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hing without you
레드비
윤화평
한여름에도 화평은 긴팔을 입고 다녔다. 수년 전 사라진 멍 자국들에 사람들이 시선을 던질 일은 없었지만 화평은 온몸을 옷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녔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서 폭력의 흔적을 찾아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년간 반복되는 꿈에선 마을 사람들이 부모를 죽인 놈이라 손가락질하며 화평을 쫓아왔다. 방관자이던 마을 사람들이 꿈속에선 정의의 심판자인 듯 자신을 찢어 죽이려는 꿈을 꾼 날이면 잠에서 깨어난 화평에게선 웃음이 터져나왔다. 숨이 막혔다. 그곳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었지만 화평은 계속해서 수년 전 그날의 그곳으로 회귀했다.
발길질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던 자신과 악귀같이 변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술을 평소보다 많이 마신 건지 칼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냥 너랑 나랑 같이 죽어버리자. 너희 엄마에게 같이 가자. 라고 말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미안해요. 아버지.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하던 화평과 그런 화평에게 달려들던 아버지. 회상하는 화평에겐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펼쳐졌다. 달려드는 아버지를 밀자 아버지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져 그대로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버지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죄책감이든 분노든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던 건 화평도 생각지 못한 바였다. 단지 이곳에서 도망쳐야 해.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버스터미널로 달리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버스표 한 장을 사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올라타자 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평을 바라보던 윤의 눈. 항상 윤의 눈은 마치 ‘도망치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면 화평은 ‘그래, 둘이 같이 도망쳐버리자.’라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켜야 했다. 구원자를 기다려온 적은 없었는데 화평은 그 순간 윤이 자신의 구원자인 듯 윤과 함께 도망친다면, 사라져 버린다면 혹시나 행복해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휩싸이곤 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고 싶어. 행복해질 것만 같아.”
윤에게 건네지 못했던 말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려보았다.
아버지가 집착하던 행복이라는 단어가 화평에게도 박혀버린 것인지 화평은 종종 ‘행복’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올려보곤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처음이었다. 화평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엄마에 대한 속죄이며 자신의 죄책감과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위해서 쓰여왔다. 윤을 보며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게 언제부터였지. 화평은 입술을 사리 물었다.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다. 자신이 이제껏 쌓아온 죄책감이라는 벽도, 폭력이 함께하는 일상도. 윤도. 전부 자신이 망가뜨렸다. 자신이 윤을 사랑해버렸기 때문에. 따끔거리는 심장께가 감히 그를 사랑하는 것이냐며 꾸짖어도 외면하면서 괜찮을 것이라 타일렀다. 외면의 대가는 혹독했다. 다시는 윤을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들어와 빠져나가지 않는 윤의 생각에 화평은 그 후로도 오랜 시간 눈물을 쏟아내었다.
돈도 없이 상경한 화평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가끔씩 길거리에서 자기도 하며 목숨을 연명해왔다. 그것이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윤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화평은 굳이 정의 내리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들보다 윤이 최우선 순위가 되는 것은 위험했기에 화평은 답을 알고있음에도 그것을 단어로, 문장으로 만들어 내뱉지않았다.
상용시에 정착한 화평은 택시기사를 시작했다. 작지만 집도 얻었다. 가구는 어떤 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단지, 잘 곳이 필요해서 얻은 집이었다.
해가 떨어져 까맣게 물들어버린 집안을 바라볼 때면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호흡이 가빠져왔다. 숨이 막혀오면 화평은 윤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생각하며 호흡의 안정을 찾곤 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까만색이었는데도. 화평은 윤의 모습들을 머릿속에 불러들였다. 새까만 색. 빛을 받아 갈색으로 보일 법도 한데 윤의 머리카락은 항상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기억들 속 화평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평화롭던 어느 날의 교실 풍경이다. 여느 날과 같은 일상.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옆에 앉아 천천히 성경을 넘기는 윤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조금씩 흐트러졌다.
“왜 읽었던 걸 또 읽어?”
턱을 괸 채 윤의 모습을 쳐다보던 화평이 묻자 윤이 작게 미소 지었다.
“성경은 원래 여러 번 읽어야 하는 책이야.”
“그런 책이 어디 있냐. 책 그만 읽고 나랑 놀자.”
퉁명스럽게 말하던 화평과 그런 화평을 바라보며 웃던 윤.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화평은 오늘도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오늘의 꿈에는 윤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
교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아이가 담임선생님과 함께 들어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는 남자아이의 머리카락을 보며 화평은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곱슬끼 때문에 붕 떠있는 자신의 머리와는 달리 그 아이의 머리는 정성 들여 정돈돼있는 모습이었다. 저런 머리는 미용실을 다녀야 나오는 머린가. 라고 실없는 생각을 해보던 화평의 귓가로 남자아이의 이름이 들려왔다. 최윤. 겉모습처럼 반듯한 이름이라고 화평은 생각했다. 반듯하다는 것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화평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최윤. 입안에서 이름을 발음해보던 순간 윤과 눈이 마주쳤다. 입 밖으로 새어나간 적 없는 소리가 윤에게까지 닿은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윤이 화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후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윤을 보며 담임선생님이 가리킨 옆자리를 보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정확하게 마주해오던 시선이 자꾸만 떠올라 화평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다. 짝꿍이니까 말을 걸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화평은 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으며 날이 지날수록 화평도 덩달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짝꿍이라니. 따로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전학생이 학교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쉬는 시간의 시끄러운 교실 속에서 오로지 저와 윤의 근처에만 맴도는 침묵들이 점점 화평을 옥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안녕. 나는 윤화평이야. 너는 최윤이지?’
목구멍까지 나오던 문장은 윤의 눈을 떠올리면 다시 속으로 들어가 배 아래까지 수직으로 떨어져 부서져버렸다. 윤의 눈은 사람을 심연으로 끌어들이려는 듯 새까만 색이었다. 화평은 새까만 색을 싫어했다. 무서워했다. 화평은 자신이 윤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건 윤의 눈이 새까만 색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의 내렸다.
화평은 어둠을 싫어했고 어둠을 어둠으로 만드는 새까만 것을 싫어했다. 어둠이 도처에 깔리면 퍼부어지는 폭력들이 있었기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항상 그늘 속에 숨어버렸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화평의 정신은 정착할 곳을 찾아다닌다. 숨을 쉬기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과 폭언과 저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행복하던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 화평은 사라지는 잔상을 붙잡으려 팔을 뻗지만 팔을 밟아오는 아픔에 화평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떠올린다.
‘너는 행복해지면 안 돼. 무슨 자격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하면서 죽어야 해.’
그래, 나는 행복해지면 안돼. 라고 생각하며 화평은 단지 몸만을 웅크린다. 몸의 아픔이라도 덜어야 했기에.
항상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소리의 형태로 윤에게 닿은 건 언제나 반복되던 폭력 후의 아침이었다. 단지 윤이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 온 것을 모르고 있던 화평에겐 조금 뜻밖의 일이었다. 맞은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파오는 배를 붙잡으며 대문 밖으로 나온 화평이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눈앞에 보인 윤의 모습에 화평의 움직임이 멈췄다. 새까만 눈. 자신을 발견한 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놀랐겠지. 길거리에 피떡이 된 사람 하나가 서있으니까. 생각하던 화평의 입에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만 했다. 처음 보는 윤의 표정 변화 때문인지 숨기고 싶었던 가정폭력 현장을 학교 애한테 들켜서였는지 화평도 확실치 않았다. 아마도 하필이면 들킨 애가 자신의 짝꿍이면서 자신이 일주일 동안 말을 걸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던 당사자인 아이러니한 이 상황 때문이라고 짐작해보았다. 이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린다면 이번에는 윤이 자신을 외면할 것 같기도 해서 화평은 웃음을 참으려 입술과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러자 그 웃음을 뭘로 착각한 건지 화평을 쳐다보던 윤이 눈을 커다랗게 키운 채 성경책도 묵주도 땅에 떨어뜨리고 다급하게 달려왔다.
“너, 너 괜찮아? 병원, 병원 가야지. 업혀. 데려다줄게.”
무슨 업기까지 해. 필요 없어. 괜찮으니까. 라고 말하려 입을 연 화평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말도, 웃음도 아닌 울음이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에 당황한 화평이 울음을 막아내려 안간힘을 써봐도 오랜만에 나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펑펑 터져 나오고 목구멍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숨을 갈망하며 헐떡거렸다. 항상 침착을 유지해오던 화평의 머릿속은 울음을 멈추기 위해 다급하게 단어들과 문장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울음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도 도움을 주지도 않아. 울음은 한순간에 감정의 해소는 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보면 어느 순간 감정이 무뎌져서 사람을 쉽게 우울의 늪으로 끌어들일 꺼야.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내 감정을 조절해야 하고 나에게 닥친 현실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돼. 그런데 운다는 행위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망가뜨리는 행위야. 그러니까.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최윤의 앞에서 우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아무리 머릿속으로 온갖 이유들을 들어가며 우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화평의 마음과는 달리 몸은 그 바람을 따라주지 않았다.
화평의 울음이 줄어든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제야 윤 앞에서 자신이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기 전 화평은 윤이 그 앞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윤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함께 떠올라 혼란스러워했다. 화평이 천천히 시야를 가리던 손을 내리자 화평의 눈앞에 윤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왜 이렇게 가까이 있어?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윤이 화평을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화평의 몸이 흠칫 떨렸고 머릿속으론 수백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 그.. 저기.. 최윤?”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는 윤의 태연한 모습에 화평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윤의 팔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차. 하는 표정으로 변한 윤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이건.. 어렸을 때 울고 나면 형이 안아주곤 했거든. 그러니까 사람의 온기를 받으면 북받쳤던 게 좀 가라앉는다던가 열 마디 말보다는 한 가지 행동이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건데..”
다소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에 화평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화평이 몸을 조금 틀어 윤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윤은 없어진 온기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앞에서 목을 조금 가다듬은 화평이 언제나 입안에서만 곱씹어보던 말을 꺼냈다.
“안녕, 나는 윤화평이야. 너는 최윤이지? 잘 부탁해.”
갑자기 내밀어진 오른손과 자기소개에 윤이 어색하게 화평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응. 잘 부탁해. 윤화평.”
마주 잡은 손의 온도가 뜨거웠다. 방금까지 울음을 쏟아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지만 윤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화평의 몸에서 느껴지던 열기를 기억해내곤 화평의 온도 자체가 뜨거운 것이리라 판단했다.
한 번도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던 화평의 옆모습을 힐끗거리던 윤은 생각했다. 뜨겁다. 여름보다 더.
윤화평. 윤이 입안으로 화평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첫날 바람에 실려 날아온 듯 작게 들린 자신의 이름에 소리가 들린 곳으로 눈을 돌리니 화평이 있었다. 깜짝 놀란 듯 살짝 커진 눈과 밝게 빛나던 갈색 눈동자. 윤은 자신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화평의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다시 한번 그 눈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화평은 야속할 정도로 자신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화평의 열기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윤과 화평의 시선이 다시 맞춰졌다. 드러난 화평의 팔과 다리엔 멍 자국이 가득했다. 무더운 여름날에도 긴 셔츠를 입고 있던 화평은 그 안에 상처들을 숨기고 있었다. 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을까. 그렇게 뜨거웠는데도. 마치 불 옆에 있는 듯 열기가 자신에게 닿아왔는데. 한여름날 긴 셔츠를 입고 있던 화평에게 누구도 왜 하복을 입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화평과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던 윤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숨겨진 상처들을 반 아이들은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모를 것이라 짐작해보았다. 화평에게 말을 걸던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상처를 옷으로 감춘 화평은 반짝반짝 빛났다. 사랑받고 자라난 아이처럼 예쁘게 웃던 화평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모두 꾸며낸 표정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윤화평이 진짜 윤화평이었다. 상처를 달고 있는 채 울고 있는 윤화평. 다른 이는 알지 못하는 윤화평에게 한발 다가간 느낌에 윤의 마음속에 우월감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화평의 울음이 멈추길 기다린 윤이 조심스럽게 화평을 안아보았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떠오른 말은 윤의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옆집에서 그릇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시작이었다. 윤은 화평의 아비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화평이 받은 고통들을 그 인간도 느끼면서 죽기를. 화평과 도망치고 싶었다. 화평을 그 지옥에서 구원하는 사람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윤은 나약한 자신을 혐오했다. 화평을 지킬 수 없는 약한 몸뚱이를 저주했다. 화평을 구해내야 했다. 방관하던 마을 사람들, 악귀 같은 화평의 아비, 그 모든 것들에서 화평을 데리고 도망치자. 그렇게 된다면 화평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화평의 옆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만을 기다리던 윤은 이제 없었다. 화평을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랬다.
띵동. 초인종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윤이 방 밖으로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화평이 서있었다. 화평의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게 피투성이가 되어있자 윤이 눈이 크게 뜨였다.
“너.. 너 괜찮아..?”
“왜 그래? 나 맞는 거 한두 번 보냐.”
화평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지만 얼굴에 말라붙은 피들 때문에 윤은 화평이 웃는 것인지 아파서 표정을 구긴 것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얼굴은 건들지 않았었잖아.”
화평을 자신의 침대에 앉히며 윤은 자신이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윤이 화평의 얼굴가로 손을 가져다 대려다 화평이 하는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한테.. 행복하냐고 묻더라. 진짜 웃기지. 행복할리가 없잖아. 엄마는 나 때문에 죽었고, 아버지는 나한테 어미를 죽인 놈이라고, 나는 불길한 놈이고, 죽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하면서 때려.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나는 자격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제일 잘 알 텐데. 항상, 나한테 너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면서, 때리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말을 끝낸 후 숨을 내쉬던 화평의 어깨를 손으로 잡은 윤이 화평에게 눈을 맞췄다.
“도망갈래? 나랑.”
화평이 시선을 피하려는듯 눈을 내리감았다. 감기기 전 눈동자가 크게 일렁인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눈을 감은 채 화평이 말했다.
“치료 좀 해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한참 화평을 바라보던 윤이 화평에게 닿았던 손을 떨어뜨리고 책상 서랍에서 구급약을 꺼내 화평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얼굴 이곳저곳에 말라붙은 핏자국들. 소독솜으로 핏자국을 지워내자 윤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져 갔다. 피들을 지워내고 보니 오른쪽 이마가 찢어져 있었고 눈 밑은 멍이 들려는 기미가 보이고 입술은 터져있었다. 아프겠지? 아플 거야. 당연히 아프겠지. 윤이 조심스럽게 화평의 터진 입술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약을 바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자 화평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1초. 2초. 눈을 맞추고 있던 둘 사이가 아주 천천히 좁혀졌다. 맞닿은 입. 곧바로 떼어진 입술. 당황한 듯 보이는 화평의 눈.
“미, 미안해. 나는 먼저 가볼..”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화평의 손을 잡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나를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해. 나를 사랑해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진심들이 모두 화평의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며 윤은 화평에게 깊게 입 맞추었다.
머릿속으로 불꽃들이 튀어올랐다. 충동적으로 맞춘 입술이 다시 맞붙은 상황에 화평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행복해질 수 없어. 행복해지면 안 돼.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행복해질 것 같아서 두려워.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게 ‘행복함’과 같은 기분이라는 게 두려워.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어. 엄마를 죽인 주제에 너를 사랑해버린 나도, 이런 나를 사랑하는 너도, 나를 증오하는 아버지도. 모두 멈춰버리면 좋겠어. 무서워. 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나눈 입맞춤의 열기는 뜨거웠다. 서툴고 다급했다. 윤과 화평이 있는 장소의 시간만이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최윤
계양진의 매 여름은 힘겨웠다. 그것이 후덥지근하고 습한 바닷바람 때문인지 누군가의 부재 때문인지 윤은 헷갈렸다. 그가 좋아했던 바닷바람은 윤의 가슴속에 빠듯이 차올라왔다. 도망가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사람.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온전히 그를 위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그런 일상 속에서 그가 옆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특별한 나날들이 되어왔다. 찌링찌링 귀 아프게 울리던 자전거 경적은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들렸고 땀이 뻘뻘 나는 무더운 여름날도 뜨거운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그런 사람이 혼자서 사라져 버렸다.
화평의 아비가 죽었다. 경찰들은 발을 헛디뎌 머리를 부딪친 것 같다 말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지 어미를 죽인 아들이 결국 아비도 죽이고 말았다고 지껄여댔다. 화평에게 가해지던 폭력을 방관하던 마을 사람들이. 윤의 뱃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당신들 모두 죽여버리고 싶어. 화평을 때리고 저주하던 인간. 그가 죽었다고 화평에게 행했던 폭력들이 정당화되는 것이 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평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그 작자는 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화평도. 입술의 온기를 처음 나눴던 그 날. 도망가자라고 말한 것은 모두 진심이었다. 화평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화평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항상 자신의 눈은 화평에게 나와 도망가자. 내가 너를 지킬 수 있어. 라고 말해왔으니까. 단순한 동정도, 한순간에 충동도 아닌 사랑이었다. 화평이 어디로 간 걸까. 화평을 찾아야 했다. 화평을 찾아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화평에게 쌓인 죄책감이든 무엇이든 자신이 모조리 부셔버릴 것이고 자신이 그 빈 곳을 메꿀 것이다. 화평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찾아낼게. 윤의 머릿속으로 울음을 쏟아내던 화평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용시에 도착한 윤의 머리카락을 작은 바람들이 살짝이 흩트려놓았다. 상용시도 계양진만큼이나 덥다고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던 윤은 생각한다. 내리쬐는 햇빛의 열기에 화평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반짝반짝 빛나던 화평의 모습이었다. 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