 그 지긋지긋한 구원 하나 받아서, 더러운 행복 누리면서 살길 바랐단 말이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이어지는 말에 이번엔 진심으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더 남았을 게 분명한 문장이 얼마나 속을 끓게 할지 가늠하기조차 버거워서 그냥 윤화평을 기억 속에서 통째로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빈 구멍을 메울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잊게 허락해주기만 해도 참 감사할 것 같은데. 차마 놓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윤화평의 허풍이 눌러앉은 귓가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감정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건 명백한 절망이었고 죄악일 텐데. 다만, 할 수 있는 게 체념과 후회 섞인 침묵뿐이라는 게 애석해서. 윤은 가만히 숨을 삼켰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목소리에 드문드문 달라붙어 목이 긁혔다.

 

어디예요?

 

 

 

 

 

선을 넘었어요. 지금 몇 시인 줄 알고. 달갑지만은 않은 목소리로 최윤이 말했다. 화평은 고개를 들어 윤의 낯을 살폈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다짜고짜 전화 건 새끼가 자기 집 앞에서 청승 떠는 거 보면 나라도 그러겠다. 화평은 한참 동안 윤을 올려다보다 세운 무릎을 양팔로 꽉 끌어안고는 머릴 푹 숙였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라고는 없는 멀끔한 낯이었다. 평소의 후줄근한 차림과는 달리 꽤 반듯한 모양새였다. 다림질해 각이 잡힌 셔츠에 맞춘 것처럼 딱 떨어지는 재킷까지. 이질감이 들다 못해 구역질이 났다. 화평의 옷깃과 목소리에서 술냄새가 나지 않았더라면 취했단 사실은 영영 모를 뻔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마신 겁니까? 옷은 왜 이렇게 입은 거고요.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대를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층 깎아내린 기대는 모멸감과 멸시로 돌아오지 않아 사람을 덜 참담하게 만들었다. “떠나려고 내치신 거죠?” 최윤이 묻는다. “그래야 박일도를 잡지.” 윤화평이 즉답한다. “그냥 다 포기하고 싶단 생각은 안 들었어요?” 쪼그려 앉은 윤화평을 내려다보던 최윤은 “너도 다 봤잖아. 사람들 죽어 나가는 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라는 윤화평의 매몰찬 면박을 받는다. 매몰된 언어를 꺼내고 싶지 않아졌다.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자마자 눈에서 비린내 나는 무언가가 흘러넘칠 것 같아 윤은 한참 동안 화평의 목덜미만 쳐다본다.

 

“박일도 잡을 수 있는 거 맞긴 해요?”

“야. 나 못 믿어? 난 죽더라도 그 새끼랑 같이 골로 가.”

오른쪽 눈이 쑤셨다. 그래서 왼쪽 눈만 떠서 윤을 쳐다봤다. 원래의 윤화평이라면 어디든 쳐다보지 않았을 게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껏 날 세워 말을 받아치던 화평이 찰나 고민하다가 중얼거린다. 아니다. 못 믿을 만하네. 최윤. 너는 나를 안 믿잖아. 이윽고 터뜨린 고름이다. 딱지가 내려앉은 줄로만 알았던 상처가 실은 덧났었나 보다. 윤화평이 침을 삼킨다. 목 살갗이 간지러운 줄 알고 벅벅 긁었지만 영 시원해지지 않았다. 성대 안쪽, 목보다는 기관지에 더 가까운 부위가 욱신거리며 간지럽다는 걸 알면서도 화평은 바짝 깎은 손톱을 서툴게 세워 긁어내렸다.

 

정말 평범하고 사소한, 보통의 일상일 텐데. 윤의 속이 뒤집어졌다. ‘어떻게 나를 의심하냐? 지금껏 같이 싸웠는데.’ 중첩된 목소리가 미워 죽을 것 같은 기분. 부풀어 오른 허파가 내장을 간질이는 바람에 숨을 죽이고 싶은 감각. ‘믿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은 아픔을 느끼고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입니다.’ 윤의 언어가 투영되며 나직하게 배열된다. 기억 속에서 재조합된 언어가 서툴게 대화를 빚어냈다. “같은 아픔을 느끼고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이지만 의심합니다. 믿을 수가 없거든요.” 윤은 기어이 속죄한다.

 

“원래는 안 이랬어요. 돌아갈 곳 없어져서 그런 거지.”

 

신발코만 쳐다보던 윤은 화평의 표정을 추측하고는 삼 초 후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다. 호선을 그리고 있던 화평의 입술이 닫혔다. 허옇게 질린 낯으로 입술만 잘근 깨무는 윤화평을 연민하게 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화평은 주저하는 걸음으로 윤에게서 벗어나려 들었다. 그제야 최윤은 팔을 뻗어 윤화평의 어깨를 억세게 쥐었다. 나름의 애원이었고 절규였다. 화평이 내치는데도 불구하고 윤은 쥐어짜듯 화평을 착취했다.

 

“제 헌신이 귀찮습니까? 저 때문에 불행한 거냐고요.”

“사사건건 시비네. 말했다시피 나는 원래부터 불행했어. 귀찮게 굴지 좀 마. 내가 괜히 찾아왔네. 마지막이 뭐라고.” 역시 마지막이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짓엔 이런 책임이 응당 따라왔다. 예상치도 못한 화평의 답에 문드러진 상처가 찢겨 진물과 내장이 동시에 쏟아진다.

 

“……항상 빼앗기는 역할이면서 내게선 모두 앗아가네.” 최윤이 말했다. 기어이 고백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를 악문 화평이 최윤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최윤? 윤의 살갗을 올가미처럼 죄는 로만 칼라를 무시하며 화평은 악을 썼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화평은 절망했다. 이러니까 안 되지,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은 똑같은 루틴이니까. 자조도 이젠 허탈했다. 윤화평의 최악은 이런 꼴의 죄악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사인데? 최윤의 멱살을 움켜쥔 윤화평의 손샅이 불안정했다. 경련하듯 떨리는 눈꺼풀을 빠르게 두어 번 깜박였다. 신부님,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냐고. 도대체 어떤 관계길래 그런 말을 꺼내. 그 말을 들으며 윤은 얄팍한 살갗 너머의 핏발 어린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슨 관계지? 최윤은 최윤이고 윤화평은 윤화평이다. 서로의 구역에 침범조차 할 수 없는 개개인. 아주 보통의 존재. 교집합이라고는 저주의 면역자라는 것 정도. 관계의 연명은 윤화평의 죄악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상기하며 최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소모하는 이 감정의 이름이 뭐지. 예기치 못한 시점에 튀어나온 의문에 윤은 화평의 시선을 피했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입을 달막이며 건조한 문장을 게워냈다. 세상이 어두웠다가 밝다가 세기 힘들 정도로 점멸한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이요. 절연을 당하긴 했지만.” 허, 참. 말이 끝나자마자 혀를 차며 헛웃는 건 화평의 몫이었다. 실은 화평의 웃음이 체념인지 조롱인지 비아냥거림인지 종체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윤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상념 탓에 대체 무슨 답을 원했던 거냐고 묻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근데. 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 잃고 싶지 않았고 잊고 싶지 않았고 더는 상실을 시도하고 싶지 않아서. 무릎을 꿇듯 절실하게 빌었다.

 

이번만 도망가면 안 돼요?

빗나간 애원이 화평을 겨냥한다. 한참의 침묵 후 떨어진 부탁이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도망가도 되지 않을까요. 나한테 남은 건 윤화평 씨뿐인데, 윤화평 씨는 꽤 많은 걸 가지고 있었네요.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미련하게.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는 말을 하기엔 최윤의 혀가 좀처럼 첨예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남은 유일한 희망이 당신뿐이라는 말을 할 만큼 성품이 유한 것도 아니었다. 윤은 말을 하는 내내 화평의 눈을 살폈다. 커다랗게 뜬 눈엔 잡다한 감정이 섞여 일렁였지만 그중 추악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남은 건 윤화평 하나가 유일한데 그걸 그 당사자만 모르고 있는 게 여간 원망스러웠다면 이러지도 않았을 텐데. 와중에 일렁이는 눈이 고요했다. 폭풍전야의 바다처럼. “내가 없던 당신의 시간을 갈구해요.” 내가 없을 당신의 시간을 증오해요. 풀 먹여 빳빳한 셔츠 깃에 목덜미가 쓸려 벌겋게 살갗이 까지면서도 화평은 비웃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윤은 말을 이었다. “신에게 바친 목숨이 당신을 위해 희생한다는데. 나의 신이 당신이라고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는데 내 헌신과 희생은 고작의 것에 불과했습니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윤화평 씨, 뭘 떠올리고 있냐고요. 모든 걸 잃었는데, 당신 하나마저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냐고.” 죄책감이 관계의 매질임을 알기에 윤은 비굴한 방식으로 화평을 붙잡았다.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화평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윤은 그런 화평을 연민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 고요함은 윤화평의 혼란 뒤에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와 같은 체념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그래. 당신은 이렇게 될 줄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거지? 허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헝겊에서 흐른 물방울이 뒤늦게 손목을 타고 내려와 윤의 셔츠 소매를 적신다. 화평은 대답을 준비해서 온 것처럼 충동적인 사람의 형태를 띠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뗀다. 전부 다 계산해서 왔으면서.

 

“당신이 살인자와 다를 게 뭔데, 라고 물었었지?”

 

여기서 내가 포기하면, 난 정말 다를 바 없어. 난 이미 망가진 지 오래야. 누구 도울 형편이 안 돼. 이거 전부 다 날 위해서 하는 짓이야. 내가 불쌍해서. 이렇게 된 나를 위로하려고. 이거라도 안 하면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기어코 화평은 자신이 맞닥뜨린 종말을 윤에게도 건네준다. 버석한 종이 같은 입술이 달막이다가 멈췄다. 최윤은 윤화평이 내린 침묵을 조용히 음미한다. 속에서 삭이느라 문드러진 언어는 서걱거리는 식감이었다. 가식을 닮은 포만감이 멍처럼 속을 채운다. 잘 있어, 최윤. 어느새 화평은 뒤돌아 윤의 반대편으로 몇 걸음 내디딘 상태였다.

 

날 선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후벼 파고 헤집는 게 일상인데 상처 안 받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금방 끊어졌을 인연을 억지로 붙잡는 게 웃기지도 않아. 이제껏 윤은 화평이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숨을 연신 삼켰다. 뱉어내진 않으면서 허파에 가득 숨을 욱여넣어 목울대가 불거질 정도로 감정을 눌러 삼키지만 습관처럼 잘 넘겼다.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게 일상이 됐었다. 그래. 그랬었다.

 

말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아플 수 있는 거구나. 오늘도 윤화평 씨는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구나.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고 그저 무력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모든 것을 상실한 이를 상실해야 하는 입장. 더는 아프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에 모순되는, 윤화평과 같이 있고 싶다는 욕심. 저주와 예언보다 더 끔찍하게 몸이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아주 느리게 돌아서는 화평의 어깨를 붙잡을 자신도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금붕어의 시체를 건져내며, 죽음을 손수 어루만지던 최윤은 윤화평을 떠올렸었다. 화평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지금 또한 그랬다. 윤화평은 꼭 물고기 같았다. 바다로 보내주고 싶다가도, 오래 보고 싶어서 가두려고 들었다가도, 혼자 발버둥 치는 게 너무 안쓰러워 보여 손으로 옮겨주고 싶어도, 빗나간 호의나 다정 따위가 너무 뜨거워서 다칠까 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 실상 상처 입는 건 항상 최윤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그제야 최윤은 더 이상 조각날 몸조차 없다는 걸 인지한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요. 사랑은 죄악인가요. 신뢰와 사랑은 유의어인가요. 모든 걸 놓자고. 도망가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같이 왼쪽으로 가자고. 더 오랜 길을 걷더라도 지겹게 붙어 있자고 얘기하는 게 꿈이었는데.

 

 

 

 

‘나도 마을로 가고 싶었어.’ 화평은 생각한다. ‘나 혼자 걷는 길은 무서워.’

 

뒤돌아선 윤화평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사뭇 조심스럽게 허파에 빽빽하게 숨을 욱여넣었다. 물씬 코끝에 스미는 비린내가 여간 지독한 게 아니었다. 검정으로 점철된 시야에서 번져 나온 건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하얀 것이라곤 오로지 목덜미의 로만 칼라뿐인 최윤, 최윤과 나. 우리로는 묶일 수 없는 각각의 단어.

 

최윤과 윤화평. 누군가를 나열할 때 타인을 먼저 내세우는 윤화평은 기어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최와 윤. 그 둘보다는 최윤이 더 소중해서. 이름 사이의 조사만큼의 간격은 최윤을 분리시키는 것만 같아서. 유치하게 한글로 이런 놀음이나 벌이며 시시콜콜하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놀음이나 하는 것 같아서. 화평이 입을 비죽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마다 하던 버릇이었다. 열 오른 눈가를 마른 어쩌면 메마른 손목으로 마구 비빈다. 눈 밑이 벌겋고 습하게 달아오르지만 행여나 누군가 볼까 봐 급히 소매로 닦아낸다. 그래. 어딘가에서 읽었던 시의 구절처럼 왼쪽으로 가면 화평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낭만적일 만큼 좆같은 이별이다. 화평은 평화롭지 못한 공복감에 허기에 주린 배를 쥐고 애정을 겨우 삭여낸다. 이번에도 화평은 최악 대신 죄악을 저질렀다. 사랑은 죄악이었고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이었으므로. 날마다 치명적 오류에 갇혀 살아가면서도. 그래도 하나의 오탈자는 몰래 용납하고 싶었는데. 윤화평은 문득 궁금해진다. ‘비좁은 몸에 윤이라는 한 음절만큼은 꼭 새겨보고 싶었었나?’ 한 번도 퇴고하지 못했던 오탈자에 그런 의문이 들어서. 가만히.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부레를 잃은 금붕어처럼. 아가미를 팔아버린 물고기처럼. 그림자로 내린 뿌리가 땅에 처박혀 아물 때까지. 최윤이 더는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서. 불안정한 관계의 끝을 느끼고. 기어이 불행해진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법조차 모른 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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