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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
​라잉

1년 후 그리고…….

 

 

“부탁드려요. 강 형사님.”

“야, 최윤 너……! 미쳤어?”

“아니요. 안 미쳤습니다. 안 미치려고 부탁하는 겁니다.”

“하……!”

 

길영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길영이 짐승을 보는 듯한 눈으로 최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화평을 찾아낸 이후, 화평은 두 사람의 설득으로 최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길영은 화평을 찾은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화평을 찾은 이후 망가지기 시작한 최윤 때문에. 윤화평과 최윤, 이번엔 둘 다 망가질 거 같아서. 길영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두 사람에게 더 좋은 선택일지 몰랐다. 애초 최윤에게 윤화평을 맡긴 게 잘못이었을까.

 

“강 형사님.”

“윤화평이,”

“윤화평 씨는 제 옆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윤화평 씨도 그게 편할 거예요. 그 사람이 괴로워할 일, 안 해요.”

“너, 그거. 약속할 수 있어?”

“네. 약속할 수 있습니다.”

 

길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지만 최윤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길영이 제 오른손에 들린 수갑을 꽉 쥐었다.

 

“강 형사님.”

 

망설이던 길영이 이윽고 최윤에게 수갑과 열쇠를 내밀었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화평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어, 최윤. 왔어?”

“네. 저 왔습니다.”

 

최윤이 눈을 접어 웃었다. 화평은 자리에 선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이곳에 온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지만 최윤의 변화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런 웃음도 1년 전까지의 최윤에게선 절대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하긴. 그를 옭아매던 박일도가 사라졌으니…….

 

그런 생각을 하던 화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박일도가 자신과 함께 죽은 줄만 알고 있던 길영과 최윤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으니 박일도도 살아 있는 건 아닐까. 화평은 1년 내내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길영화 최윤도 같은 생각을 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숨어 지냈다. 그랬는데…….

 

그들은 기어코 화평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화평은 자신이 살아 있어서 미안했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그들이 자신을 보고 웃어서 더 미안했다.

 

“윤화평 씨?”

 

멍하니 서 있는 화평을 보고 최윤이 그의 앞까지 빠르게 걸어왔다. 최윤이 화평의 어깨를 잡자 그제야 화평이 깜짝 놀라며 윤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어? 아니. 잠깐 딴 생각 좀 했어. 강 형사님은 뭘 저렇게 많이 사 왔대? 경찰이 무슨 돈이 있다고.”

 

화평이 제 어깨에서 최윤의 손을 떼어내고 그를 지나쳐갔다. 화평이 식탁 위에 올려진 봉투를 뒤적였다. 안엔 갖가지 요리 재료들과 인스턴트 제품들이 마구잡이로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요. 이번엔 조금만 사 와도 된다고 했는데.”

“뭐 어때. 나도 백수고. 넌 사제고. 우리 중 제일 잘 버는 게 강 형사님이잖아. 이 정돈 괜찮아.”

“다음부턴 제가 사올게요.”

 

화평이 최윤을 돌아봤다.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화평은 그에게 얹혀사는 것도 미안했다. 자신이 살아있어서 미안했고,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그의 옆에 있어야 하는 것도 미안했다.

 

“됐어, 너 안 바빠? 백수인 내가 사 올게.”

“아니요. 제가 사 옵니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최윤이 화평을 향해 말했다. 짐짓 화가 난 듯한 윤의 말에 화평의 눈이 커졌다.

 

“왜 이렇게 화를 내?”

“그냥. 윤화평 씨는 집이나 지키세요.”

“아니, 내가 무슨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윤화평 씨.”

 

화평이 삿대질까지 하며 최윤에게 한 마디 하려했지만 그의 말은 구슬프게 이름을 읊조리는 그의 부름에 막혔다. 최윤이 화평 쪽으로 걸어가 그의 제 품에 가두었다.

 

“윤화평 씨.”

“뭐야, 최윤. 이거 안 놔?”

“제발요. 혼자선 안돼요. 제 옆에만 머물러주세요.”

 

그의 황당한 말에 화를 내려던 화평이 입을 꾹 다물었다. 최윤의 떨림이 화평에게도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최윤의 불안함이 몸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그를 떼어놓으려 올렸던 화평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최윤이 불안해하는 건 역시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사라졌는지, 도망갔는지, 혹은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박일도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품에서 화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니.

 

조심스럽게 화평을 떼어 놓은 최윤이 미소를 띠며 눈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화평의 귀에 금속이 찰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않았던 최윤의 불룩한 주머니에서 나오는 물건을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자신의 손목에, 그리고 최윤의 손목에 하나의 수갑이 채워졌다.

 

“야! 최윤!”

“윤화평 씨가 얌전히 제 옆에 있을 것 같진 않아서요.”

“뭐?”

“이제 억지로라도 제 옆에 붙어 있어야겠죠.”

 

1년 전에도, 일주일이 다 되어 갈 동안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 최윤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화평의 마음에 남아 있던 부스럼을 한줌 정도는 덜어주었을 법한 그런 표정. 그런 표정을 최윤은 화평에게 수갑을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보여주었다. 지금은 웃고 있지 않은데도 최윤의 표정은 너무도 편안해보였다.

 

“너 이거 어디서 사 왔냐?”

 

겨우 마음을 추스른 화평이 최윤에게 물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자신은 그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살아 있는 게 죄인 것만 같아 당장 그만두라고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강 형사님에게 빌렸습니다.”

“강 형사가 빌려줘?”

“네.”

“이거 언제까지 채울 건데.”

 

화평의 말에 두 사람을 잇고 있던 최윤이 수갑을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보던 최윤이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었다.

 

“제가 이 집에 없을 때요. 지금은 놀라지 마시라고 보여드린 거였어요. 배고프죠? 뭐 먹을래요?”

“……됐어, 내가 해.”

 

최윤과 화평이 함께 있는 시간은 조용했다. 이제 부마자들도 없었고, 박일도 이야기도 꺼내기 껄끄러웠다. 이따금씩 침묵을 깨던 길영 이야기도 지난 일주일 간 할 만큼 한 뒤라 두 사람 사이에선 이야기할 만한 화제가 없었다.

 

최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화평의 옆에 있었다. 그의 옆에서 성경을 읽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보거나. 성당에도 휴가를 내고 와 하루 종일 화평의 옆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휴가가 일주일 이랬나…?

 

“야 최윤. 너 성당 언제부터 가냐.”

 

잠을 청하려 누워 있는 최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화평이 물었다.

 

“일요일부터요.”

 

바로 머리 하나 위에서 최윤이 말했다. 좁은 침대에 커다란 남자 둘이 딱 붙어 말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곳에 온 첫날, 그냥 바닥에서 잔다는 걸 기어코 이 좁은 침대에 올려놓은 최윤이었다. 침대를 양보하는 줄로만 알았던 화평이 포기하고 누웠다. 그러자 최윤이 제 뒤에 딱 붙어 따라 누웠고, 좁고 불편해 다시 내려가려고 몸을 일으킨 그대로 화평은 그의 손에 잡혀 누울 수밖에 없었다.

 

생긴 건 비실비실해도 작정하고 힘을 쓰니 그의 품에 꽉 잡힌 화평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안겨 자는 꼴을 하고 싶지 않아 그 이후로는 얌전히 벽을 보고 잠을 청했다.

 

“일요일? 이틀 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서 빌려온 거예요. 그거.”

“나 화장실은 어떻게 가?”

“다녀오세요.”

“누가 지금 간대? 농담할 때야? 너 없을 때 수갑 채우면 나 화장실 어떻게 가냐고.”

“…….”

 

꼬박꼬박 대답하던 최윤이 입을 다물었다. 그저 자신을 잡아둬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져온 게 빤히 눈에 보여 화평이 몸을 돌려 그의 정강이를 찼다.

 

“윽!”

“너 올 때까지 참으라는 건 아니지? 몇 시간인데!”

“틈 날 때마다 집에 올게요.”

“그걸 말이라고!”

 

중간 중간 집에 들려 화장실을 보내는 최윤의 모습을 떠올리자 화평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애완견도 아니고. 조금 전까진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아무 생각도 없는 그의 꼴을 보자 이 미친짓을 정말 해야 하는가 싶었다. 수갑 같은 게 없어도 화평은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니, 마테오 너도 불편할 거 아니야. 내가 화장실만 가? 밥도 먹어야 하고, 어. 그거 두 개밖에 안하긴 하지만. 밥 챙겨주러 오는 거 진짜 귀찮잖아.”

 

화평이 눈을 맞추며 설득을 시도했으나 최윤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을 내 옆에 잡아둘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빨리 자세요.”

“지금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언제까지 그럴 건데.”

“…….”

 

최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화평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박일도가 사라진 게 분명해질 때까진 그의 옆에 있을 생각이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고, 그때만 기다리며 최윤의 등에 빨대를 꽂고 살 수도 없었다.

 

“나 곧 일도 다시 시작해야하고.”

“윤화평 씨가…….”

“뭐.”

“아닙니다. 생각해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최윤이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화평도 최윤에게서 거칠게 몸을 돌렸다.

 

벽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차가운 기운은 화평의 온기를 빼앗아갔다. 그 기운이 화평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화평의 몸을 감쌌다. 싸늘한 냉기에 화평이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려 팔을 들었다. 티셔츠 위로 팔문금쇄진의 핏자국이 떠올랐다. 뚜렷한 글씨를 보이던 핏자국은 어느새 화평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팔문금쇄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기이하게 차가운 피가 화평을 물들였다. 그것은 덩어리가 되어 화평을 감쌌고, 그의 목까지 차올랐다.

 

“헉!”

 

화평이 탁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가 거칠게 이불을 걷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화평의 눈이 빠르게 자신의 몸을 훑었다. 몸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다. 소매를 걷으니 흉터가 된 팔문금쇄진이 새겨져있다.

 

“윤화평 씨?”

 

아직 잠에 잠긴 목소리가 화평을 불렀다. 어디서부터 꿈이었을까. 화평이 고개를 돌려 최윤을 바라봤다.

 

“꿈꿨어요?”

 

화평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화평이 최윤의 팔을 잡고 그의 티셔츠를 들어올렸다. 화평의 손이 최윤의 가슴과 배를 쓸었다. 살을 맞아 생긴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화평의 표정이 풀어졌다.

 

“전 괜찮습니다. 그 뒤에도 구마의식 했어요. 아무 일도 없었고요.”

“알아. 너 이미 말했어.”

“그러니까요. 제가 말했죠? 윤화평 씨는 윤화평 씨만 생각하면 된다고.”

 

최윤과 화평. 1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시간은 아직도 그때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자신이 또 사라질까봐,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최윤과 박일도가 자신의 안에 남아 있는 악몽에 시달리는 윤화평. 누가 더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화평이 비소를 띠었다. 박일도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단연 자신이었다. 그냥 죽으면 깔끔했을 것을. 그럼에도 자신은 살아 있었고. 혹여 박일도가 나타나면 구마해줄 사람은 최윤뿐이니 빈대처럼 그에게 붙어있다.

 

“최윤.”

 

화평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의 대답을 바라고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문이었다. 화평의 부름에 최윤이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곧이어 최윤의 입술이 화평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그와의 입맞춤은 주문이며, 맹세이며 스위치였다.

 

맞대고 있던 말랑한 입술을 뚫고 최윤의 붉은 살덩이가 화평의 입 속으로 침입했다. 그의 혀가 치열을 쓸 때마다 머릿속의 잡념들이 살아지고 대신 최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화평이 최윤의 팔을 잡고 매달려 그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었다.

 

화평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최윤에게 매달려, 그렇게 생존해나가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떨어지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화평에게 최윤이 걸어준 주문.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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