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메타포>
누으리
“오늘 계주 선수 뽑을 거라고, 100미터 기록 잰대.”
“어차피 2, 3학년 위주로 뽑지 않나?”
“그래도 눈에 띄게 빠른 애 있으면 쓸 수밖에 없잖아.”
윤은 긴 다리를 쭉쭉 피며 스트레칭을 했다. 오랜만에 볕이 내려왔다. 며칠 동안이나 내린 봄비도 그쳐 하늘마저 쾌청했다. 붉은색 타탄 트랙에 고여있던 물들도 다 말라 있었다. 실내에서 근육 트레이닝만 하는 게 얼마나 지옥 같던지. 윤은 이제나 저제나 비가 언제쯤 그칠까 기다려왔다. 달리지 못해 좀이 쑤시기도 했고 선배들 사이에 껴있는 것이 고역이라서. 훈련할 때는 항상 단거리, 장거리, 투척, 장애물을 나눠서 하는데 비가오니 다 같이 트레이닝 실에서 돌아가면서 훈련을 해야 했던 것이다. 부 활동을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코치가 학생들을 달랬다. 눅눅한 체력단련실에서 하는 복근 운동은 정말 끔찍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단거리 층이 얇으니까 너도 가능성 있을 거 같은데.”
“그런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선수가 훨씬 많았고, 학교의 효자종목은 장애물과 장거리였다. 그럼에도 윤이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같은 학년의 단거리 선수 때문이었다. 자기가 모르는 새에 단거리에서 장거리로 전향한 모양이지만. 윤은 장거리 선수들이 모여있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윤화평. 저랑 나이도 같으면서 항상 인생 다 산 얼굴을 하고 다니는 애였다. 장난을 칠 때는 그러지 않는 거 같던데. 처음 육상부에서 만나 저, 나 최윤인데 같은 학교 와서 반가워하며 말을 해도 어 그래 하면서 느물대며 대답하고는 저 멀리로 가 버리곤 했다. 같은 지역 출신이면서 그렇게 서먹하게 굴었다. 왜 단거리에서 장거리로 옮겼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래, 기록이 더 좋았던가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최윤이란 선수가 기억하는 윤화평은 항상 자기를 앞서가는 눈앞의 하얀 등이라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무늬도, 브랜드도 없는 흰 티셔츠를 입고서 저를 앞서가는 그 모습이 눈앞에서 선한데. 화평이 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비겁하다 뭐 그런 말을 하진 않을 테지만. 그냥 묻고 싶었을 뿐이다. 윤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자, 다 학년별로 줄 서라. 1학년들이 앞에 서고. 이름순대로. 단거리가 제일 앞으로 그리고 장애물, 장거리로 서라 고 코치의 호령에 퍼져있던 무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윤은 군집에서도 눈에 띄게 위로 겅중 솟아올라 있었다. 이번 1학년들은 되게 크네.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평은 그 말을 들으며 쟤도 꽤 빨라요 하고 답했다. 아는 사이? 그냥 좀. 윤은 뒤에서 들리는 화평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말하는 건지.
코치의 호루라기 소리에 앞에서 셋씩 앞으로 튀어 나간다. 윤은 차례가 다가올수록 덩달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뛰기 전에는 항상 이랬다. 윤은 스타트 라인에 서서 몸을 굽혔다. 삐이이익. 흰색 스타트 라인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트랙을 힘주어 밟고 몸을 앞으로 밀어내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넓은 보폭으로 나아갔다. 백 미터는 정말 금방이었다.
10초 98! 오오오 하고 뒤편에서 감탄이 나왔다. 100미터 10초대라고. 저 정도면 계주는 확정이네. 화평은 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서 여전히 잘 달리네 하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보다 기록이 훨씬 좋아졌다. 고작 삼 개월이 이렇게 크게 영향을 끼치던가. 화평은 슬슬 어깨와 다리를 풀며 달릴 준비를 했다. 갑작스러운 출발에 근육이 놀라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화평은 항상 출발이 빠른 편이었고, 그만큼 근육이 놀라는 부상도 더러 있는 편이었다. 나름대로 근육은 유연한 편인데. 마지막으로 발을 탈탈 털며 라인 앞에 섰다. 결승선 근처에서 윤이 기웃거리며 화평을 지켜보고 있었다. 질리도록 달리는 걸 봐 놓고서는 아직도 그렇게 관심이 가는지. 호루라기가 울렸다. 화평은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트랙을 뛰었다.
아, 역시 잘 달리네. 윤화평. 윤의 옆에 서 있던 동급생이 감탄했다. 쟤 장거리로 전향한 거 너무 아깝다. 놔둬라. 자기가 장거리가 더 좋다고 바꿨다잖아. 처음부터 코치가 붙들었다고 한 거 생각 안 나냐. 윤은 의도치 않게 화평이 장거리로 떠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좋아서 간 거구나. 10초 95! 코치의 외침에 윤은 작게 손뼉을 쳤다. 분명 가볍게 달렸겠지. 그래도 빨랐다. 여전히 화평은 제 앞에 있었다.
윤은 계주의 2 주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록이 제법 좋았던 화평은 4 주자였다. 방금 불었던 바람이 역방향인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4 주자를 맡을 수 있다는 코치의 결정이 컸다. 화평은 제가 4주자를 맡아도 되는가 고민했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4 주자인데 2, 3학년들이 맡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계속해서 화평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하기 싫다고 할 수도 없는데.
고 코치는 제가 4 주자가 된 것이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자기가 캐스팅을 해왔으니 그럴 만도.
처음에 데리고 올 때도 전공을 단거리로 데리고 왔는데 테스트 날 갑자기 장거리로 전향한대서 울고 불며 바지를 붙잡았었다. 화평아, 왜 장거리로 전향하겠다는 거야아 하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저를 흔들어댔다. 그냥 장거리가 좋아서요. 더 오래 달릴 수도 있고. 의미 불명한 말에 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너 장거리 기록 안 나오면 단거리로 가는 거라고. 화평은 알겠다며 몸을 풀었다. 중학교 때는 단거리도 뛰고 장거리도 뛰었다. 아무래도 단거리 기록이 월등히 빨라 그쪽만 부각되는 되는지는 몰라도 장거리도 나쁜 기록은 아니었다. 사람은 원래 성취하기 어려운 것에 심취하지 않던가. 그건 핑계고 그냥 장거리가 달리고 싶었다. 나쁘게 말하면 객기겠지만. 뭐, 좋게좋게 말해 패기로 치자. 출발선이자 결승선에 선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화평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착, 착, 착, 착. 화평은 타탄 트랙에 발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조금 변태스럽지 않냐? 하고 2살 위의 길영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질리는 얼굴을 했다. 화평은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 하고 대꾸했다. 400미터는 100미터보다 훨씬 길었다. 다 온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도 한참이나 더 돌아야했다. 화평은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렸다. 아무래도 아직은 단거리에 맞춰져 있으니까. 도착점에 들어가자 코치가 스톱워치를 힘주어 눌렀다. 좁은 액정을 보고서 코치는 입술을 먹듯이 깨물었다.
“어차피 장거리 선수층이 강하잖아요. 하나 더 키워보시죠?”
“그러니까 단거리를 데려온 거 아니냐... 대체 왜 장거리로 가겠단 거야.”
“처음부터 장거리가 더 좋았다고 그랬잖아요. 저 1600미터도 달릴 수 있어요. 원하면 단거리도 뛰어드릴게요.”
화평은 잠시 처음으로 1600미터를 뛰었다가 마구잡이로 토해버렸던 일을 떠올렸다. 잘 뛰는 사람이 하나 더 있으면 좋으니까 하는 생각에 나갔다가 온갖 쓴맛은 다 봤다.
“야, 우리가 애 잡을 일 있냐. 그건 선수층이 얇을 때나 하는 일이고.”
“그럼 다행이고요.”
“이게 자꾸 말을 줄이네. 아, 장거리도 기록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진짜 미치겠다 너 때문에. 응?”
“후회 안 하게 해드릴게요. 코치님. 그리고 솔직히 말해요. 기록 잘 나왔죠?”
화평을 얄밉다는 듯이 쳐다보던 코치는 그래, 하고 아주 작게 말을 했다. 화평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한 거 같더라 하고 능청을 떨었다.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저만큼 빠른 애 들어올걸요.”
자신보다 훨씬 어린애가 입술만 늘여 웃는 게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해 보여 고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게 쟤였을까.
고 코치는 윤의 프로필을 후루룩 훑었다. 작년 동안 공식기록이 모두 화평보다 바로 뒤거나 그 다음 등수였다. 화평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경쟁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고 코치는 장거리 선수들 사이에 끼어 하품을 하고 있는 화평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혹시나 경쟁하기 싫었던 건 아닐까? 어린애들 사이에서 으레 들 수 있는 감정이니까. 코치 생활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 감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직접 물어보면 상처받겠지. 아직 어린애들이니까. 고 코치는 조용히 파일을 덮었다.
* * *
“야, 너 계주 나간다며?”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하여튼 소식 빨라.”
매점에서 맞닥뜨린 길영이 바나나 우유를 빨아 마시며 화평에게 아는 체를 했다. 내가 왕년에 육상부 아니었냐. 투척이었잖아. 투척은 육상 아니냐? 맞습죠. 화평은 베지밀 비를 쭈륵 힘주어 빨아 당겼다. 아무튼 나름 친했던 후배가 알려주더라. 으응, 그랬구나. 우리 선배님은 공부는 잘 돼 가시나 몰라. 아직 4월이잖아, 조용히 해.
“하여튼 간에 잘해라. 장거리는 당연 예선 통과일 거고. 너만 잘하면 되니까. 계주는 그게 아니잖아.”
바톤 넘기는 거 잘못하면 바로 나가리고. 후루루룩. 빈 공기가 팩 속에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화평은 어깰 으쓱했다.
“잘하겠지. 다들 계주 뛰어본 거 한 두번도 아닐 거고. 적어도 학교 운동회에서라도 뛰어봤을 거 아냐.”
"비유를 해도 꼭."
편하게 생각해야지. 편하게.
* * *
그러나 화평의 바램과는 다르게 계주팀은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배턴을 넘기는 구간에서 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바톤은 물 흐르는 듯이 넘겨받는 게 베스트. 그 이외에는 모든 것들이 타임을 늘어지게 만든다. 특히 문제인 구간이 3-4 주자 간이라 수없이 루틴을 반복한 화평은 트랙에 엎어져 헉헉 거친 숨을 내쉬었다. 쉬고 있으라는 코치의 말에 다들 벤치나 운동장 바닥에 앉아 수분을 보충했다. 몇 번이고 매끄럽게 주고받으려 노력해도, 거칠게 넘겨받기를 여러 번, 배턴 존에서 속도를 줄이다가 멈춰서기도 했다.
넘겨받을 때 신호음이 문제인건가? 그건 아닌데. 화평은 이미 너절해진 몸을 일으키며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여기. 윤이 화평에게 포카리를 건넸다. 화평은 흰 티셔츠를 들어 올려 눈가의 땀을 훔쳐내고 윤이 건네는 걸 받았다. 땡큐. 땡볕에 있어서인지 미지근해진 포카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리 마사지해 줄까? 화평의 옆에 자리 깔고 앉은 윤이 물었다. 어. 고마워. 벌써 다리가 덜덜 경련하고 있었다. 고 코치가 함부로 근육 만지지 말랬는데. 눈알이 튀어나올 거 같이 부릅뜨고 말하던 모습이 번쩍 떠올랐다. 지금 그게 대수냐. 조심스레 근육을 만지작거리는 윤에게 다리를 맡기고 화평은 음료 한 통을 다 비웠다.
“내일 아침에 나와서 맞춰봐야겠네.”
“아침 훈련보다 더 일찍 나오려고?”
“호흡이 안 맞으니까 어쩔 수 없지. 방과 후에는 개인 연습도 해야 되니까.”
화평은 대충 쪼개야 하는 시간을 계산해봤다. 대회 예선까지 엄청 빠듯하겠네. 이제 됐어. 고마워. 화평은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윤의 손길을 물렸다. 윤은 아쉽다는 얼굴을 하며 마사지를 멈췄다.
“야, 근데 너는 왜 나한테 잘 해주는데?”
화평은 윤이 저만 보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웃는 게 영 맘에 안 들었다. 라이벌로도 생각을 안 했다는 거야 뭐야. 이제 평생 단거리에서 나, 이길 일도 없을 텐데.
“딱히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었는데. 네가 워낙 빠르기도 했고.”
“얘가 뭐라냐. 그럼 너 대체 왜 달리는 거야?”
왜 달리는 거냐니. 그냥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육상할 생각 없냐고 물어봤고 생각보다 달리는 게 기분이 좋아서.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윤의 얼굴을 보면서 화평은 제가 기운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됐다, 됐어. 네가 누굴 이기고 싶어서 달리지 않는 건 알겠다.”
화평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도 그렇게 빨랐다 이 말이지. 쟤랑 같이 경쟁했다가는 내가 화병 걸려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중학교 때는 너랑 달리는 게 좋았어.”
흑, 켁. 화평은 마신 것도 없는데 갑자기 사레라도 걸린 듯이 기침을 해댔다. 지레 놀란 윤이 괜찮냐며 굽혀진 화평의 등을 두드렸다. 영화 찍는 줄 알았네. 우리 그때 같은 학교도 아니었거든. 경쟁 상대였던 거 까맣게 잊고 있는 거 아냐? 하필 얼굴도 꼭 영화배우처럼 생겨서는 자기도 모르게 이해가 가게 만든다.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장거리로 바꾼다길래 좀 섭섭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계주에서 같이 달리니까 좋다.”
헤, 소리가 날 것처럼 웃는 모습에 화평은 잠시 멈칫했다. 나도 충분히 골 때리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도 만만치 않았구나.
“너 좀 이상하다는 말 많이 듣지 않아?”
“아니 별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드니. 잘생긴 놈들은 뭘 해도 용서가 되는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4차원 소리나 듣고 말았겠군. 그래 뭐, 앞으로 같은 학교끼리 열심히 해보자. 화평은 윤에게 틀에 박힌 격려를 건네었다.
* * *
“선배 배턴존에서 속도 줄이지 말고 끝까지 전력으로 달려주세요.”
화평이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부탁했다. 이제 어느 정도 존에서 매끄럽게 넘겨받는 건 가능했다. 화평이 속도를 줄이면. 어떻게든 잡아주겠다는 말은 했지만 이대로는 예선 통과도 어려워보였다. 작년 예선 기록보다도 2초나 뒤처졌다.
“다른 종목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것도 그만큼 중요하잖아요.”
체력 아끼려고 하다가 속도도 더 늦어지고. 윤과 1 주자인 영재가 뜨악한 얼굴로 화평을 쳐다보았다. 쟤가 진짜 사소한 거 신경 안 쓰는 애인 줄은 알았지만. 영재는 자기 미간사이를 문질렀다. 하필 3 주자가 3학년이라. 코치가 말해도 기분 안 나쁘게 넘어갈까 말까인데, 자기보다 두 살이나 어린 자식이 말하면 퍽이나 듣겠다.
“그럼 영재 선배가 좀 말려주세요.”
현우 선배, 금방이라도 주먹 날릴 것 같은데. 윤의 언질에 영재가 둘 사이를 막으러 가려는 사이에 현우가 화평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다. 화평이 힘없이 뒤로 넘어가자 윤과 영재는 뛰어갔다.
“아니, 형. 아무리 짜증나도 애를 때리면 어떡해요?”
“화평아. 괜찮아?”
헉, 피. 입술이 찢어졌는지 손에 피가 묻어나왔다. 퉤, 하고 뱉는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윤이 발끈해서 몸을 일으키려 들자 화평이 손으로 붙잡았다.
“이럴 거면 계주 때려 치워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후배 손찌검이나 하고. 제가 선배가 느리게 달린다고 뭐라고 했어요? 그냥 전력을 다해달라고 밖에 안 했잖아요. 마지막 대회인 거 누가 모르냐고요. 마지막이니까 더 열심히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화평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억울했다. 내가 욕을 했어 뭘 했어. 맞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뭔데.
“니네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장애물을 봐주고 있던 고 코치가 뛰어왔다.
“야, 너네 개인 종목도 뛰기 싫냐? 왜 팀원들끼리 싸우고 난리야? 때리긴 또 왜 때리고. 너희 넷 다 방과 후에 훈련 말고 상담이야. 알겠어?”
“코치님, 윤이랑 영재선배는 잘못한 거 없어요.”
“조용히 해. 말리지 못한 것도 잘못한 거야. 그리고 윤화평 너 한 번만 더 말대꾸해라.”
“죄송합니다.”
“넷 다 개인 연습으로 돌아가.”
넵. 화평은 나머지 세 명과 갈라져 장거리 팀으로 돌아갔다. 야, 그러게 선배한테 개기길 왜 개겨. 나 진짜 별말 안 했다. 별말 안 하면 왜 때리는데. 아 몰라, 성격 파탄인가 보지. 화평은 입안에 고인 피를 한 번 더 바닥에 뱉었다.
* * *
“코치가 뭐래?”
가장 마지막으로 상담을 마치고 나온 화평에게 영재와 윤이 물었다.
“저 빼고 연습하래요. 네가 제일 문제라고.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못 한다고. 아예 선수명단에서 빼려던 거 겨우 참았대요.”
“네가 좀 막 나가는 경향은 있다만 그 정도로 할 필요가 있나?”
“감싸주려는 거에요 아닌 거에요.”
갑자기 화평은 아악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화평의 행동에 윤은 몸을 움찔하며 놀라고 말았다.
“좀만 참아. 어차피 3학년 이번 여름 대회에 은퇴하는데. 얼마나 자기도 초조하겠어. 공부도 해야겠고 그래도 달리고는 싶고.”
“아니. 왜 나만 이해해야 돼? 나는 뭐 할 일 없어서 달리고 있나?”
“너는 참 천성이 스프린터야.”
영재가 떨떠름한 감을 씹은 얼굴을 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내가 뭘. 방금 이상한 표정 지었잖아요. 아니야, 네가 잘 못 본 거야.
“그럼 이번 대회에 같이 못 나갈 수도 있단 거야?”
윤의 질문에 영재와 투닥이던 화평은 잠시 멈칫했다.
“연습량 부족하면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후보 선수도 있고. 팀원끼리 안 맞는거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래.”
“그럼 저도 계주 안 달려요.”
“뭐?”
“윤아 너까지 왜 그래, 대체.”
영재의 얼굴이 이제 거의 울 것 같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 정도로 팀이 콩가루일 필요는 없잖아요.
“야, 무슨 소리 해 너는 달려야지. 그 선배랑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연습해.”
“너랑 같이 안하면 의미가 없는데.”
그 말을 들은 화평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나 빠져 줄까? 영재가 슬며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나같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냐고 묻고 싶었다. 별 의미 없는 말인 건 알아도. 꼭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화평은 손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혔다. 쟤는 혼자 영화 속에서 튀어나왔나 봐. 전에도 마사지해 주면서 그러더니.
“꼭 같이 달려보고 싶었다고. 너랑.”
자신에게 눈을 맞춰오며 말하는 윤 때문에 간신히 식힌 열이 다시 올라왔다. 윤에게 화평은 경쟁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동경의 대상에 가까웠다. 그 달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그런데도 같이 달리지 못한다면 할 이유가 없었다. 같은 경기를 뛰는 걸로는 모자라, 같은 팀이 되고 싶었다. 화평이 그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지. 나도 이렇게 말로 꺼낸 건 처음이니까. 화평이 주먹을 쥐었다가 피며 윤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래. 일단 알겠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넌 연습해.”
“넌 은근히 호의에 면역이 없는가 보다?”
억.
화평이 영재의 옆구리를 찔렀다.
“알겠지?”
윤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애였다.
* * *
결국 먼저 사과를 하러 온 것은 현우였다. 화평은 문 앞에 서서 얼굴을 때려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들 멀찍이서 무슨 일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껑충 뛰어있는 윤의 모습에 화평은 입을 가리고 큼, 흠 소릴 냈다.
“저도 너무 마음을 급하게 먹었던 거 같아요. 죄송했습니다.”
화평이 가볍게 꾸벅였다. 현우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앞으로 잘해보자는 말에 화평은 잠자코 알겠다고 말했다. 얼마나 합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우가 돌아가자 그제야 화평의 주위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묻는 말에 화평은 대답하지 않고 어디로 도망갈까 틈을 보았다. 아이들 사이로 쑤욱 내밀어지는 하얗고 곧은 손을 화평은 덥썩 붙잡았다. 바깥으로 끌어내진 화평의 손을 잡고 윤은 냅다 복도를 뛰었다. 야, 잠깐만! 나 엎어져! 화평은 실내화로 엉성하게 달리며 윤의 뒤를 따랐다.
“아니 근데 이렇게 왜 도망가는데?”
* * *
“누가 보면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줄 알겠네. 하하... 하."
조용하기만 한 음악실에 어색한 화평의 웃음이 퍼졌다. 야,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윤은 그렇게도 오해를 살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냥 곤란해 하는 걸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화평은 어휴 됐다, 하고 말하며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피아노 칠 줄 알아? 윤이 묻자 화평은 고개를 저었다. 내내 뜀박질만 했는데 피아노 칠 줄 알겠냐. 화평은 몸을 뒤로 젖히며 윤을 바라보았다.
"야, 윤아. 수업 하나만 빼자."
펄럭거리는 커튼을 주기적으로 밀어내며 화평은 하품을 했다. 선선한 봄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잠이 절로 왔다. 어차피 다음 시간은 체육이었다. 인원 체크도 제대로 안 하니까.
유난히 봄바람이 사람 졸리게 하는 거 같아. 간질간질하니.
화평의 그 말에 윤은 창가로 걸어와 화평의 옆에 앉았다. 그런가. 둘은 좁은 의자에 어깨를 대고서 바람을 음미했다. 귓가를 간지럽히며 지나가는 바람이 달릴 때 느껴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달릴 때의 바람은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역풍이 불 때는 특히나 악랄한 방해꾼밖에 되지 않는다. 이겨내야 할 대상 그 이상의 것도 아니었는데, 마주 맞는 바람도 생각보다 기분이 좋구나. 바람이 꼭 다른 얼굴을 가진 것만 같았다. 어쩌면 화평이 옆에 앉아서 그럴지도 몰랐다.
“넌 대학 가서도 달릴 거야?”
“어... 아직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난 안 달려.”
화평의 단언에 윤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학도 안 갈 거야.
“왜? 왜 안 달리는데?”
“어, 집안 사정이 좀 있어서.”
엄마는 대학까지는 다니라고 하긴 했지만. 그러면 너무 늦기도 하고. 화평은 남 일을 말하듯 덤덤하게 제 얘기를 풀어냈다. 여전히 충격을 받은 듯한 윤의 표정에 화평은 어휴 소리를 내었다.
“진짜 내가 달리는 거 좋아했나 보네. 고맙다. 야.”
화평은 야 괜찮아? 하고 물어보았다. 윤이 말을 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화평은 뒷통수를 긁적였다.
“아무튼 3년 동안 잘 해보자. 둘 다 수능 공부할 일은 없을 거 같고.”
잘만 하면 3년 내내 계주 같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화평은 일부러 희망차게 말을 했다. 덩치도 나보다 큰 게 축 쳐져 있으니 괜한 말을 했지 싶었다. 이 정도로 실망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실망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같은 대학을 간다고 보장된 것도 아닌데.
지금 같이 달리게 된 걸로는 부족했던 걸까? 중학교 때는 화평과 팀 동료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쟤는 꼭 이겨야한다는 코치의 말도 썩 와 닿지는 않았었다. 그냥 집에 돌아가면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같이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나 했다. 심지어 이건 화평이 달리기를 그만두는 데에서 오는 실망감도 아니었다. 그저 곁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얘와 뭘 하고 싶은 거지. 바로 내 옆에 있는데도 느껴지는 이 갈증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윤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남의 삶이니까.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게 안 된다. 화평에게 계속 간섭하고 싶어지고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욕심. 남들과는 다른 깊은 관계가 되고 싶었다. 평범한 동급생이 가질 만한 생각도, 친구가 가질 생각도 아니다. 과연 화평과 친구가 되는 데에서 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윤은 머리가 복잡해서 터져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용량 초과다. 동경과 동료애와는 확실히 결이 다른데. 화평의 둥그런 눈동자를 바라보며 윤은 생각했다.
왜 나는 네 옆에 있고 싶어 하는 걸까.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의 기원은 어디일까.
햇빛이 들어와 화평의 얼굴을 비추었다. 황토색과는 다른 호박색의 눈동자. 깜박이는 속눈썹 아래로 제 존재를 드러내었다. 앳되기만 한 얼굴과는 달리 눈동자만은 뇌쇄적인 면이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아서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뭐야, 왜 민망하게 계속 쳐다봐. 화평이 당황하며 엉덩이를 슬쩍 뒤로 뺐다. 그러나 의자가 작아 뒤로 얼마 물러나지도 못했다. 너 눈이 예쁘다. 신기하네.
네 얼굴이 백배는 더 신기하다. 화평은 코끝까지 가까이 다가온 윤을 뒤로 밀어냈다. 화평은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가 된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역시 봄바람이 문제다. 괜히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게 분명했다. 화평은 제 허벅지를 스스로 꼬집었다. 정신 차리자. 헛다리 짚어서 민망해지고 싶진 않았으니까. 갑자기 어깨에 턱 하니 무게감이 느껴졌다. 윤의 검은색 머리칼이 목 부근을 간지럽혔다. 화평은 티가 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무릎을 잡은 손에서는 땀이 쩔쩔 흘렀다.
"뭐, 뭐야."
"나도 몰라."
"니가 모르면 누가 아냐."
화평은 팩 고개를 돌렸다. 꼬물거리며 손이 팔 위로 올라왔다. 어어, 왜 이래. 화평이 팔을 움직이자 윤이 힘주어 잡았다. 우리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나도 네 말 들어줬잖아. 조금 후덥지근한 교실에서 윤은 조용히 화평의 손에 손을 올려놓았다. 혹시나 땀이 나진 않을까 해서 잡진 않았다.
사람의 살에 닿으면 불쾌함이나, 호감 중 하나가 떠오른다. 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화평과 닿으면 떠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런 말도 있다지 않은가. 여태 정의되지 않고 뒤죽박죽이던 감정들이 키스하는 순간, 정의되곤 한다고.
밖에서 넘어오는 고함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화평과 체온을 나누고 팔딱대는 맥박소릴 들었다. 서늘한 편인 손을 뜨뜻한 화평의 손에 올리고 있다 보니 제 손이 미지근해지는 거 같았다. 제대로 숨은 쉬는 걸까 하고 생각이 들 만큼 화평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나랑 붙어있는 게 싫은 건가. 윤은 화평과 닿아있는 게 좋았다. 손을 가만히 잡고 있으려니 깍지를 끼고 싶었고, 마른 등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주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쩌면, 화평을 만나고 나서 내내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착각할 만큼.
"이상해."
화평의 그 한 마디에 윤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아, 역시 싫은가.
"뭐가."
윤은 일부러 태연한 척 대꾸했다.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야."
화평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윤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뻔뻔한 척 능청을 떨던 얼굴에 당황이 가득 차 있다. 어쩔 줄 몰라 하는게 눈에 보여 윤은 몸을 일으켰다. 눈에 저를 담고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처럼 옆에 있는 상대를 의식하고 있었다.
단순한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호감일까. 뭐든 좋았다. 지금의 윤으로써는 화평이 자신을 의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게 느껴졌다. 예쁘다고 생각한 그 눈동자에 자신만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분 좋았다.
윤은 알 수 있었다. 제가 화평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애정이라는 걸.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 달리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 마저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윤은 입술을 옴짝달싹 움직였다. 화평에게 말하고 싶었다. 끝내 말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너도 나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타이밍 좋게도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 * *
순간 뽀뽀라도 하는 줄 알았다.
화평은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걷어찼다. 아악, 으아악! 대체 왜 갑자기 그런 분위기가 된 거지? 화평이 제 얼굴을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사실 나를 좋아하고 있었나. 어쩐지 잘해주더라. 그 사연 있어 보이는 눈빛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고. 화평은 자신을 쳐다보는 윤의 모습을 떠올리고 또다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윤의 감정이 전염되는 거 같았다.
빠르게 뛰는 맥박과 커지는 눈동자. 그리고 발그레해진 얼굴과 살짝 깨무는 입술, 침을 느리게 삼키는 목울대까지 다 보고 말았다.
보려고 했던 게 아닌데 눈에 들어와 버린 걸 어떡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갔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사랑에 빠진 것만 같은 윤의 모습이 온전히 제 눈에 다 담겨버린 탓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다 부끄러웠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그래. 화평은 위에 올려 졌던 윤의 손 무게까지 떠올리고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끝까지 열기가 전해지는 거 같았다. 그냥 같은 팀메이트가 되고 싶었다며. 동경이 갑자기 바뀔 수도 있나. 어차피 호감이라는 감정에서 출발했으니 쉽게 바뀌는 걸까. 화평은 이불 위에서 온갖 부산을 떨며 굴렀다.
가슴께에서 간질간질한 것이 피어올랐다. 싫지는 않은 감정이라 화평은 가만히 누워 곱씹었다. 따지고 보면 싫어해야 할 이유도 없긴 했다. 여태 걔한테 가지고 있던 감정은 호감에 가까웠으니까. 좀 엉뚱하다고 생각은 하긴 했지만. 머리가 팽팽 돌았다. 도통 이런 걸로 고민해본 적이 있어야지.
서로 거리를 재고 상대를 의식해가는 과정이 처음이라서. 원래 이런 건가. 갑자기 상대방이 좋아지고 그러는 걸까. 아니, 어디서부터 시작했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 지금 좋아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냐고. 지금 자신에게는 사랑의 기원을 찾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 * *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계속 떠오른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화평은 달리기 전 루틴을 소화하며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윤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눈에 밟혔다. 누가. 최윤이. 먼저 티 낸 건 쟤인데 왜 내가 더 신경 쓰고 있어야 하냔 말이다. 화평은 억울했다. 음악실에서 있었던 일 다음 날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아주더라. 평소처럼! 사실 쟤도 착각한 거 아냐 생각이 들 만큼. 봄바람 좀 코로 들이마시니까 맘이 흔들린 거라고. 동경심이 아니라 사랑이라 착각한 게 분명했다. 흔히들 하는 짓이잖아. 그때 입 맞추지 않아서 다행이지.
화평은 콧방귀를 뀌며 허들을 넘었다. 허리 펴라 화평아! 고 코치의 외침에 등이 따가웠다. 애초에 착각한 사람이 바보지. 그래 내가 바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고민한 내가 바보라고. 구질구질하게 눈물을 흘리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었다. 애초에 뭘 시작한 게 있어야지. 계주만 끝나봐라. 아는 척도 안 할 거다. 부원수가 많아 가능한 일이었다. 고 코치님은 대충 어르면 된다. 화평은 평소에 굴리지도 않던 머리를 잽싸게 굴렸다. 이 정도 심술은 부리자. 적어도 1주일은 고민한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화평은 왜 자신이 제발 저린듯이 윤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 *
윤은 윤대로 애로사항이 있었다. 화평도 자신과 같이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이런 식의 감정을 가지는 게 맞는 일인가 생각이 들었다. 괜히 내가 고백해서 혼란만 주는 건 아닐까. 화평은 대학에 가서 육상을 하지 않는 대신, 지금 모든 걸 다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현우에게도 큰소리를 낸 거였고. 장거리로 옮긴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평소처럼 화평을 대했다. 혹여나 부담이 될까 봐. 윤은 화평이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화평을 배려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한 번 고민하고 거기에 한 번을 더 고민했다. 말 그대로 지극정성이었다.
두 사람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한 사람은 마주치기만 하면 작게 으르렁대고 한 사람은 아주 침착해 보였다. 그것이 뻔히 보여 영재는 고민했다. 선배의 아량으로 쟤네를 도와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런데 저것들이 물어본다고 제 마음을 털어놓을 애들인가. 영재는 윤의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슬쩍 물어보았다.
"너 화평이하고 무슨 일 있어?"
"네? 아뇨, 아무 일도 없는데..."
"내가 보기엔 무슨 일 있어보여서 그래. 너네 저번에는 복도 손잡고 뛰어다닐 정도로 그랬잖아. 걱정돼서 그렇지. 나 화평이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 친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윤의 표정이 화악 밝아지는 걸 보고, 영재는 그래 이것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느꼈다. 그게요, 로 시작되는 말을 들으며 영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연애사에는 발을 들이는 게 아니라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자신에게 화평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 듣기 싫으세요? 조심스럽게 묻는 윤의 모습에 아니라며 영재는 극구 부인했다.
"음, 그래. 윤아 내가 보기에는."
"네."
"네가 고민이 너무, 너어무 많아. 화평이가 생각보다 그렇게 복잡한 애가 아니란 말이야. 한 번만 더 티 내봐. 물론 진심이라면. 걔가 기가 막히게 알아보거든."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애는 아니지. 순간에 충실한 놈이라, 그때그때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중에 헤어질 일이 두려워서 감정을 미뤄놓는 사람은 아니란 거다. 윤이 걱정하는 대로 부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을걸. 언제까지 모르는 척하고 있나 칼이나 갈고 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냥 그런 애였다.
* * *
"화평아."
"뭐."
"오후 훈련 가기 전에 잠깐만 볼 수 있을까."
"나 그전에 문학 김쌤이라 빨리 안 끝날 텐데."
"잠깐이면 돼."
화평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알겠다고 했다.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래. 씻으러 들어가는 윤의 뒷모습을 보다가 화평은 수건에 얼굴을 문댔다.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불렀겠지. 노곤해진 근육을 주물렀다. 프로틴 좀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화평은 발을 옮겼다. 오늘 무슨 맛이에요. 딸기맛. 와, 완전 싫다 진짜. 화평은 웨엑, 구역질하는 것처럼 소릴 내며 프로틴을 섞은 쉐이크를 집어 들었다.
* * *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부실 뒤 화단에서 화평은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윤을 바라보았다. 시간 없어. 빨리 얘기해. 화평이 윤을 부추겼다.
"그, 음악실에서 말이야."
"그래. 그때."
화평은 태연한 척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무슨 말이 나와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자신이 있었다.
"왜 기분이 이상했다고 말했는지 이유를 알려줄 수 있어?"
윤은 제 티셔츠를 구겨 잡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었던 그때. 달리고 나서 보다 더 숨이 벅차올랐다. 윤은 자꾸만 숙여지는 고개를 빳빳히 들으며 화평을 바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꼭 귀에 심장이 있는 것 같이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입을 열면 꼭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대놓고 이유를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기분이 왜 이상했냐니.
쟤는 지가 행동을 했는지도 기억 안 나는걸까. 화평은 아직도 손의 무게가 똑똑히 떠올랐다.
조심스레 얹어놓았던 자신보다 큰 손. 목을 간지럽히던 머리카락과 어깨에서 느껴지던 묵직함까지. 잠깐만 이러고 있자는 목소리에 홀린 듯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었냐구?
왜 기분이 이상했냐고?
황소처럼 씩씩대며 화평은 턱턱 한 걸음씩 다가가 윤의 바로 앞에 섰다.
화평은 윤의 얼굴을 붙잡고서 자신을 보게 했다. 자신만큼 붉어져 있는 얼굴에 화평은 냅다 제 입술을 갖다 박았다.
쪽. 하고 입술을 맞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 정도면 됐냐. 어? 화평은 투덜대며 윤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손끝이 달달 떨려왔다.
"좋아서 그랬다. 좋아서!"
화평이 터질 거 같은 얼굴로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너는 꼭 그걸 내 입으로 들어야 아냐. 이 답답한 새끼야. 거리를 재는 법 따위는 상관없었다. 화평은 언제나 앞서가는 방법밖에는 몰랐고 힘껏 뛰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화평의 외침에 윤은 눈을 크게 뜨고서 화평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윤이 화평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코끝을 비비며 윤은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화평은 윤과 눈을 맞추었다. 화평의 팔이 자연스레 윤의 목에 둘러졌다.
야, 나 발꿈치 들어야 되서 불편하다. 조그맣게 말하는 화평의 불평에 윤은 기꺼이 제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어, 좋아. 화평의 입술이 다시 윤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볍게 입을 맞추는 건데도 화평은 붕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야, 나 진짜 얘가 좋아졌나봐. 윤은 화평의 허리를 받쳐주며 화평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느릿하게 덮듯이 키스했다. 조그만 혀가 자신의 움직임에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두 사람 다 처음 하는 키스는 서툴렀다. 그러나 숨결을 나누며 빈틈없이 붙어있는 게 기분이 좋았다. 윤은 조금 더, 라고 생각하며 화평에게 키스했다. 입안을 훑으며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를 삼켰다. 입술이 떨어지고 옅은 숨이 터져 나왔다. 윤은 화평의 몸을 힘주어 껴안았다. 윤은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지는 것 같았다. 여태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걸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화평을 더 이상 놓아주고 싶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