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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호호바

평화, 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윤은 화평을 생각한다.

 

성경을 읽을 때나 강론을 정리할 때…… 미사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평화 예식을 치르는 동안에는 한순간도 화평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제대 앞의 사제가,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화평을 생각한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라면서 두 팔을 벌리는 사제에게 화답하며 마치 무언가의 소임을 다하듯 한 번의 예외 없이 화평을 생각한다. 이웃의 평화를 바랄 때마다…… 주님 평화를 주소서, 라고 기도할 때마다 윤은 화평을 생각한다. 화평의 평화와 안정을 아버지께 빈다.

 

 

*

 

사람이 자취를 감추는 게 이렇게나 쉬운 일인가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화평이 말이다. 계속 거기 있을 사람처럼 굴다가 윤과 길영이 방심한 틈을 타 떠나버렸다. 성탄 무렵의 일이었다. 서류 작업에 파묻혀 정신이 없다는 길영을 상용시에 두고 혼자 화평을 만나러 화평의 집에 갔다. 출발하는 길에 화평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기에 저 지금 가요, 하고 문자를 한 통 넣어두었다. 답장이 오지 않았으나 자주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택시와 버스를 수차례 바꾸어 타고 화평의 집 앞에 당도하여 윤화평씨, 부르며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었다. 현관 앞에 늘어선 화분 중 하나를 치우자 열쇠가 보였다. 안에 없구나, 하고 윤은 알 수 있었다. 수확 후 그대로 방치되었는지 휑뎅그렁한 모습으로 놀고 있는 배추밭과 정리되지 않은 채 반쯤 땅속에 파묻힌 비닐봉지 끝자락 등을 둘러본 다음 집 뒤쪽으로 향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수풀 너머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사람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윤은 집 주위를 빙 둘러 다시 현관 앞에 섰다. 닫힌 문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슬슬 배도 고프고 날도 너무 춥고 이걸 어쩌나, 하다가 어차피 열쇠도 저기 있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얼굴도 못 보고 그냥 돌아가는 건 아쉽고…… 해서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화평이 자주 신고 다니는 슬리퍼 한 켤레가 보였다. 오른쪽 신은 거실로 통하는 미닫이문 바로 앞에, 왼쪽 신은 현관문 쪽에 뒤집힌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놓고 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아주 조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은 화평이 어디 가까운 데 외출한 줄로만 알았다. 적어도 윤이 보기에는 그랬다. 아주 잠깐 주인이 자리를 비운 공간처럼 보였다.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돌아올 것 같았다. 거기 화평이 없는데도 화평의 냄새가 났다. 화평이 평소 사용하는 이불이 방 한쪽 구석에 단정하게 개켜져 있었다. 식사 시간에는 밥상, 식사 시간 이외에는 책상으로 사용되는 앉은뱅이 탁자 위에 근처 배달 음식점의 쿠폰이 쌓여 있었고 싱크대와 욕실 바닥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먹을 것이 없나 싶어 냉장고를 열어 보니 1리터짜리우유갑에 우유가 반쯤 남아있었다. 유통기한을 확인한 다음 그것을 전부 마셨다. 찬장에 있던 컵라면도 하나 끓여서 먹고 먹은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자 할 일이 없었다. 어쩌면…… 조금 먼 곳까지 나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평이 말이다. 아랫동네에 소일거리를 하러 갔다든지 평소 살갑게 지내는 노인의 집에 얼굴을 비치러 들렀다가 그대로 발이 묶여버렸다든지 하는 이유로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붉은 석양이 사그라들자 어스름이 냉기를 몰고 왔다. 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하면서도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종일 기다렸음에도 끝내 화평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전화도 문자도 전혀 답이 없어 몹시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밤새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윤에게는 다음 날 정해진 일정도 있었다. 성탄절에 맞추어 처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메모지에 검은색 볼펜으로 윤화평씨, 최윤 왔다 가요, 라고 커다랗게 적어 두고 그 집을 나섰다.

 

상용시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화평 잘 만났느냐고 묻는 길영에게 아뇨, 어디 일을 보러 나갔는지 집에 없어서 못 만났다고 대답한 다음 서로 사는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가 그럼 이만, 끊겠다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상용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운행 중인 버스가 한 대도 없어서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황량한 겨울 거리를 내다보며 몇 번인가 더 화평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화평은 받지 않았다.

 

화평이 바닷가의 그 집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런 내용의 전화를 윤은 길영으로부터 받았다. 지금 윤화평의 집에 와 있어, 라고 길영은 말했다. 오랜만에 비번이라 얼굴을 보러 왔는데 이거, 아무래도 이상해…… 짐이 그대로 있긴 한데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수소문해보니 과연, 요 며칠 화평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현관 앞의 화분들이라든지 집안의 큰 가구라든지 식기 따위의 살림살이는 그대로 있는데 잘 살펴보니 없어진 것들이 몇 가지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의 영정사진과 가족사진, 초겨울에 길영과 윤이 돈을 모아 선물한 질 좋은 외투, 자주 신던 신발 몇 켤레와 즐겨 입던 옷 몇 벌…… 등이 사라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집이 묘하게 써늘한 게 마음에 걸린다고 길영은 말했다. 바닥이 얼음장 같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며칠은 불을 때지 않은 것 같다고, 이 추운 계절에 그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욕실의 칫솔과 비누가 바짝 말라 있고 화분의 흙에도 물기가 전혀 없어. 아무래도 이 자식 도망간 것 같아, 라고 중얼거리는 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화평의 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인이 돌아올 것 같은 빈집. 욕실에 세면도구가 그대로 남아있고 싱크대의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집. 너는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라고 길영이 묻기에 뭐가요? 라고 윤은 되물었다. 며칠 전에 너 혼자 여기 왔었잖아 그날…… 하다 말고 길영은 말끝을 흐렸다.

 

윤은 수화기를 귓가에 댄 채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길영이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평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왜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 했느냐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윤은 잘 알았다.

 

아무튼.

 

내가 한 번 찾아볼 테니까 너는 일단 틈날 때마다 그 자식 핸드폰으로 전화를 좀 걸어보라고 말한 다음 길영은 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끝내버렸다. 그리고 그 후 길영은 길영 나름대로 윤은 윤 나름대로 각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화평을 찾았으나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시간만 자꾸 흐르고 있었다. 길영은 한동안 화평을 걱정하다가 나중에는 화를 냈다. 다시 만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그새를 못 참고 도망을 가…… 윤화평 내가 꼭 찾아내고 만다. 찾아내서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곁에 두겠다. 내가 그 자식 제사를 지내는 일이 두 번은 없도록 할 것이다. 또 떠나겠다는 생각을 못 하도록 아주 무서운 맛을 보여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윤은 화가 난다기보다는황당했다. 서운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갈 줄 알았다. 아니면 간다는 티라도 내고 갈 줄 알았다. 물건을 버린다든지 화초를 처분한다든지 집을 구석구석 청소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공공연한 신변 정리를 통해 자신이 떠나리라는 사실을, 떠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같은 장소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릴 줄 알았다.

 

윤은 궁금했다. 그날 화평의 체취가 남은 화평의 빈집에 방문한 사람이 길영이었다면 어땠을까. 길영이었다면 물기가 남은 욕실과 싱크대라든지 냉장고 속의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우유라든지 아직 싱싱한 화분의 화초들이라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채 지워지지 않은 그 공간의 생활감에 현혹되는 일 없이 이상한 점을…… 그러니까…… 화평이 떠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을까.

 

알아차렸을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길영은 아주 유능한 형사니까. 게다가 그녀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집을 아주 많이 보았을 것이다. 언제 어디로 떠나겠다, 는 구체적인 예고 없이 무작정 자취를 감추어버린 사람들과 그들이 버리고 간 공간을 꼼꼼하게 살펴볼 기회가 자주 있었을 것이다. 윤은 아니었다. 뭔가를 남기고 자신이 떠난 적은 있으나 떠나고 난 뒤 남겨진 것들의 모습은 그다지 본 적이 없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윤은 부모님이 죽고 난 뒤 부모님의 방을 보았다. 한신부가 떠난 뒤 한신부의 집을 보았다. 양신부가 남기고 간 양신부의 물건들을 보았다. 기억 속에 남은 그것들을 화평이 떠난 뒤 남겨진 화평의 집과 비교해 보았다.

 

부모님의 방과 화평의 집.

 

한신부의 집과 화평의 집.

 

양신부의 물건들과 화평의 집…… 하고 생각하자 닮은 구석이 없지 않았다.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무언가가 빠져나간 허물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

 

화평이 도망갔다, 고 길영은 말했지만 윤이 생각하기에 그건 조금 이상한 표현이었다. 도망간다, 는 말은 나쁘고 위험한 것에 쫓겨 몸을 피한다는 뜻이 아닌가. 길영은 화평이쫓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무엇에게…… 악령에게? 혹은 악령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이상했다. 화평은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딪혀서 산산이 부서질지언정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윤이 알기로는 그랬다. 두려움에 굴복하여 달아나는 화평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두려움에 굴복하여 달아나는…… 화평, 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화평과 재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니까 아마도 지난가을 무렵의 기억이겠다. 특별히 무서운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악귀라든지 빙의라든지 구마라든지와 관련된 일도 아닌데 어쩐지 두려움, 이라는 단어와 쌍을 이루어 뇌리에 남아있는 기억이다.

 

화평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계양진에 내려갔다가 마침 거리도 멀지 않고 또 모처럼이니까, 라면서 화평의 집에 들른 날의 일이었다. 화평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뜸 저 윤인데요, 지금 거기 가도 되느냐고 묻자 별로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이 무덤덤한 어조로 어 그래, 놀러 와. 와서 하루 자고 가라고 화평은 대답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화평이 사는 해안 마을로 향했다.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종일 날이 흐리더니 기어코 퍼붓네, 라고 택시 기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하늘이 완전히 캄캄했다. 먹구름 때문인 것 같았다. 어쩌면 해가 짧아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직은 가을이라고 부를 법한 날씨였으나 곧 겨울이 올 거였다. 창문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바깥은 추운 모양이었다. 마을 어귀에 택시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자 화평이 보였다. 빗물과 함께 쏟아지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투명한 비닐우산으로 가리고 서 있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화평을 향해 뛰어갔다. 빗줄기가 촘촘해서 고작 몇 걸음을 우산 없이 옮겼을 뿐인데도 어깨가 다 젖었다.

 

“왔어?”

 

화평이 우산을 높게 추켜올려 윤에게 씌워주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그냥 볼일이 있어서 근처까지 왔다가…….”

“알았어.”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거였는데도 화평은 꼭 오래전에 만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윤을 맞았다. 우산을 나눠 쓰고 화평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윤이 말했다.

 

“안 반가운가 봐요.”

“어?”

“나 안 반가워요?”

“너무 반가운데.”

“…….”

“…….”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고.”

“놀랄 일이 뭐가 있어.”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온 건데.”

아, 라면서 화평은 조금 웃었다.

“꿈을 꿨어.”

“꿈?”

“선몽을 꿔.”

“…….”

“그게 잘 맞아.”

 

화평이 든 우산 아래로 걷자니 윤은 머리가 비닐에 자꾸만 닿았다.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다소 불편한 자세로 좁은 길을 걸어갔다. 화평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윤은 구두 속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밥은 먹었어?”

 

화평이 물었다. 화평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뒤섞여 어쩐지 아득하게 들렸다. 아뇨, 라고 대답한 다음 윤은 화평의 눈치를 보았다. 화평은 윤의 오른편으로 걷고 있었다. 좁은 오르막길을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바다가 보였다. 폭풍우 속의 검은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거대한 구렁처럼 보였다. 혹은 아무것도 아닌 어둠처럼 보였다. 나쁘고 위험해 보였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 라고 그때 화평이 불쑥 물었다. 거참 새삼스럽다, 고 생각하면서 윤은 그냥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일이 바쁘지는 않니, 그냥 그래요,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지, 그럼요, 아픈 데 없는 거지, 그럼요, 하다 보니 어느새 화평의 집 앞이었다. 우산을 현관 옆에 세워 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두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미리 난방을 켜 두었는지 공기가 훈훈했다. 차갑게 언 발바닥으로 따끈한 바닥을 가만히 딛고 있자니 피부 안쪽이 간지러웠다. 화평은 더듬더듬 벽을 짚어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파리한 빛이 천장에서 먼지처럼 쏟아졌다. 화평이 건네준 마른 수건으로 젖은 몸을 대충 닦고 앉았다. 화평은 방과 현관 사이로 복도…… 비슷하게 난 비좁은 공간에 서서 윤이 있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형광등 빛이 채 닿지 않는 자리라 화평의 발밑이 묘하게 어두웠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윤이 물었다.

 

“갈아입지 그래.”

 

화평이 말했다.

 

“갈아입을 옷이 없네요.”

“빌려줄게.”

“괜찮아요.”

“젖었잖아.”

“곧 말라요.”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해.”

“방이 이렇게 따뜻한데요.”

“…….”

“…….”

“불편할 텐데.”

“익숙해요.”

“…….”

“…….”

“알았어.”

 

말해 놓고 화평은 돌아섰다. 곧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윤은 앉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화평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물건이 많지 않은 방이었다. 앉은뱅이책상과 낮은 서랍장과 옷장을 대신해서 놓아둔 플라스틱 행거를 제외하면 가구랄 것이 별로 없었다. 방 한쪽 구석에 잘 때 사용하는 이불이 가지런히 개켜져서 쌓여 있었고 그 맞은편 벽에 창이 하나 나 있었다. 비스듬하게 내리치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사납게 두드렸다.

 

“오전에 이웃집 아저씨가 방어를 조금 나눠 주셨어.”

 

요즘이 방어 철이래, 라면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화평의 손에 커다란 쟁반이 들려 있었다.

 

“네가 올 것 같아서 안 먹고 냉장고에 넣어 뒀어.”

 

곧 상이 차려졌다. 생선회 한 접시를 제외하면 각종 김치와 푸성귀와 양념장 두어 가지로만 이루어진 조촐한 상이었다. 마땅한 잔이 없어서 매번 미안하다며 화평은 윤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거기에 소주를 채워 넣고 마주 웃으며 건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 말이 없어지면 침묵했다.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길어져도 그다지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제철이라는 방어회를 한 점 맛있게 먹고 술을 한 잔 마시고 화평이 마당에서 키운 채소를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서 먹고 또 술을 한 잔 마시고 하는 사이 윤은 조금 취하고 말았다. 빈 소주병을 두 손으로 쥐고 무심코 하하 크게 웃다가 어 내가 지금 왜 웃고 있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이렇게 웃고 있지…… 취한 거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어쩐지 아주 좋은 기분이 되어서 화평을 바라보았다. 화평이 뭔가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그다지 작은 편도 아니었는데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요, 뭐라고요, 라고 윤이 더듬더듬 묻자 화평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우리 신부님 너무 취하셨네.”

“맞아요.”

“그만 마셔.”

“네.”

“대답도 잘해.”

 

라면서 화평은 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화평의 손을 윤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평이 윤의 목 언저리를 검지로 건드렸다. 로만 칼라가 있는 자리였다. 왜요, 라고 윤은 물으려고 했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시선을 돌려 화평의 눈을 보았다. 우선은 왼쪽 눈을 본 다음 하얗게 혼탁해진 오른쪽 눈을. 그리고 다시 화평의 왼쪽 눈을 보았다. 색이 옅어 햇빛을 받으면 호박색으로 투명해지는 눈. 파리한 형광등 아래에서 보니 탁한 갈색이었다. 윤은 어쩐지 가슴이 갑갑해졌다. 흰색 옷깃을 푸르고 단추를 하나 끌렀다.

 

“씻어.”

 

화평이 말했다.

 

“씻고 쉬어.”

 

 

*

 

결국 화평의 옷을 빌리기로 했다. 청결한 냄새가 나는 검은색 티셔츠와 건드릴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추리닝 바지를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돌리고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취했다, 고 자각하고 나자 걷잡을 수 없이 취기가 올라왔다.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두고 간 칫솔이 세면대 옆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문득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서 수도꼭지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물이 너무 뜨거워서 깜짝 놀랐다. 수온을 적절하게 조절한 다음 샤워기를 틀었다. 뿌옇게 오르는 수증기 안에서 비틀거리며 구석구석 몸을 씻고 얼굴을 씻고 양치질까지 꼼꼼하게 마친 다음 옷을 갖춰 욕실 밖으로 나갔다. 방으로 돌아가서 보니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었다. 주방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윤은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고 휴대폰을 찾아서 들었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길영으로부터 문자가 여러 건 와 있었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두 번도 채 듣기 전에 여보세요, 하고 길영이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윤이에요, 말한 다음 지금 화평의 집에 와 있다, 화평과 함께 밥을 먹고 술도 많이 마셨다, 오늘 하루 여기서 묵고 내일 상용시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보고하듯 얘기해주었다. 길영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윤이 말을 끝마치자 몇 초 침묵하고는 그래, 라고 말했다.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라서…… 길영이 실제로 쓸쓸함을 느꼈는지 어땠는지 확실하게 알 길은 없었으나 아무튼 윤이 듣기에는 어쩐지 쓸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라서, 다음에는 같이 와요. 이제 곧 성탄이고 연말이고 신정이니까 셋이 같이 만나서 뭔가 맛있는 것을 먹자고 길영에게 말했다. 화평이 좋아하는 것이라든지. 즉 비싼 고기라든지. 아니면 겨울이 제철이라는 방어라든지 굴이라든지 과메기라든지…… 형사님 과메기 좋아하세요? 물으면서 윤은 정말로 좋은 기분이 되었다. 어쩌지, 라고 윤은 생각했다. 연말연시에 셋이 함께 모이면 너무 즐거울 것 같았다. 셋이 함께 보내는 기념일은 이게 처음이잖아. ‘너무’라는 부사를 굳이 사용할 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뭐랄까 굉장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취했구나, 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길영이 중얼거렸다. 취했어요, 라고 윤이 대답했다. 별일이네, 말한 다음 길영은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추운데 밖에 싸돌아다니지 마라, 일찍 자라, 내일 아침밥 챙겨 먹고, 윤화평한테 안부 전해 주고…… 하다가 아무튼, 잘 자. 이불 꼭 두꺼운 거로 덮고 자라고 인사한 뒤 전화를 끊었다.

 

머리카락이 젖은 채로 윤은 누웠다. 눈을 감자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자?”

 

머리 위에서 화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화평의 얼굴보다 천장의 전구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화평은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왔는지 뺨과 귓바퀴가 상기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최윤, 하고 부른 다음 화평이 말했다.

 

“머리 말리고 자. 감기 걸려.”

“너나 말려.”

“반말하네.”

“너나…… 말리세요.”

“그냥 반말을 해.”

“네.”

“왜 이렇게 꽐라가 됐어? 죄책감 들게.”

“윤화평씨.”

“어.”

“머리 말리고 자.”

“…….”

“감기 걸려.”

“알았어.”

 

대답하고서 화평은 윤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윤의 머리카락을 세게 비볐다. 아, 아, 하고 윤이 몸을 피했으나 끝까지 따라오며 물기를 말려주었다.

 

“아 짜증 나.”

 

윤이 말했다.

 

“우리 신부님 주사 있으시네.”

 

화평이 말했다.

 

“졸려요.”

 

윤이 말했다.

 

화평이 일어나서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웠다. 천장의 불을 껐음에도 방 안은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방문 근처 콘센트에 주먹 반 정도 크기의 수면 등이 꽂혀 있었다. 그 주위의 어둠 위로 가냘픈 주황색 빛이 동그랗게 스며들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윤은 화평을 향해 모로 누웠다. 화평은 바로 누운 자세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화평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가 다시 천천히 열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윤은 목이 말랐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저기요, 하고 화평을 불렀다. 화평이 고개만 돌려 윤을 보았다. 노란빛이 도는 어스름 속에서 화평의 양쪽 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윤은 말했다.

 

“아직 자지 마요.”

“왜?”

“…….”

“…….”

“아니에요.”

“뭐?”

“졸리면 그냥 자요.”

“뭐야.”

“아니에요.”

“…….”

“…….”

“자기가 졸리다고 해놓고.”

“졸린데 잠이 안 와서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곧 잠이 와.”

“…….”

“…….”

“…….”

“…….”

“안 오는데요.”

“아 거 참.”

“저기요.”

“응.”

“선몽이 뭔가요.”

“…….”

“좋은 꿈인가.”

“글쎄.”

“내가 나오는 꿈은 어때요.”

“음.”

“나랑 같이 밥 먹는 꿈. 나랑 같이 얘기하는 꿈.”

“그건 정말 좋은 꿈이다.”

“오.”

“…….”

“…….”

“아닌가.”

“뭐야.”

 

하하, 작게 웃은 다음 화평은 말했다.

 

“헷갈려.”

“뭐가요.”

“예를 들어…… 네가 밤에 꿈을 꿨어.”

“네.”

“근데 그 꿈에 내가 나와.”

“네.”

“나랑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이렇게 막 놀다가…… 잠에서 깨.”

“…….”

“좋은 꿈이야?”

“…….”

“…….”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

“좋은 꿈이잖아요.”

“…….”

“아니에요?”

 

물어 놓고 윤은 화평을 보았다. 대답을 재촉하듯이 어스름에 뭉개져서 불분명해진 화평의 두 눈을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화평은 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나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가만히 마주 보고 있었다. 화평의 왼쪽 눈이…… 전부터 그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기는 했지만, 더더욱 알 수 없는 눈이 되어 윤을 향하고 있었다. 저 눈은 대체 뭐지, 라고 윤은 생각했다. 행복한 사람의 눈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특별히 기뻐 보이지 않았고 눈에 띄게 슬퍼 보이지 않았다. 윤은 문득 알아차렸다. 화평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화평의 안에 있었던 무언가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악령 말고. 사악하고 해로운 그거 말고. 뭐랄까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 응축된 에너지 같은 것. 강한 빛을 내며 뜨겁게 일렁이는 것…… 아, 하고 윤은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화평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정말로 깜짝 놀랐어. 그럴 리가 없었다. 화평과 눈을 마주친 채 조용히 윤은 말했다.

 

“왜요.”

“뭐가?”

“왜 그렇게…….”

 

그런 다음 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주 보고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윤은 취기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피곤하고 몸이 노곤한데 이상하게 눈앞이 밝아서 이건…… 혹시 꿈인 건가, 화평과 함께 누워서 지금 나는 화평과 함께 누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막막한 기분이 되어 윤은 화평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평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가냘픈 주황색 어스름 속에 화평의 오른눈이 드러났다. 화평은 윤의 손을 피하지 않고 뿌리치지도 않고 얌전히 누워있었다. 잘 길이 들어 유순해진 짐승처럼. 굴복하여 체념한 사람처럼. 슬퍼요, 라고 윤은 말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정말로 좋은 기분이었는데 순식간에 슬퍼지고 말았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느냐고 나무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기요.”

 

라고 윤이 말했다.

 

윤화평씨, 부르자 화평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가 조금은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요.”

 

윤이 말했다.

 

“행복을 바라는 게 죄는 아닐 거예요.”

 

말해 놓고 화평의 대답을 기다렸다.

 

화평은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윤을 보았다. 가장 깊고 어두운 곳까지 남김없이 들여다볼 기세로 한참 동안 공을 들여 쳐다보았다. 윤이 무심코 시선을 피하자 윤이 없는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화평의 뒤통수와 화평의 등을 보고 있자니 윤은 또 슬펐다. 발끝부터 서서히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슬픔이었다. 쓸쓸하고 불안했다. 뱃속 아주 깊은 곳에서 태어나 서서히 피부 아래로 영역을 넓혀가는 써늘한 기운. 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화평의 이름을 두어 번 불러보았다. 화평은 그새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그런 기억.

 

 

*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길영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라고 말하기 위해 여, 까지 말한 참에 찾았어, 라고 길영이 말했다.

 

주일 오전의 교중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눈 뒤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사제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해의 첫눈이었다. 화평과 함께 가라앉았다가 홀로 위로 떠올라서 두 번째로 맞는 눈이었다. 화평과 재회한 후 화평을 다시 잃고 일 년 남짓이 지났다. 윤은 무사히 서른넷의 한 해를 살았다. 그는 이제 곧 서른다섯 살이 될 것이다. 화평 역시 마찬가지이다. 살아있다면 서른다섯 살. 그다음 해에는 서른여섯 살. 또 다음 해에는 서른일곱 살, 서른여덟 살…… 하는 식으로 나이가 들어 갈 것이다. 행복할까, 라고 윤은 생각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꼬박꼬박 살아지는 화평의 삶은 행복한 삶일까.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일까.

 

“가자.”

 

수화기 저쪽에서 길영이 말했다.

 

“네?”

 

윤이 말했다.

 

“바빠?”

“네…… 오늘 중으로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이…….”

“됐고.”

 

가자.

 

찾았다.

 

내가 윤화평 찾았으니까 지금 같이 데리러 가자고 윽박지르듯이 말한 다음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길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윤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로 한동안 서 있었다. 먼지처럼 흩뿌리던 가루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춤을 추듯 허공에 머무르다가 조금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더니 윤의 뺨에 떨어졌다.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코와 귀가 얼얼했다. 주일학교가 끝났는지 별채 쪽이 떠들썩했다. 뒤쪽에서 누군가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신부님, 하고 윤을 불렀다.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윤은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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